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XX염색체 소지자에게 특화된 훌륭한 토양의 영향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어려서부터 불만이 참 많았습니다. 불만투성이 인생이다 보니 이놈의 세상이 대체 어디서부터 글러먹은 건지 좀 더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어서 사회학을 복수전공했는데, 그로 인해 형성된 사회학 전공자에 대한 내적 친밀감이 이 책 덕분에 오랜만에 최대치를 기록했어요.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본인의 것을 뺏기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만 선택적으로 둥글둥글한 다수결 신봉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사회적 문제점과 위계관계에 대해, 전공을 살려 학문적으로 진단한 사회학 교수님의 책을, 제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그야말로 광대가 하늘높이 승천한 것도 모른 채 후루룩 읽어버렸습니다.

 

 프롤로그의 읽으면 우울해지는 글을 쓸 것이다라는 선전포고와는 다르게 불편한 현실에 대한 솔직하고 신랄한 저자의 시선에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행복’, ‘차별’, ‘교육’, ‘성평등등 네 개의 꼭지로 한국사회의 문제를 진단하는데, 이 중 최근 들어 가장 심각하고도 중대한 문제점이 뭐냐 물으신다면, 저는 그 넷 중 하나가 아닌 계층격차의 심화라고 생각합니다. 정보와 부의 편중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다 보니, 계층 간 상향이동률이 점차 감소하고 있다고 하잖아요. 그나마 있던 개천용은 이제 거의 신화 속 존재가 되었고요. 타의에 의한 위에서 아래로의 계층하락은 무제한이지만 그 반대로 향한 사다리는 나날이 휘청거리고 있다는 것을 여러 가지 사회 지표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번 미끄러지면 끝이라는 현실은, 몸과 마음을 피폐화시키기에 충분합니다.

 

 브레이크 없는 자본주의의 말로는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만 아니면 된다는 탐욕에 가득찬 안일한 사고는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마저 이른바 가진 자의 발목을 잡는 포퓰리즘으로 치부합니다. 일단 기본적인 의식주에 대한 걱정을 덜어야 삶의 질에 대한 생각도 하고, 정치를 비롯한 주변 일상에도 관심을 갖는 등의 인간적인 생활을 할 수 있잖아요. 하지만 애초에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목적인 것은 아닐까 싶은 오해마저 드는 사회 체계 속을 우리는 견뎌내고 있습니다. 그 중 노사갈등은 단연 악질적이어서 노동자를 졸렬한 방법으로 분열시킵니다.

 

상대를 괴물로 보면, 괴상한 이야기가 넘쳐난다. 저들이 정규직이 되면 그다음 수순으로는 노조를 만들어 회사를 장악하고 주도권을 잡을 거란다. 마치 나라가 위태로울 수 있다면서 온갖 공작을 일삼았던 과거 안기부의 시나리오를 읊는 수준이다. 원래의 세상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원청과 하청으로 구분되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험 없는정규직 전환은 평등, 정의, 공정의 가치를 훼손했다고 부르짖는다. 물론 비정규직 노동자의 인생이 평등하지 않고, 정의로부터 멀어져 있는 것을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관용어구가 있죠. 두세 명이 모여도 일단 목소리 크고 힘 있는 사람 위주로 굴러가기 마련이고요. 더더욱 복잡한 층위의 이익관계가 얽힌 국가체제에서, 게다가 공정성이 거세된 이 나라는 소수자가 사람다운 삶을 영위할 수가 없는 시스템을 고집스레 유지하려는 엄청난 의지가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잘사는 사람은 영원히 잘살고, 못사는 사람은 영원히 못 살아야 한다는 그들만의 주장을 교묘히 정당화하는 동시에, 논리적 허점과 허술한 틈새는 그때그때 비약과 억지로 채우면서 말이에요. 그러는 과정에서 아군과 적군이라는 이름으로 사회 구성원을 등지게 하여 서로를 헐뜯도록 하는 혐오세력들의 단골 합리화 수단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것은, 정말이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로 인한 존재가 민주주의의 가치를 파괴하는 놀라운 현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무슨 말도해도 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노동자의 파업도, 사람의 성 정체성에 대해서도 찬반토론을 한다. 애초에 누군가의 존엄한 권리에는 관심조차 없었던 이들은, 반대할 자유가 민주주의 사회에 있는 것 아니냐면서, 논리적으로 보이기 위한 걸쭉한 수사만 남용한다. 시각장애인도 영화를 접할 권리가 있으므로 관련 오디오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는 기사에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댓글이 추천 1위가 되는 이유다.”

 

 편의에 따라 개념을 차용하는 데도 염치가 있지 말입니다. ‘잘 모르고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는 방송인 이경규의 명언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가끔은 막막하고 무섭기까지 합니다. 형평성이 휘발되어 가는 사회에서 삶의 끝자락으로 내몰리는 사회 구성원들의 소식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요즈음, 그 어느 때보다도 존엄성이 무너진 책임을 개인에게 묻는 풍토에 문제제기가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합니다.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 소식과 종부세 폭탄운운 하는 소식이 공존하는 현실을,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지 괜히 혼자 막막해하다가 문득 현타가 와버렸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하면서 무슨 대국적인 오지랖이란 말입니까요. 어디서 주워듣기로는 엄두도 못 낼 문제에 봉착하면 일단 문제를 조각내서 사이즈를 줄이는 것이 첫 번째라고 하던데, 회의와 냉소의 수렁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쨌든 긍정적인 경험을 떠올려봐야 할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때 한문 시간에 아들 자를 혼자 딸 자라고 큰 소리로 정정했다가 이상한 애 취급을 받기도 했던 기억이 선명하네요(역시 떡잎부터 남달랐던 시오랑...). 남녀공학이지만 합반은 아닌 중·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당연하다는 듯이 1반부터 남자인 것은 기본이고 급식 순서를 비롯한 무엇이든 남자부터, 남자들 다 챙기고 그 다음에야 여자에게 순서가 오는 시스템 속에서 6(이라기보다는 평생이라는 말이 좀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지만서도)을 지내다 보면 없던 피해의식도 생길 수밖에 없었어요. 다행히도 요즘은 학교에서도 성별 순이 아닌 가나다 순으로 번호를 매기게 됐다면서요? 기대치에 미치지는 못해도, 세상은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걸 이런 소소한 것들로 인해 확인하게 됩니다.

 

두 가지 팩트가 있다. 하나는 이 사회가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팩트이고, 하나는 현재 이 수난에도 불평등에 노출되어 삶이 위태로운 사람이 반드시 있다는 팩트다. 전자는 후자를 드러내는 걸 두려워하지 않을 때 지속적으로 그 방향성이 유지된다.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이, 세상의 불평등조차 낙관하라는 태도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지금 아파하는 사람을 보며 한 사회의 불평등을 탓하는 건 확증편향과 무관하다. 오히려 그걸 무시하고 그래도 과거보다 나아졌다는 망상에 빠지는 게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착각이다.”

 

 저자의 머리말에서 이 책을 관통하는 문단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사회문제에 귀 기울이고 해결될 때까지 논의해야 하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회는 분명 변하고 있습니다. 전처럼 대놓고 차별과 멸시를 행하지는 않게 되었죠. 하지만 언제까지나 삶의 질을 평가할 때 과거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영영 발전과는 거리가 먼 횡보상태에 갇히게 된다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