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면 된다? 하면 는다! 《말하기를 말하기》 by 이소

   김하나 작가님을 좋아한다.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모르겠지만, 처음엔 SNS를 통해 멀리서 바라보며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라는 책을 내셨구나. 표지 일러스트가 무척 멋지다. 베스트셀러라니 부럽다.’ 정도로만 생각했다. 작가님은 도토리 머리 같은 짧은 숏컷 둥근 얼굴에 평온하지만 단단한 인상을 지니고 계시고 부드러운 중저음을 지니셨다. 셔츠 위에 스웨터를 즐겨 입으시고 통 넓은 면바지는 밑단이 접혀있어 그 아래엔 알록달록한 양말이 보이곤 한다. 작가님 책은 읽지 않았지만 어쩌다 SNS를 구독하게 되었는데 매번 올라오는 일상에 나도 모르게 내적 친밀감을 쌓아가며 사람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가끔 황선우 작가님과 함께 리코더와 우쿨렐레로 연주하는 영상이 올라올 땐 ‘이것이 정말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는 길 같아!’라고 생각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는 것이 꿈이라서 괜히 그 음악대 사이에 껴들고도 싶었다.

    얼마 전 SNS에 작가님이 탁자 위에 책을 쌓아두고 한 권씩 싸인하는 모습이 올라왔다. 새 책이 출간될 예정이고 2,000부 한정으로 싸인본을 배본한다고 하셨다. 싸인 하나에 글과 싸인, 싸인 번호, 그리고 그림까지 그리시느라 무척 노곤해 보이셨다. 어떤 책일까? 곧 책의 이름이 공개됐다. 바로《말하기를 말하기》. 우선 큼직하게 그려있는 일러스트가 무척 멋있었다. 말하기 책이라고 해서 입을 크게 벌려 소리 높여 외치는 모습이 아니라 차분한 태도로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이 그려져 있었고 배경엔 베이지색이 은은하게 깔려있었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무척 내성적이고 낯도 많이 가리고 수줍음도 많아 언제나 말을 조리 있게 또박또박 큰 소리로 내고 싶었기에, 은은한 이미지의 말하기 책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마침 사유와 마음들을 잘 표현하고 싶은 욕구도 있던 참이었다.

    책이 곧 예약 판매를 시작했다. 예약 판매 첫날엔 책을 장바구니에 넣고 마음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음날 보니 온라인 서점 사이트에서 검색 순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작가님 손길이 묻은 싸인본을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고 장바구니에 담았던 책을 바로 구매했다. 작가님께선 SNS를 통해 책 구매 인증을 마친 독자들의 게시물을 공유해주었고, 나는 출간일이 되길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책이 담긴 택배가 집에 도착했다. 조심스레 표지를 열어보았다. ‘목소리를 냅시다! 김하나 1713’ 작가님의 짧은 문구와 싸인은 마치,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 초콜릿 안에 숨겨있던 금색 티켓처럼 빛이 났다. 책을 직접 받아보니 모니터로 봤을 때보다 물성이 더 좋았다. 전체적인 표지와 내지가 부들거리고 가벼운 종이라 한 손에 착 감겼다. 우선 서문을 읽었다. 중요하지만 놓치기 쉬운 말하기에 관한 사유를 공유하신다면서, ‘자, 그럼 이제 말문을 열어볼까요?’라고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말문’이라는 단어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문을 여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문으로 분리되어있던 서로 다른 성질의 공간을 잇게 되고, 그 문으로 들어가고 나가며 나라는 존재의 위치와 상황에 변화를 주기도 한다. 말문을 열게 되면 어떨까? 말을 통해 나를 내보이고 또 내 세상을 확장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몰려왔다.

    책은 잘 말하기 위한 실용적인 고민과 방법을 작가님 일상 이야기에 녹여내 전하고 있었다. ‘아, 나도 말할 때 꼭 명심해야지.’하며 마음에 새기는 부분들이 많았다. 그중 가장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것은 책에서 전해준, 말하는 용기이다. 작가님은 어린 시절 지독히 내성적인 아이였고 목소리를 내기가 늘 두려웠다고 하셨다. 집에 손님이 오면 방에 들어가 화장실도 가지 못한 채 몇 시간씩 숨어 있고, 등하굣길엔 다른 아이를 만나면 무슨 말을 주고받을지 몰라 아는 친구를 만나도 그 아이와 마주치지 않도록 멀리 떨어져 서성였을 정도라고 하셨다. 그랬던 작가님이 말하는 일을 하고 말하기 책까지 쓰게 되신 것이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잘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작가님은 ‘하면 된다.’ 보다 ‘하면 는다.’라고 말한다. ‘잘 말하고 싶다!’ 나에게 또 새로운 꿈이 생겼다.

    완독 후 며칠이 지나, 내가 좋아하는 북튜버 편집자K님께서 김하나 작가님과 스몰토크를 하는 영상이 올라왔다. 애정하는 편집자님과 애정하는 작가님의 만남이라니, 나는 어서 영상을 틀었다. 책이 아닌 말로서 듣는 이야기는 또 색달랐다. 영상을 통해서는 내 말하기 꿈에 관해 구체적인 실천 팁을 얻을 수 있었다. 하나는 말할 때 음향에 주의하는 것이다. 말에 담긴 내용도 중요하지만 말은 결국 소리이다. 말의 속도, 호흡, 음량 등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중요한 도구가 된다. 다른 하나는 말할 때 조급해하지 않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빨리 또 조리 있게 말하려는 강박감이 생기면 그 순간 사고는 경직되고 내가 무엇을 입 밖으로 내뱉고 있는지도 모른 채 소리 낼 수 있다. 특히나 대화 안에서 조급한 태도는 상대방의 말을 잘 듣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깊이 오가는 대화가 아닌 일방적인 토로 형식의 장이 되어버린다. ‘조급해하지 않는 태도로 음향에 주의하며 말하기’는 앞으로 긴 시간 이어질 설레는 도전이 될 듯하다.

    나는 페미니즘을 만나기 전까지 여성 혐오에서 비롯된 개념인 ‘여자다움’이란 사회적 요구에 나를 끼워 맞추려는 사람이었다. 내성적이고 조용하고 수줍던 나는 어른들에게 ‘천상 여자네.’라는 칭찬(?)을 듣곤 했다. 다른 사람 앞에 나서는 일은 내게 큰 용기가 필요했을 뿐 아니라, 나는 여성이니 나설 필요가 없다고도 여겼다. 언제나 겸손해야 했기에 내 성과에 대해서도 부정하며 사람들이 내게 건네는 칭찬을 거부했다.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다. 말하고 싶다. 내 생각과 감정을 사람과 사회 앞에서 드러내며,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세상이 움직일 수 있도록 이야기할 것이다. 말하기에 관해 감히 내가 어떻게 해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책을 읽으며 기꺼이 시행착오를 겪겠노라 다짐했다.

    오늘 마침, 말하기 일정이 있었다. 짧게 진행하는 북토크였는데 영상으로 녹화하는 방식이었다. 북토크 장소에 가는 동안, 책에서 얻었던 용기를 잃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소리를 또박또박 내고, 천천히, 여유롭게 말하자!’ 카메라 앞에서 긴장됐지만 다행히 막힘 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다. 워낙 발음이 좋지 않은 나라서, 말끝을 흐리지 않도록 주의했다. 북토크를 마치고, 아쉬운 점이 많이 들었지만, 자책감이나 부끄러움보다는 개운함과 기대감이 더 부풀었다. 지금은 많이 부족하지만 말할수록 더 잘 말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언젠가 카리스마 넘치게 말하는 나를 상상하며, 작가님이 독자에게 전해준 마지막 문장을 되새겼다.

    ‘기억해, 너는 말하는 사람이 될 거야.’

Illust by 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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