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당연한 걸 말해야 하는지 매번 지치지만, <좋아서 하는 일에도 돈은 필요합니다>


  돈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에게 돈 없이 허락되는 것은 단지 숨 쉬는 것뿐인데.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예술가에게 특히 이런 잣대를 들이대곤 합니다.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되면 오히려 예술적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든지, 가난과 결핍이 예술혼을 불어 넣는다고도 하고요. 이 무슨 개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술가도 경제활동의 수단인, 직업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활동이잖아요. 게다가 경제적 보상이 일한 것만큼 이뤄지지 않는 활동은 엄연히 자원봉사라는 이름으로 따로 존재하고 말이죠. 흔히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사람은 두 가지 유형 중 하나라고 합니다. 하나는 어마어마한 부자라 돈 개념 자체가 일반인과 다른 집단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돈 문제는 세상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타인의 그것은 알 바 아니라고 여기는 집단. 전자는 워낙 다른 세계 사람들 이야기이다 보니 별로 논하고 싶지도 않고, 후자는 이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거의 이 집단의 혀와 손끝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해서 진심으로 싫어하는 편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현실이라는 장벽을 극복하려 해본 경험이 있어서 저자에게 더욱 공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흔히 좋아서 하는, 재미있는 일은 돈이 안 된다고 하죠? 제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본업으로 삼았던 수공예 일이 그랬습니다. 제대로 하려면 환기가 잘 되는 작업실과 질 좋은 재료들, 그리고 이 모든 걸 가능케 하는 자금력이라는 최소한의 3요소가 갖춰져야 기본적인 운영이 가능했죠. 일에 대한 열정이나 제 작품에 대한 대중의 (수요로 이어지지 않는) 반응만으로는 생활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상당한 노력과 용기가 필요해요.

 

    저자는 정말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2017년 제14회 한국대중문학상 최우수 포크노래상으로 받은 트로피를 경매로 넘겨버린 퍼포먼스는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당장 필요한 건 월세를 지불할 돈인데 명예와 권위가 그보다 반가울 리 있을까요? 누구나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본다면 이해가 되지 않을 게 없는데 말이죠. 남성 아티스트의 퍼포먼스였다면 이른바 혁신이라며 칭송하는 동시에 예술가의 경제상황의 실태에 논의의 초점을 맞췄을 법하지만, 몇몇의 눈에는 아직 이 나라의 여성 아티스트에게는 이러한 대담함이 허락되지 않는 듯합니다. 그 대신 돌아온 것은 압도적 '괘씸함이었습니다. 저자에게는 별 타격이 없었던 듯해서 다행이지만, 이 퍼포먼스가 한국대중문학상의 권위를 실추시켰다며 한동안 꽤나 소란스러웠던 걸로 기억해요.

 

    일반적으로 남성에게는 업무능력과 인성이 판단 기준의 전부라면 여성에게는 그 두 가지는 기본이고 성적 매력, 옷차림, 표정, 말투, 억양 등도 모자라 너무 예뻐도 안 되고 너무 못 생겨도 안 되며, 너무 쉬워도안 되고 너무 딱딱해도안 되는 등 이중잣대 또한 존재합니다. 일만 잘해서도 살아남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일을 너무잘 해도 과도한 미움을 받습니다. 이는 남자나 여자나 같은 사람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그들은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으로밖에 안 보여요.

 

    “지금까지 한 번도 여자 감독을 모셔 본 적 없다는 게 거짓이 아니었는지 그들은 정말로 여자 감독과 대화하는 방법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여자 감독이건 남자 감독이건 상관없이 감독을 대한다고 생각하면 될 일인데 그렇게 그들이 안절부절못하는 이유는 단지 여자와 동등한 입장으로 일을 할 수 있는가 혹은 해도 되는가에 대해 스스로 대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안 해도 되는 말들을 자꾸 나에게 했다.”

 

    굳이 사람으로 봐주지 않는다 해도 상관은 없지만, 일단 먹고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만이라도 이해해주면 좋겠는데 말이죠. 여자가 일을 하면 남자 자리 뺏는다고 지랄이고, 결혼하고 회사 그만두면 남자 등골 뽑아먹고 산다고 지랄이고. 대체 어느 장단에 놀아나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책의 후반부는 저자의 가치관을 형성시켜준 성장환경에 대한 서술인데, 이 땅에 태어나 사춘기를 보낸 성인여성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법한 한 가지가 특히 제게 크게 다가왔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보다 타인의 눈을 통해 자신을 평가하고 끊임없이 가치 있는 존재로 매겨지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데 익숙하다는 것입니다.

 

    “집과 학교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싶었지만, 그 곳에서 내가 성적으로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불쌍하고 부끄러운 시절이었다.”

 

    “한때는 남성 파트너가 나를 예뻐하는 것이 곧 내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외의 삶에 대해 알지 못했다. 예쁨을 받지 못하면 곧 가치가 없는 삶이었고, 그래서 연애를 쉴 수가 없었다나 혼자, 혼자서는 내 가치를 느낄 수가 없었다.”

 

    여성에게 주어지는 남자가 좋아하는’, ‘남자친구에게 사랑받는것들을 체화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은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며 저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를 지배합니다. ‘fuckable’한 존재이기 위한 일체의 꾸밈노동에서 벗어나는 탈 코르셋은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에서 벗어나는 존재에게는 상당한 혐오가 뒤따르지요.

 

    자아가 미성숙한 상태에서 사회가 강요하는 잣대에 좌우되느라 우리는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시간에 좀 더 생산적인 일에 몰두했더라면 우리의 오늘은 조금 달라져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지금보다 많은 부를 축적했건, 자신에 대해 더 오랫동안 들여다보면서 좀 더 성숙한 사람이 되었건 최소한 지금보다는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나 자신을 위한 충분한 시간을 가진다면 착한 딸, 사려 깊은 아내, 이해심 많은 직장 동료 등 우리를 속박하는 수식어로부터 자유로운 독립적 인격체로서 존재할 수 있겠죠. 그 과정에서 배제되는 소수자가 없도록 함께 생각과 힘을 모으는 데에 페미니즘이 필요합니다. 저자는 페미니즘을 영접하면서부터 달라진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고 더 나은 모습이 되기 위해 기쁘게 노력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 또한 그렇고요.

 

    “나는 페미니즘이 배제의 언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은 공감의 언어’ ‘용기의 언어라고 생각하며 누군가 페미니즘을 함께 말하기 위해 자신이 여성임을 증명해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많은 언어로 페미니즘을 말해야 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가장 약한 존재가 잘 살아야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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