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쪽. 여는 글: 서로의 아이와 엄마 되기


    글을 시작하기 전에 그림책 앞에서 한동안 가져온 나의 이중감정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 이중감정은, 지금은 청소년이 된 나의 두 딸아이가 글자를 모르던 어린시절을 지나던 시기에 특히 깊었다. 그림책은 아이를 위한 것. 그림책 읽기는 부모가 아이를 위해 해주어야 하는 필수적인 행위.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걸 뺀다면 그 밖의 돌봄 목록에서 가장 상위에 있는 것이 바로 그림책 읽어주기일 테다. 말하자면 그것은 아이의 정신을 키우기 위한 것이고, 영혼을 돌보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그림책 읽어주기는 대개 엄마만의 숙제일 때가 많다. 전업주부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젖 먹이듯 아이를 품은 채로, 혹은 ‘엄마냄새’를 풍기며 지붕처럼 아이를 감싼 채로, 그 누구도 아닌 엄마의 목소리를 들려줘야 한다는 무언의 명령이 도처에 있다. 나는 그 숙제를 정말이지 엄정한 숙제로 여겼다. 그때그때 정신을 차려가며 똑바로 잘 해내야만 하는 것, 하지 않으면 야단을 맞거나 벌을 받는 것. 야단을 치거나 벌을 내리는 이는 내 눈에 보이지 않았고 처벌은 아주 먼 미래에나 일어날 것을 알았지만, 미래의 일이라서 더 불안했다. 아이의 미래를 지금의 내가 망치다니, 끔찍한 일이지 않은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끔찍함을 겁내면서 매일의 숙제를 해치우듯 하는 그림책 읽기가 즐거울 리 없었다. 그럴수록 아이에게 그 기분을 들키지 않도록 더 힘껏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림책의 등장인물들과 한몸이 되려 애썼다. 식은땀이 났다. 목이 빠르게 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시간은 내 옆에 아이가 있다는 걸 잊어버릴 만큼 좋았다. 아이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그림책 안쪽을 가득 채운 그림과 그림 위에 쓰인 다정해 보이는 글씨들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아이가 나를 한참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을 때에야 그림책 바깥으로 빠져나온 게 여러 번이었다. 아이가 있다는 것, 나는 지금 아이를 위해 그림책을 읽어주는 중이라는 것을, 꿈에서 깨듯 깨닫고서 현실 세계로 쫓겨나온 경험. 믿기지 않았다. 한편으론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아이를 위한 책인데 내가 이렇게 좋아해도 되는 거야?


    그러니까 당시 그림책에 대한 나의 이중감정은 이런 것이었다.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숙제와, 매혹되기 싫은데 자꾸 이끌리는 정체불명의 빛나는 사물과의 접속. 그 사이에서의 흔들림.


    그림책을 지나고 판타지 동화를 지나고 청소년 소설을 지나 이제는 그 종이책이라는 물성조차 낯설어 하게 된 문명의 아이들, 더 이상 ‘엄마냄새’를 찾지도 않고 엄마냄새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지도 않는 아이들을 눈앞에 두고서야, 나는 그 그림책이 나에게 주었던 매혹 쪽으로 마음껏 기울고 마음껏 미끄러져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그 옛날 ‘그림책 읽어주는 엄마’가 아니라 ‘그림책 함께 읽는 엄마’인 거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면 아이와 얼마나 더 깊게 웃고 울고 뒹굴 수 있었을까 하는 아쉬움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되돌릴 수 있다면 되돌리고 싶다고. 


    그럴 수 있다면 그러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 그것 말고 다른 것을, 어쩌면 되돌린 그 시간보다 더 좋을지도 모르는 어떤 것을 하려고 한다. 지금의 기록을 “그림책 처음 일기”라 부르면서, 이 글 앞에 있는 당신들과 웃고 울고 뒹구는 일. 우리가 서로의 아이가 되고 서로의 엄마가 되어 서로의 마음을 묻거나 돌보고, 또 이따금 공평하고 자유롭게 역할을 바꿔가며 다른 이름을 불러주는 일. 그러니까 이 첫 번째 글은 프러포즈인 셈이다. 그림책 안에서 함께 놀자고 당신을 부르고 꼬셔대는. 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주 오는 손들이 보인다. 마주 보며 달려오는 색색의 치마가 손에 잡힐 듯하다.



“개구리야 개구리야, 네 치마 세상 끝까지 펼쳐져?”

“아니, 하지만 네가 비를 피하기엔 아주 좋아.”


- 명수정, 『세상 끝까지 펼쳐지는 치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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