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 어떤 우울에 대하여 (2)

    사실 우울을 화두로 글을 시작하기 전에 많은 고민을 했다. 누군가에게 우울은 분명히 질병일 것이다. 진료에 따른 상담과 복약으로 많은 부분 도움을 받고 더 편안하게 상황을 견딜 수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텐데, 그런 사람들에게 치료 자체에 의구심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온 이 글이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에 대한 고민이었다. 모든 글은, 아무리 적게 읽혀도 결국 읽힌 이들에게 영향을 행사한다. 이 글 때문에 치료를 진전하는 것을 포기하고 더 힘든 상황에 놓이는 사람이 생기지 않을 거라는 법은 없다.

    그런 분들에게 우선 말하고 싶다. 치료로 효과를 보고 있다면 치료를 지속하시라고. 당신의 방법이 당신에게 가장 최선이며, 당신은 이 글 때문에 불필요한 의문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다. 이 글이 개인적인 논의 바깥으로 확장되는 것은 느리고 기민하기를 원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우울에 대해 고민하고 발언하기를 원하기에 더더욱 책임을 통감하며 쓴다.

    치료를 그만두고 치료 행위 자체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나는 좀 더 우울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애썼다. 병원에서는 병증을 자가 진단하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고 했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증상만 치료하는 방법으로는 내가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이 있었다. 주관적인 감각으로는 관찰할 수 없는, 그러나 내가 응시해야 하는, 나의 결여된 한 조각. 그것을 찾기 위해 시적인 은유나 장식이 빠진, 그저 증상 자체로서의 우울을 관찰해보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 이것저것 많은 행동을 했는데, 그중 집중해서 지속했던 것 중에 하나로 일기 쓰기를 꼽을 수 있다. 프로이트가 병증에 대한 평균을 내기 위해 환자들의 진료기록을 집약하기 시작했던 것처럼, 나는 나의 일상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내가 어떤 계기로 견딜 수 없는 지극한 우울 상태에 빠지는지 알기 위해 내 일상을 글의 형태로 집약하기 시작했다. 기록이 많이 모이면 내 우울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으로 여겼다.

    물론 일기를 하루도 거르고 쓰지 않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도저히 기록할 자신이 없는 하루를 경험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 일기들을 지금 와서 다시 읽어보면, 무난히 읽히는 하루도 있지만 내용을 아주 파악할 수 없는 하루도 있고, 문장 자체가 너무 이상하고 부자연스럽게 나열된 하루도 있다. 아예 한 줄이나 한 단어로만 적혀있는 하루가 있기도 하다. 일기를 써놓았다가 나중에 다시 읽어보는 것은 확실히 우울을 보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데에 도움이 됐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일기를 작정하고 쓴 기간이 3개월을 약간 넘었는데, 그 3개월의 기간 동안 일기에 우울을 언급하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실제로 우울감은 약하게나마 늘 지속되다가, 어떤 계기가 생기면 크게 치솟고 다시 가라앉기를 불규칙하게 반복하고 있었다. 우울감이 치솟게 되는 상황도 매번 달랐다. 일부를 언급하자면, 어떤 날은 눈을 뜨자마자 극도의 우울에 시달리며 그 상태가 며칠간 지속되기도 하고 어떤 날은 누군가의 다툼으로 그렇게 되었다가 수 시간 내에 저절로 나아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날은 누군가와 다퉈도 비교적 의연한 날도 있었다.

    그야말로 우울은 중구난방으로 날뛰었다. 나는 우울의 원인을 어떤 결핍으로 상정하고 내 결핍이 무엇인지 찾아 해결하면 우울이 사라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우울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우울을 피해서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만 기정사실화 시켜버린 셈이다. 삶이 너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원인도 모르는 우울의 사이클 안에 갇힌 채 이렇게 평생을 살아야 한다니, 스스로를 위해 뭘 더 할 수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 막막했다. 존재 자체가 잘못된 것만 같은 이상한 이질감 때문에 괴로워서, 그날은 한참을 울다가 침샘까지 퉁퉁 부은 채로 잠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우선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잘 지내고 있다. 잘 지내게 되는 데에 딱히 무언가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됐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내가 더 이상 우울하지 않은 줄 알거나 모든 힘든 상황에서 탈출한 줄 알고 부러워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오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나는 원고를 쓰고 있는 지금도 우울하다. 잘 지낸다는 말은 내가 더 이상 우울하지 않단 말이 아니라, 우울감은 있지만 그래도 할 건 다 하고 있다는 뜻이다. 아마도 그간 나는 우울에 많이 익숙해지고, 우울한 상태를 보다 여상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자라난 것 같다.

    나는 최근 몇 년간 한 번도 나의 일상을 무단으로 팽개친 적이 없다. 어제 죽고 싶어 하다가 오늘 일하러 나가고, 무기력감 때문에 약속을 잡을지 수십 번 고민하다가 이내 친구를 만나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식으로 일상이 흘러간다. 이런 나날을 살며 내 안쪽에는 하나의 지표가 생겼다. 내 ‘잘 지냄’의 기준은 우울하거나, 우울하지 않거나가 아니라 ‘일상을 얼마나 잘 지탱하고 있는가’에 있다.

    아무리 우울해도 일상은 존재해야 한다. 우울은 눈앞의 많은 것을 가려서 보지 못하게 만들지만, 내가 우울 이후를 보지 못하더라도 우울에서 빠져나온 이후의 삶은 너무나 당연하게 존재하고 있다. 일상이 우울에 송두리째 잡아먹히고 나면 나중에 좀 더 괜찮아졌을 때 ‘일상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음’을 통감하고 더 큰 우울-무기력에 빠지게 된다. 주변의 지속적인 도움으로 일어설 수 있으면 좋겠지만 사실 타인에게 그만큼을 기대하기에 나는 그간 너무 오래 혼자서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이것을 담담한 말투로 인정하게 되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인정하고 나니 그제서야 스스로를 돌보는 것이 당연해졌다.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일상을 지킨다. 최소한의 일상적 루틴만큼은 우울이 동반하는 무기력에 내주지 말 것. 그러기 위해 노력할 것. 이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우울 대처법’이다. 요컨대 이런 것이다. 점심과 저녁 끼니를 챙기고, 정한 시간에 잠이 들고, 알람에 맞추어 일어나고, 예정된 수익 활동들을 미루지 않고 완료하는 등의, 일상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활동들을 꾸준히 하는 것이다. 특별한 계기 없이도 이것이 잘되지 않으면 항우울제나 수면제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고 스스로 정해 놓았다. 아기를 키우는데 손이 모자라면 주변인들의 도움을 빌리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 우울은 아기 같다. 그것도 귀여운 아기가 아니라 잘 자고 있는 걸로 보여 잠시 눈을 떼면 요람에서 나와 곧 죽을 것처럼 울어 대고, 혼자서 내버려 두면 반드시 무슨 일이 생길 것이기 때문에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인간 아기를 많이 닮았다. 내가 육아를 직접 해본 적은 없지만 육아와 우울을 통제하는 일은 많은 공통점이 있다. 뜻대로 되지 않는 무언가에 내 의지를 개입시켜야 한다는 점이 그렇다. 아기를 무조건 강압하면 아기가 건강하게 자라지 못하듯이, 우울도 마찬가지다. 우울을 마구 억누르거나 해서 우울이 다쳐버리면 나중에는 예측 불가능한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우울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알고, 우울도 나도 다치지 않도록 최대한 잘 타협해서 좋은 협의안을 끌어내는 것이 최선이다. 우울과 함께 타협하며 살기. 이것이 그간 살아내며 찾아낸, 가장 고통이 적은 선택지다.

    만성 우울이라는 이름의 아기와 손을 잡고 함께 천천히 걸어가는 여행을 하고 있다. 우울이 나의 속도에 맞춰줄 때도 있고, 내가 우울의 속도에 맞출 때도 있다. 어쨌든 함께 끝까지 걷는 것이 중요한 여행. 여행 자체가 목적인 여행. 나의 삶은 그런 모양이다. 언젠가 우울에게 내가 필요 없어져서 자연히 나를 떠나갈 때까지, 나는 우울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함께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평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제 그렇다고 해도 특별히 더 고통스럽지는 않다. 내가 우울을 나의 일부로, 치부가 아닌 일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스스로 인정하는 행위의 힘이 이토록 크다는 것을 최근에 들어서야 실감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약 먹고 낫는다던데, 또 어떤 사람들은 우울을 극복해 낸다던데, 우울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기로 한 나의 결정이 누군가에게는 아주 이질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오래 고민하고 내린 중요한 결론 중 하나이고, 이것은 타인 중 누구도 바꿀 수 없다. 이 결론이 수정된다면 그것은 오롯이 내가 나를 위해서 내리는 결정일 것임을 스스로 알고 있다. 나는 더 이상 타인이 편의로 정해 놓은 표준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앓지 않을 것이다. 내 삶이 얼마나 견고한지는 내 삶의 행보가 증명하고 있으니까, 나는 말로써 그것을 타인에게 증명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직 결론을 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고픈 말이 있다. 늦건 빠르건 당신은 언젠가 당신을 위한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우울에 지치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다. 살아있기만 해도 많은 것을 하는 거니까 밥을 잘 먹고 잠을 잘 자는 것 외에 다른 것은 고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밥 먹기와 잠자기 외에 다른 것을 요구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요구하는 사람이 도무지 설득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라면 잠깐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그런 정서적 재난을 겪으면서도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라는 사실이다.

    주변인의 우울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픈 말이 있다. 그 주변인이 아주 밀접한 관계이건, SNS 안에만 존재하는 사람이건, 그냥 친구 정도이건, 그 사람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기 전에 조금만 더 고민해 줬으면 한다. 그 사람이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을 때 당신은 책임질 수 없고, 그 사람은 언젠가 본인을 위한 결론을 내린 후 자신의 삶을 계속 걸어가야 한다. 당신의 그 다정한 위로가 위안이 될 수도 있지만, 누군가를 무기력 상태에 오래 방치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식사를 챙기라고, 잠을 자라고, 최근에 읽은 어떤 책이 좋았다고, 일상적이고 주제가 있는 이야기를 건네주면 좋겠다. 당신은 그 사람에게 나보다 다정하고 의미 있는 사람일 테니까, 당신은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다. 당신은 그 사람이 일상의 감각을 잊지 않도록 도울 수 있다.

    힘든 상황에 몰렸을 때 힘든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 힘듦을 어떤 방식으로 표출하는 것은 감정의 건강한 작용이다. 이 당연한 결론에 이르기까지 왜 그토록 오랫동안 힘들게 고민을 해야 했는지 잘 모르겠고, 괜한 고생을 시킨 것 같아 스스로에게 미안하기까지 하다. 나는 그간 스스로 낸 상처에 어느 정도 죄책감을 가지고 있고 이 죄책감까지가 내가 책임져야 할 몫임을 안다. 스스로에게 속죄하며 살 것이다. 그리고 이제 확신을 담아 말할 수 있다. 우울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고 말이다.

    나의 우울이 잘못되지 않았듯, 당신의 우울도 잘못되지 않았다. 나는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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