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안녕히

   “조 스텝, 사람들이 매장이 멋지다고 난리야. 막 와서 사진 찍어가고 그러네, 하하. 조만간 이 매장을 프랜차이즈로 확장하려려고. 조 스텝이 확장되는 매장 관리나 오픈 준비 이런 걸 좀 맡아주면 좋겠는데, 어때요? 회사에서 차도 주고, 기름값도 주고, 법인 카드 주고 그럴 건데. 그러면 조 스텝은 전국에 오픈되는 매장에 가서 물건 배열해주고, 포스 사용 알려주고 그러는 거지.”
   “우선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좀 더 구체적인 제안을 주셔야 저도 고민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차랑, 법인 카드, 월 200 정도 생각하고 있는데?”
   “네, 그럼 생각해보고 말씀드릴게요.”

   정말이지 사람의 앞일은 아무도 모른다. 나만 해도 이렇게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틈틈이 농사를 짓고, 집 안팎을 살피는 삶을 살게 될 줄이야. 볕 좋은 날이면 마당에 서서 이제 제법 깨끗해진 시골집을 지그시 바라본다. 만약 이 집을 다시 치우고 가꿔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절대 두 번은 못 할 일이다 하며 거절할 것인가, 한 번 겪어봤으니 더 좋은 방법으로 해낼 수 있을 것인가. 후자일 것만 같아 실소가 지어진다. 다시 찬찬히 살펴본 집은 제법 깨끗해졌음에도 여기저기 손 대야 할 부분이 보인다. 보금자리를 살피고 가꾸는 일은 평생 해야 하는 일상의 일인데 지금 한순간에 끝내려는 마음은 욕심이 과하다 싶어 마음이 번잡스럽다. 그저 이 따스한 봄볕을 마냥 즐길 수는 없는 걸까. 


   지난주 화요일은 아빠의 기일이었다. 아직도 생생한 2년 전 그날. 어릴 적에 마을 할머니들이 이미 오래전에, 심지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그들의 남편 이야기를 ‘우리 서방’ 하며 밥 먹듯이 입에 올리는 게 도통 이해가 안 되었는데, 아빠를 떠나보내고 나서는 할머니들의 말버릇이 너무나도 이해가 된다. 인간은 생각보다 유한하고, 한계가 많은 존재라는 것을 새삼 실감하는 것이다. 인생을 이룬 수많은 사건 중에 유독 깊은 아픔과 아쉬움을 남긴 사건, 인간의 능력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죽음'이라는 사건 앞에서 우리는 한 없이 작아진다. 죽음의 문턱을 넘은 이의 안부를 확인할 길이 없으니 보고 싶을 때마다 마지막 순간을, 혹은 좋았던 혹은 아쉬웠던 순간을 수없이 되풀이하며 보고픈 마음을 다독일 수밖에.


   나로서는 이따금 아버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곤 하지만 떠난 그를 위해서도, 남은 우리를 위해서도 그것에 사로잡혀 살고 싶지는 않다. 이제 엄마와 동생도 일상을 잘 견지하고 이 보금자리도 웬만큼 구색을 갖췄으니, 이만하면 내 책임을 다했다 싶다. 더 지체하지 말고 내 삶의 자리를 찾아 떠날 계획을 세웠으므로, 사장의 권유에 잠깐 흔들렸으나 거절하고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다. 

   꽤 오랜 시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다 보니, 명함이 있는 회사원이 부러워졌다. 모든 것에 장단점이 있듯이, 아르바이트 역시 그러하다. 처음에는 아르바이트의 장점이 좋아 시작했다. 회사보다 급여가 적지만 그만큼 책임도 적고 하는 일도 간단했다. 무엇보다 오후에 출근하기 때문에 내가 부지런하면 출근 전에 운동이나 공부, 농사 등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아르바이트를 오래 하다 보니 이제는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 근무시간은 큰 차이가 안 나지만 급여는 50만 원 정도가 차이 나고, 책상과 컴퓨터, 자신만의 자리가 있는 것이 부러웠다. 무엇보다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 전에 퇴근하는 삶, 그 삶을 살고 싶었다. 해는 저물어가는데 근무시간은 수 시간 남았다는 게 숨통을 옥죄곤 했다.


   이런 마음이 있어서 사장이 제시한 정규직의 자리에 혹했다. 하지만 그 조건을 찬찬히 살펴보면 과연 그 사람다웠다. 차와 법인 카드를 주겠다며 굉장히 으스대지만, 그 차는 업무용 차고, 카드도 업무용 카드이다. 내 성미에 법인 카드로 사리사욕을 채울 것도 아니고, 차량도 마찬가지인데 그게 무슨 큰 메리트인가. 허울을 걷어내고 정직하게 표현하자면 ‘식사비 제공’, ‘주유비 제공’ 정도가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그 차량은 회사 출퇴근용이 아니고 전국의 고속도로와 국도를 오가야 한다는 것의 다른 말인데, 하루가 멀다 하고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하는 업무가 내가 원하는 일이었던가? 아니다. 매장 오픈을 관리한다고? 말이 좋아 관리이지, 한참을 운전하고 가서 매장을 정리하고 다시 운전해서 집에 돌아올 힘이 있을까? 지방 매장을 오픈해야 한다면 그 매장 근처 숙박업소에서 여러 날을 지내야 하는 건 떼 놓은 당상 같은데. 이렇게 불규칙한 삶을 살며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나 자신을 살필 수 있을까? 또 프랜차이즈 사업이 확정되지 않은 현 상황에서는, 사장의 심부름꾼밖에 안 될 텐데. 얼마나 비위를 맞춰가며 일해야 할 것이며, 또 얼마나 시켜 먹을까. 이렇게 따지지만 그런데도 세전 350을 준다면 했을 것 같다. 인심은 곳간에서 나오니까. 돈 있는 모두가 건강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겠으나, 곳간이 차 있다면 적어도 곳간에 대한 걱정은 안 할 테니까.

   들어온 제안을 콧대 높게 걷어찼는데, 코로나 19로 인해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되었다. 5월에 워킹 홀리데이를 떠날 예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최소한 연말까지는 시골에서 생활을 이어가야 한다. 의아하고 다행스럽게도 좌절되지 않는다. 못내 아쉬웠던 사무직으로 취업을 할 기회가 되기도 했고, 눈에 거슬렸던 집 주변을 치울 시간도 충분하고, 운전면허를 준비하는 엄마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을 테고, 부지런하게 움직이면 체력 기를 시간도, 책을 읽을 시간도 충분할 테니 말이다. 물론 이 역시 생각대로 쉬이 되지는 않겠지만.
   
   나라는 존재가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주위 사람들과 켜켜이 잇닿아 있어, 그들로 인해 내 삶에 평온한 햇살이 비칠 수도, 비바람이 치고 소용돌이가 불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전에는 이런 상황을 마주하면 인생이 칭칭 엉킨 실타래 같아 숨이 막히고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하나 막막했다면, 이제는 ‘이럴 수도 있지’ 하며 바뀐 상황에 따라 삶의 계획을 바꿀 뿐이다. 누군가를 원망하며, 미워하며, 억울해하며 삶을 지속하고 싶지 않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여 몸을 움직이고 마음을 잘 살필 뿐이다. 아직 이루지 못한 것들에 안달하기보다 이미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는 내가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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