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의 감각 (1)

   온전히 생존기를 연재한 지 어느덧 두 달이 지났습니다. 두 달 동안 다섯 개의 이야기를 했고, 열 편의 글을 썼습니다. 다섯 개의 이야기마다 궤적에 쉬는 선을 하나씩 그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읽는 이도 쓰는 이도 지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이며, 글감이 되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버린 어떤 감각 산물들에 대한 애정입니다. 일기 쓰듯 일상의 편린을 눌러 담아 둔 몇 개의 문장을 공개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아침.

    나의 방은 해가 떠 있는 시간 중 아침이 가장 어둡다. 아침의 해는 부엌 테이블 자리에 양껏 빛과 열을 끼얹고는, 지구 반대편으로 넘어갈 준비를 하는 시간에 잠깐 내 방에 들러 쉬다 간다. 나는 언제나 평이하고 덤덤한 빛 속에 놓인 채 잠에서 깨고, 그 특유의 덤덤한 시간을 잘 견디지 못한다. 그것은 너무 단조롭다, 그것은 너무 광물적이다, 그것은 너무 날카롭고, 그것은 너무 무관심하다. 어떤 말로도 그 시간이 왜 견디어지지 않는지 설명할 수 없다. 그, 설명할 수 없는 난제를 만날 때마다 오래 웅크려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왼쪽 발가락들을 쭉 폈다가 오므리며 발목을 펴면 항상 종아리부터 쥐가 난다. 쥐가 나거나, 쥐가 나지 않거나로 오늘의 몸을 점친다. 덤덤하고 선연한 아침. 비명을 지르는 아침.


    빛의 영역.

    맑은 날 해가 바닥이나 벽에 부딪혀 만들어지는 기울어지는 사각형 모양의 구역을 나는 종종 혼자서, 속의 말로만 빛의 영역이라고 불러왔다. 빛의 영역이 전개되는 장소는 방에 깔아놓은 라이트 그레이 색상의 싸구려 러그 위이기도 하고, 고양이 밥그릇의 옆면이기도 하고, 음식을 먹거나 책을 읽는 테이블의 끄트머리 자리이기도 하고, 침대를 붙여놓은 벽면이기도 하다. 크기가 제법 클 때도 있고 손가락 하나 다 넣지 못할 만큼 작을 때도 있지만, 그 안에 가만히 몸의 일부를 넣고 기다리면 이윽고 고양이가 오래 앉았던 자리를 손바닥으로 가만히 짚었을 때만큼의 가련한 온기가 느껴진다. 빛은 열을 동반한다. 어느 날 빛의 영역이 러그 위에 전개되었을 때 그것은 양손을 약간 포개어 맞춤 맞게 넣을 수 있을 만큼의 크기였다. 빛의 영역 옆에 앉아 손을 포개어 넣었다. 고개를 숙였다. 오후가 확장되었다.


    한 알의 사과.

    전북 남원에 있는 외할머니 댁에 놀러 가면 얼룩덜룩 익은 크고 단단한 부사를 껍질을 깎지 않은 채 칼로 자르기만 한 것이 간식으로 자주 나왔다. 지금과 달리 기운이 있고 요리에 특출했던 당시의 외할머니는 항상 솥 한가득 소금물에 삶은 감자와 찬물에 씻기만 한 부사를, 마른 마 행주를 깐 싸리나무 소쿠리에 담아 그늘진 쪽마루 한편에 두었다. 원래 색이 밝았을 싸리나무 소쿠리는 오래 쓰이고 쓰여서 얼룩덜룩 아름답게 어두운 채 감자와 사과를 끌어안고 쪽마루에 앉아 마당으로 떨어지는 볕 보기를 하고 있었다. 모두의 사과 중 한 알을 꺼내면 그것은 온전히 나의 것인 한 알의 사과가 되었다. 한 알의 사과를 낮 내내 쪽마루에서, 대청마루에서, 마당에서 굴리고 놀면 외할아버지가 묶어 기르던 백구들이 호기심이 동해 컹, 컹, 코울림을 했다. 그림자가 길어지는 시간이 되면 수돗가에 가 그 한 알의 사과를 씻어 앞니로 깨물어 먹었다. 사과의 표면이 생각보다 단단하지 않고 생각보다 잔금이 많이 생긴다는 것을 한 장의 혀로 감각했다. 달짝지근하고 미지근한 상처투성이, 유년은 한 알의 사과처럼 영글었다.


    스무디.

    예전에 일하던 카페에서는 커피 외에도 스무디를 만들어 팔았다. 그중 인기 메뉴는 바나나 한 개 반이나 두 개, 냉동 딸기 50그램, 우유 조금이 들어가는 딸기 바나나 스무디였다. 사장님은 날씨가 따뜻해지기 시작하면 원두의 주문량을 줄이고 스무디 재료를 더 많이 발주했다. 따뜻하고 건조한, 맑은 날씨가 계속되면 사람들은 쓴 커피보다 단 것을 많이 찾았다. 카페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도 한동안 봄이 왔는가의 기준은 그때 종종 만들어 먹었던 딸기 바나나 스무디 생각이 나는가 나지 않는가였던 적이 있다. 온도는 그렇게 알게 모르게 취향의 영역을 침범했다. 


    안목.

    취향이 오랫동안 변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의 기준이 되고, 기준점이 생긴 취향은 안목이 될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더 이상 스무디가 생각나지 않아 쓴 커피만 주문하게 된 무렵부터 내 안에는 어떤 기준이 생겼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옳지 않다고 선언하게 되는 기준.


    사랑.

    어떤 시간엔 내 주변을 한번 스치고 지나간 모나고 약하고 특별했던 것들을 생각한다. 그것은 너무 오래 써서 결국 한쪽에서만 소리가 나오게 된 보노보스 스피커, 추운 겨울 밤늦게 어린 나와 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집에 돌아가던 엄마의 옆모습, 안 예쁘게 말랐는데도 버리지 못하고 한동안 병에 밀봉해 놓았던 분홍장미, 등 뒤에 날개 한 쌍의 모양을 본 뜬 문신이 있고 팔뚝까지 자해흔이 있었으며 가족에 의해 정신병원에 갇혀 연락이 끊긴 스물두 살짜리 여자애, 기껏 입시를 치러놓고 너무 빨리 숨을 놓아버렸던 열아홉 살짜리 친구의 마지막 모습 같은 것들이다. 이상하게도 그런 것들을 보면 곁에 두고 싶은 예쁨을 느껴 마음이 움직이곤 했다.


    얼음.

    정서의 온도가 갑작스레 영점에 가까워지면 잠을 잘 수 없게 되고, 식사를 할 수 없게 되는 이상한 규칙 안에 갇혀 있다. 누군가가 계속해서 토하지 않는 데에는 입안을 차게 하는 것이 도움 돼, 하고 말해 준 언젠가부터 나는 구토를 하고 나서 차가운 얼음 한 조각을 입에 물고 가뭄처럼 말라가는 몸을 침대에 일자로 눕혔다. 그렇게 누워, 몸 위로 툭 튀어나온 늑골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며 지극하게도 살고 싶었다. 염증과 상처 가득한 식도로 얼음 녹은 찬물이 넘어가는 게 아파서 가급적 이런 것을 알게 되는 사람이 세상에 적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라디에이터.

    고등학생 시절, 아이들은 수업이 끝난 후 쉬는 시간이 되면 벽면에 가까운 책상에 옹기종기 들러붙었다. 교실 내 유일한 난방기인 라디에이터가 벽면에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온기가 부족한 교실에서 발끝은 항상 차갑게 얼어붙은 채 오므라들었지만, 한 번도 벽면으로 다가간 적이 없었다. 벽면으로 다가가는 아이들과, 벽면으로 다가가지 않는 아이들의 세계 사이에는 항상 급작스러운 온도 차가 있었다. 벽면으로 다가가는 아이들이 화상을 입거나 옷이 누렇게 눌어붙는 사고가 종종 일어나자 라디에이터마다 경고문이 붙었다. ‘화상 위험. 가까이 다가가거나 앉지 마시오.’ 때때로 어떤 감정들이 그렇다. 바로 옆에 있을 땐 다칠 만큼 아주 뜨겁고, 조금만 멀어지면 차갑게 식는다. 그리고 눈물은 많기 때문에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브레댄코.

    언젠가 아르바이트를 가는 중에 시간이 잠시 남아 어느 역사 내부의 빵집을 구경했던 적이 있다. 달콤한 빵 냄새들 사이로 휘적휘적 걸어 다니며 나는 문득 가난한 소년처럼 동경에 사로잡혔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근심과 걱정이 탈취된 가벼운 표정으로, 기분 좋은 계획들을 머릿속에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들이 지닌 얼마간의 결핍은 곧 구매한 빵을 먹으며 채워질 종류의 것일 뿐으로 어림짐작이 되었다. 나는 그들 사이의 작고 부드러운 고양이가 되고 싶었다. 꼬리를 부들부들 떨며, 야옹(내게 평안을 주세요), 그러면 사람들은, 꼬리를 부들부들 떠는 작고 부드러운 고양이에게는 대체로 너그러우므로, 조금씩 자신의 평안을 나누어주고 떠날 것이다. 그 모습들도, 내가 바라는 평안도, 사실은 허구임을 마음 한편으로 알고 있었지만 꼬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어쩌진 못했다. 나는 빵을 먹고 싶지 않았지만 단팥 앙금과 연유 크림이 샌드 된 치아바타를 한 덩이 샀다.


    일상 1.

    잠에서 깨어나니 몸이 진흙처럼 무거웠다. 나는 여섯시 일분에 한번, 일곱시 십삼분에 한번, 여덟시 이분에 한 번씩 몸을 크게 뒤척이며 잠에서 깼다. 쉬기로 마음먹고도 잘 쉬지 못하는 몸 때문에 짜증을 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가 아주 천천히 담배를 피우고 아주 천천히 씻었다. 희미해지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몸을 씻으며 간밤이 점점 투명해졌다. 또다시 글이 써지지 않고 말이 나오지 않는 날이 오면 예전처럼 또 다 버리고 돌아가야지, 마음을 조립해가는 작업을 여전히 하고 있다. 조금이나마 덜 불편하기 위해, 라는 명목으로, 보이는 것을 모른 척하는 것은 어느새 비겁한 습관이 되었고 얼마나 많은 것들이 이 때문에 보수되지 못하는지는 스스로도 안다고 생각했었다. 밤이 무너지고, 길이 무너지고, 내 손가락마저 무너지고 나면 그 위에 서 있던 우리의 마음 역시 무너지고 말겠지만, 그때의 나로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테니 지금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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