No.08 연결되는 삶(3)
- 암삵의 삶: 위단비(연재 종료)
- 2019. 6. 7. 09:53
다름이 문제 되지 않는 그들이 있다는 건
삵에게는 무척 고마운 일이었다.
어느 날 연두는 기분이 몹시 안 좋았다. 걱정이 되어서 연두에게 만나자고 했고 연두는 날 만나주었다. 연두는 처음에는 내게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이야기하다 보니 나를 포함한 우리 사차원 식구들은 그냥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사람들 같다고 했다. 내게도 그렇다. 연두와 제이크, 최주성이 모두 만날 때는 물론 만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자신을 내보일 수 있는 관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척 자랑스럽다.
그러나 나는 인정해야겠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존재가 필요치 않다는 것을. 예전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고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길 원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적 욕망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람들을 만나고 보니 그렇지 않았다. 본질적 자신보다 보여지고 싶은 대로 내보여지는 것에서 만족을 얻는 사람들이 있다.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무척 위험하다. 갑옷으로 무장된 사람들 사이에 알몸으로 내던져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알몸으로 내던져진 세상에서 난 나도 모르게 참 많이도 다쳤나 보다. 올해 2월부터 정신과 치료를 시작했다. 한참을 정신없이 발가벗은 채로 돌아다니다가 작년 11월엔 그만 퍼져버렸기 때문이다. 자살에 대한 반복적인 생각이 들고 일상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원래부터 많이 하던 짓이긴 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금방 괜찮아지질 않아서 몇 달 뒤에서야 병원을 갔다. 제작년 즈음에는 다치면서도 알몸인 채로 여전히 사는 나 자신이 참 기특하면서도 애처로웠는데. 그게 아픈 일이라는 생각은 또 못했다. 4차원 식구들과 더 가까워지게 된 것도 대략 11월 그 즈음이었다. 요즘에서야 내 아픈걸 털어놓기도 하지만 그땐 그걸 꽁꽁 싸매고 있으면서도 자꾸 만나려고 들었고 너희가 있어서 참 좋다고 많이도 털어놨다.
약을 먹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꼭 안경을 처음 낀 느낌이었다. 흐리멍텅하고 뭉개져있던 나도, 세상도 조금 더 선명한 색깔들로 보였다. 언제 마지막으로 느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선명한 감각들. 참 오래도 아팠구나, 싶었다. 아픈지 인지하지 못한 채로 오래 지나온 시간들. 병원에 가기까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컸다. 아플 때 달려와 준 제이크, 나의 우울에 섣불리 말을 얹지 않은 4차원 식구들, 병원을 적극적으로 추천해 준 또 다른 친구. 구태의연한 말이지만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혼자 살기 힘들다는 것이 아니라 혼자일 수 없다는 뜻이다.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은 물리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그렇다. 우린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영향을 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다못해 길을 지나가는 누군가의 눈길조차도 누군가에겐 영향이 되곤 한다.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란 내가 나로서 지낼 수 있게끔 도움을 주는 사람을 뜻한다. 나의 존재를 해치지 않는 사람, 나를 존중하는 사람. 내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사람은 내게 좋은 사람일 수 없다. 그러나 많은 경우 존중이라는 미명아래 서로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도, 받지도 않으려고 한다. 웃어넘기고, 집어 삼키며. 그들에게 4차원 식구와 같은 존재는 필요 없을 것이다. 이미 그들은 갑옷으로 본인을 잘 감추고 그에 대해 만족하면서 살기 때문에. 갑옷이란 이 사회의 암묵적 룰과 같다. 적당한 시기와 적당한 성취와 적당한 여가와 사교적 행위들. 잘 살고 있다는 증거들. 그 증거들에 기대어 그 안의 본질에는 다가가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으려 한다.
그것이 나쁘다는 생각은 안 한다. 그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 사회는 어쨌든 그럼으로써 굴러가는 부분이 있으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은 이들이 소외되는 것은 조금 가슴이 아프다. 연결을 바라는 이들, 본질을 내비치고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이들. 그런 자신의 욕망에 의구심을 품고 자신의 존재에 의심을 품는 이들. 생각보다 많을 숨은 그림자들. 기꺼이 합의와 존재의 세계를 누릴 준비가 된 사람들. 그러나 이를 결점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상황들. 이 세상이 굴러가는 것에는 아무 연관이 없지만 내가 굴러가는 것에 자꾸 제동을 거는 어떤 욕망. 연결되고 또 드러내고 받아들여야 굴러갈 수 있는 존재들.
난 여전히, 앞으로도 알몸일 것이다. 이렇게 태어난 걸 어쩔 수는 없으니까. 다른 사람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받아들여지는 부분이 있듯 나 자신에 대해서도 전보다 더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이게 이상한 게 아니라는 걸 인정하면서. 내게 갑옷은 너무 무겁다는 걸 받아들이면서. 알몸으로도 쉴 수 있는 공간을 찾아가면서. 맨몸으로 부딪힐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소외가 아니라 그저 다른 욕망을 가진 거라고, 사차원 식구들과 욕망을 나누면서 깨달았다. 그리고 4차원 식구가 있다면 나는 좀 더 자신 있게 알몸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고 알몸으로 걷는 누군가를 또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우린 무척 반가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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