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밤이 엄마

   동그란 사람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터전을 풍성히 가꾼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주어진 삶의 조건을 인정하고 나아가 극복하려는 자세이며,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신뢰하고 긍정하는 태도가 아닐까? 우리는 이런 사람을 흔히 ‘부지런한 사람’이나 ‘살림꾼’ 등으로 부르곤 한다. 여기에서 언어가 그 의미를 축소해버리는 한계를 경험한다. ‘부지런한 사람’이나 ‘살림꾼’으로 그 존재를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니 말이다.

   지인 중에도 자신의 삶을 부지런히 일구어 나가는 사람이 여럿 있다. “밤이 엄마”는 그중 한 사람이자, 단연 으뜸이라 여겨지는 사람이다. 그녀를 알게 된 건 두 해 전 사회학 세미나에서였다. 초롱초롱한 눈, 둥근 얼굴과 광대, 또 둥그런 코와 입, 아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동글동글했다. 심지어 목소리와 웃음소리까지도 둥글게 느껴졌다. 

  그녀를 보며 언젠가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엄마도 젊은 적엔 나름대로 성질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4남매 낳아 키우고, 시어머니 모시고, 게으른 남편하고 살다 보니 참는 게 성격이 되었다고. 하도 고생을 많이 하고 살아서 성격이 모난 데 없이 동글동글해졌다고.
   

   잔소리

   나는 누군가에게 조언이나 잔소리 듣는 걸 싫어한다. 부모님께 잔소리를 듣고 자라지 않아 그런 것도 있고, 나름의 상황이 다른데 앞뒤 안 따지고 자기 생각만 내뱉는 멍청함이 끔찍하게 싫기도 하다. 무엇보다 나를 위해 하는 말이랍시고 내뱉는 그들의 이야기 중 대부분은 자신의 잘남을 자랑하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누가 나에게 간섭이나 참견을 하면 예, 예 대답하며 듣는 시늉을 하다가 금게 고개를 젖히고 눈동자를 굴리곤 한다. “라떼는 말이야~”가 유행어가 되어 얼마나 좋은지. 그 말이 유행한 덕에 그런 상황에서 느끼는 불편함에 대한 감각도 널리 퍼진 듯하다.

   그런데 잔소리가 불편하지 않은 낯선 경험을 했다. 내게 잔소리를 펼친 사람은 밤이 엄마다. 왜 나는 그녀의 잔소리가 불쾌하지 않았을까? 첫째, 그녀의 자랑이 아닌 나를 생각해서 한 말임을 느꼈기 때문에. 둘째, 그녀는 쉽지 않은 삶의 순간에도 정직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잔소리가 전혀 불편하지 않은 낯선 경험을 하며, 나도 모르는 새에 그녀를 꽤 신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내게 말했다.

   “조이씨, N번째를 위해 시작해봐요.”

   그녀가 얼마 전에 읽은 책이 정-말 좋았는데, 그 책이 그 작가의 첫 번째 저서는 아니고 세 번째인가, 네 번째 저서였다. 밤이 엄마에게 그 작가의 앞선 책들은 큰 울림이 없었는데, 최근 출판된 책은 같은 작가가 맞나 싶을 정도로 그녀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 놨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작가가 이전의 책들을 거치지 않고서는 이번 책이 나올 수 없었을 거라며, 내게도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 내서 계속 써 나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이전에 연재한 ‘리얼 포레스트’를 다시 보면 비문도 보이고, 표현도 아쉽고, 연재의 의미를 잊어 가기도 해서 새롭게 연재를 시작할 힘이 부족하던 때였다. 단단하고 올곧은 밤이 엄마의 조언 덕에 ‘예민한 알바생’ 연재의 물꼬를 트일 수 있었다.


   씨앗 나눔

   몇 주 전에 밤이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다. 농사지으며 마련한 씨앗이 있느냐는 것이다. 최근 밤이가 아파서 병원에도 자주 오가고, 밤이 건강하게 먹이느라 외주 일도 하시던데 거기에 주말농장까지 하신다니! 그동안 가꿔 오던 옥상 텃밭으로는 성에 안 찼을 것이 과연 밤이 엄마다웠다.

   그녀의 에너지에 한번 놀라고, 그녀의 아이디어에 또 한 번 놀랐다. 밤이 엄마는 시중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는 모종이 아닌, 지인들이 농사지은 씨를 이어받아 텃밭을 가꿀 작정이라 하지 않던가? 내 머릿속에선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상상력이다. 이 역시 밤이 엄마다운 멋지고 아름다운 발상이다. 그 제안을 듣는 순간부터 마음이 몽글몽글 부풀어 올랐다. 부탁을 받은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이제서야 씨앗 택배를 챙기고, 글을 쓰며 부푼 마음을 꺼내 본다. 지난 몇 주 동안 그녀가 내 마음에 머물렀다. 내 방식대로 밤이 엄마를 이해하고 오해하며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예민한 알바생’은 다음 화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종료한다. 연재 종료를 앞두고 밤이 엄마에게 꼭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다. 당신이 전해준 진심 어린 조언 덕에 두 번째 연재를 시작할 수 있었고, 앞으로 글을 써 나가는데도 큰 힘이 될 것 같다고. 당신의 조언과 당신의 삶에 나 또한 진심으로 고맙다고 인사를 전한다.

   부디 코로나 19가 너무 머지않은 때에 안정되어 보고픈 얼굴 가까이하고 즐거운 이야기 나눌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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