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카오스, 2020년 한국 by 이나

    주변에 적어도 한 명은 그런 사람이 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경계를 마음대로 오가며 주변 사람들은 속이 타든 말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인생을 그야말로 즐기는 사람들. 이들을 보는 시선은 보통 부정적일 것이다. 나의 경우, 내게 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그러한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을 어떤 면에서는 부러워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모난 성격이 상황과 사건과 사람들에 의해 깎여 나가지 않고 뾰족한 채로 고스란히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그(녀)가 속해있는 주변환경이 부럽다. 굳이 따지자면 이들에 대해 갖고 있는 내 인상은 타인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왕족'이라는 느낌에 비슷할 것이다.

    만약 순탄치 않은 여정이 예상되지만 그 고생에 비해 얻어지는 결과가 향후 인생에 있어서 도움이 될지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에 임하는 것에 대한 선택권이 왕족과 평민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진다면, 과연 각자 어떤 결정을 내릴까? 아마도 왕족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단칼에 거절을, 평민은 나중에 어차피 겪을 수도 있는 일이니 손해 볼 것은 없다는 생각으로 그 여정에 참여 의사를 밝힐 확률이 높을 것이다. 문제는, 난 절대 왕족에 속하지 않으니 평민이 응당 내려야 할 결정에 묻어가야 하겠지만 내 본성은 그렇지 않다는 데에 있다.


    당신과 세상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할 수는 없습니다

    흔히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이건 순전히 확률 게임이라는 생각도 든다. 힘든 일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 개념이니까. 준비성 철저하게 뭐든 경험하고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여 대비해 놓는다면 물론 든든하긴 하겠지만, 과연 고생을 굳이 사서 해야 하는 것일까 라는 의구심이 든다. 예상 밖의 일들이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펼쳐질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라는데, 예습해 놓았던 것에서 본 시험이 출제되리라고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난 응용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잔잔한 바다는 좋은 선원을 만들지 못한다는 말도 있지만, 만약 좋은 선원이 아니라 그냥 오늘 내일 입에 풀칠할 정도면 족한 그런 정도의 항해 실력도 만족하는 선원이라면, 과연 굳이 풍랑에 맞서고 태풍을 견뎌낼 필요가 있을까? 매사를 치열하게 살아내야 하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최선을 다해 보내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하루라는 시간을 그저 소비하는 사람도 있고 허비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마다 생김새가 다르듯 성격도 인성도 자질도 저마다 다른데 자신이 아닌 모습을 기대하는 누군가의 압박 때문에 자아를 저버리는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삶인가?

    결국 가치관의 차이로 귀결되는 이 문제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서로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견해를 절충하면 해결될 일이다.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을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은 엄밀히 말해서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해 나갈 자질이 없다. 절대적 진리라는 것은 학문의 영역일 뿐이며, 일상의 영역에서 필요한 것은 소통을 통한 절충과 타협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아는 진실을 굳이 떠벌리고 증명하는 사람은 없다.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수긍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동요되지도 않는다. 진리라고 믿는 타인의 의견에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을 굳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강요하고, 상대의 견해가 틀렸다고 몰아붙이는 것은 미성숙한 아집의 발로일 뿐이다.

    이 모든 장광설은 쇠고집 답정너인 전 직장상사와의 기나긴 불화로 고통받던 지난날을 회상하던 중에 발현됐다. 업무적 사항은 물론이요 업무 외적인 것마저 자신의 지시에 맞추는 것이 진리이며 사회생활의 진수라 믿어 의심치 않던 그녀 때문에 난 좋아하는 노래와 정치 성향마저 공격받기도 했다. 그녀가 지금은 어디에선가 그저 근근이 살고 있길 바란다. 절대로 ‘잘’은 아니고 ‘근근이’.


    서로 생각이 다르다고 해도 다같이 정신줄을 놓을 수는 없지 않을까요

    동시에 이 글은 자신의 신념만이 정답이고 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적대시하는 극렬’빠’집단, 하나의 사건에 대해 의견이 대립되는 두 집단과 더불어 ‘악의 축’으로 일컬어지는 제 3의 집단이 존재할 때 악의 축이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듯 엉겁결에 옳은 말을 해서 두 집단 중 하나와 의견이 유사하게 되자, ‘악의 축이 하는 말에 동의하니 너희도 한패’라며 두 집단을 싸잡아 적으로 간주해버리는 혼자 남은 집단, 사흘이 3일인지 4일인지 정확히 모르는 것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 것도 모자라 왜 잘난 척이냐며 비아냥대는 반지성주의자 무리에 대한 견해이기도 하다. 이 나라는 민주주의와 토론문화가 뿌리내릴 기회가 없었던 빈약한 지반을 지닌 관계로 ‘연공서열’, ‘위계질서’, ‘집단주의’, ‘지식’과 ‘권위’ 등이 그간의 신성한 자리를 벗어나 실용성이라는 새로운 위치를 찾아가는 과정이 너무나 게걸스럽기 그지 없는 것이다.

    획일화된 조화로움보다 다양한 개성이 꽃피운 카오스 상태가 발전과 상생의 모습에 보다 가까운 형태이겠으나 개성에 대한 정의가 지식의 하향평준화를 장려하는 방향과 맞닿아서는 안 되며, 소수자를 차별하고 조롱하는 결과로 이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요즈음 너무나, 혼란스럽다. 코로나라는 전지구적 역병과 재난 급의 기후변화, 커져만 가는 빈부격차 등 그야말로 극으로 치닫는 중인 작금의 상황은 대중의 이성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할지도 모른다. 존재하던 체계들이 총체적으로 붕괴되고 있는데 그것이 구습의 타파라는 긍정적 작용으로도, 동시에 상식과 예절을 등지고 무례와 무식을 진솔함과 동일시하는 역효과로도 나타나고 있다. 아마도 자칫 한 걸음만 삐끗해도 공멸해버릴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바로 요즈음이 아닐까 하는 아찔한 생각마저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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