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쪽. 온 마음으로 응답하기: 『세상 끝까지 펼쳐지는 치마』
- 그림책 처음 일기: 희음
- 2020. 11. 30. 13:09
지난 가을, 첫 시집 『치마들은 마주 본다 들추지 않고』를 냈다. 시집 제목은 시집의 가장 마지막에 놓인 시 <치마와 치마와 치마와 치마>에서 따왔다. 출간을 앞두고 시집 제목에 대한 고민이 깊었던 어느 하루, 운명처럼 이 그림책을 만났다.
경의선책거리의 한 책방에서였다. 당시 책방지기는 번역도 하고 출판도 하는, 내가 신뢰하는 어떤 선생님이었다. 시집 제목을 ‘치마’가 들어간 이 제목으로 바꾸려 하는데 괜찮은 생각인지 확신이 없다는 말을 했을 때, 선생님은 별안간 등을 훽 돌리더니 울긋불긋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시집 제목 너무 좋아요. 이 그림책이 당장 떠올랐거든요. 이 책, 놀랍지 않아요?”
맑고 높은 선생님의 목소리가 더 높게 날아올라 새의 부리처럼 책방 천장을 콕콕콕 두드렸다. 나는 재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선생님의 놀라움과 반김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그림책 안에는 “들추지 않고”도 마주 보는 존재와 존재가, “한줌의 낭비도 없”는 말 걸기와 응답이, “무엇이 될지 아무도 모”르는 환대와 사랑이 들어 있었다. 1
그림책은, 밑도 끝도 없는 단 하나의 질문으로 시작한다.
“이 치마 세상 끝까지 펼쳐져?”
사실 그림책 속 치마 그림들이 이미 너무 압도적이어서 그 치마들에게 나의 혼을 양도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질문의 형식으로 이뤄진 활자가 마음을 이끌었다. 말하자면 나를 어떤 질문으로 이끈 단 하나의 질문이 있었던 것이다. 나의 질문은 이런 거였다.
그림책 속 화자는 왜 이런 질문을 하게 됐을까? 다짜고짜 이 치마가 세상 끝까지 펼쳐지냐니.
질문에 대한 대답을 생각하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 어떤 아이를 떠올리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 대신 질문은 내게 겨눠졌다. 나는 왜 치마를 붙들고 있지? 나는 왜 자꾸만 치마를, 그리고 어떤 세상을 찾아나서는 거지?
나를 향한 나의 질문. 이에 대한 답은 어쩌면 질문 자체에 있을지도 몰랐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질문이라는 형식에. 그러니까 나는 그저 묻기 위해, 말 걸기 위해 치마를 찾아 나서고 공중을 떠도는 거였다. 치마가 중요하다기보다는 말을 거는 일이 중요했던 거다. 어떤 응답을 기다리면서, 그게 뭐가 됐건간에 어떤 응답이라도 있기를 기다리고 기대하면서 말이다.
묻고 말 걸면서, 응답해오는 누군가의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떨림과 고요, 무기력과 안간힘, 확신과 막막함을 옮아오고 싶었다. 거기에 살아있는 누군가 있다는 것, 그곳에 살고 싶어 하는 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싶었다. 질문에 대한 딱 떨어지는 대답을 듣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말 거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질문. 말의 탄생을 도모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질문. 맞은편의 목소리가 말풍선처럼 통통히 솟아오르게 하는 데만 관심이 있는.
이렇게만 쓰면 내가 마치 범사랑을 실천하는 자인 것처럼 읽히진 않을까 싶어 덧붙인다. 내가 말 걸고 싶다는 것은 나에게도 말 걸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 내가 있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하고 늘 바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림책 속에 놓인 질문 역시 질문에 대한 Yes or No에는 하등 관심이 없다. Yes or No가 중요했다면 묻는 이는 끝까지 실패만을 떠안는 셈이다. 대답은 늘 부정형인 No니까. 질문하는 목소리는 그것을 실패라고, 다 끝난 것이라고 단정 짓지 않는다. 그저 다음의 존재를 향해 걸음을 옮길 뿐이다.
대답 역시 그렇다. “네 치마 세상 끝까지 펼쳐져?”에 곧장 이어지는 말은 “아니”이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 뒤를 잇는 목소리는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대한을 펼친다. 세상 끝까지 ‘펼쳐지진’ 않지만 자기 역량을 ‘펼치고’ 자신의 온 마음을 ‘펼치는’ 것.
이를 펼쳐서 보여주는 것이 이 응답들이 품은 힘이자 사랑이다. 내가 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음을 펼쳐 보이는 동시에, 나처럼 살아도 좋고, 나에게 기대어도 좋다고 답하기. 바로 이런 이유로 질문은 단지 질문이 아니고 대답은 단순히 대답이 아니다. 질문은 말 걸기에, 대답은 응답에 수렴하는 것. 부정형의 대답(No)을 디딤돌 삼아 목소리는 더 크고 멋진 세계를 펼쳐 보이기 때문이다. 그 멋진 세계 중 몇 개만 소개해볼까?
“개구리야 개구리야, 네 치마 세상 끝까지 펼쳐져?”
“아니, 하지만 네가 비를 피하기엔 아주 좋아.”
“개미야 개미야, 네 치마 세상 끝까지 펼쳐져?”
“아니, 하지만 부드럽고 따뜻해. 멋진 꿈을 꿀 수 있지.”
“오리야 오리야, 네 치마 세상 끝까지 펼쳐져?”
“아니, 하지만 내가 가는 곳까지 펼쳐질 거야.”
그림책 페이지를 하나하나 완전히 펼칠 때마다 눈앞에 펼쳐지는 치마의 형상과 무늬도 놀랍다. 치마가 어디까지 펼쳐지느냐는 질문이 이끌어내는 대답이 단지 ‘어디까지’에 국한되는 대답이 아니라는 것을 이 치마 그림들이 이미 다 보여주고 알려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페이지를 완전히 펼쳐 보아야만 알 수 있다. 이 기쁨, 이 놀라움은. 보다 많은 이들이 함께 놀라고, 함께 환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 시 <치마와 치마와 치마와 치마> 중에서, 『치마들은 마주 본다 들추지 않고』, 희음, 걷는사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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