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쪽. 이상하고 다정한 목소리들: 『이럴 수 있는 거야??!』
- 그림책 처음 일기: 희음
- 2020. 12. 14. 13:59
2008년에 둘째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그해에, 6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아이 둘을 맡기면서까지 직장을 다니는 것이 수지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당시에는 경제적 계산 때문인 거라 여겼다. 남편 월급이 내 월급보다 많았으니까 내가 그만두는 게 맞다고. 지금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안다. 엄마니까, 여자니까 내가 그만둬야 하는 거였다. 한 가족 단위에서 누군가 하나 직장생활을 접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여자가 집에 ‘들어앉아야’ 했다. 가장인 남성이 ‘가족임금’을 수령하고, 일개 아내일 뿐인 여성은 그에 종속되어 무임금으로 돌봄노동과 육아를 맡는 게 당연했다. 보이지 않는 이러한 억압을 당시에는 몰랐거나, 모르는 척 했다.
첫 아이 출산 때는 몸과 마음 모두 회복이 빨랐다. 돌아갈 직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직장에서도 하루 한 번 후미진 공간을 찾아 모유 유축을 해야 했지만, 나머지 시간에는 아이를 조금 잊을 수 있었다. 아이를 잊은 딱 그만큼, 잃었던 나를 되찾아오는 기분이었다.
둘째 때는 되찾을 시간과 힘 모두를 잃어버린 듯했다. 아니, 나를 통째로 분실한 것만 같았다. 그런 내가 믿기지 않았다. 모성애 따위는 없는 듯한 내가 부끄러웠다. 그러므로 더 많이 웃었다. 나와 아이 이외의 타자 앞에서는. 그중에서도 특히 가족임금을 벌러 나갔다가 저녁이면 돌아오는 한 타자 앞에서는. 그의 저녁식사를 꼬박꼬박 챙겼고, 꼬박꼬박 웃었다.
밤에도 두 시간마다 깨어 수유를 해야 했다. 날이 밝아올 때마다 햇빛을 노려봤다. 햇빛이 내 하루의 첫 번째 미움의 대상이었다. 수유 시기가 끝나도 산후우울증이라 치부했던 어떤 기분은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 나를 잃어버린 기분. 되찾아올 내가 있긴 한 건지 모르겠는 기분. 그럼에도, 그럴수록, 해야 할 일들은 꾸역꾸역 해냈다.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일, 그 역시 내가 해야 할 일이었고, 놓치지 말아야 할 일 중 하나였다.
이 그림책이 어쩌다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건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표지 그림을 한참 들여다봤던 게 생각난다. 잔뜩 화가 난 듯한 한 아이가 가방을 끄는 모습에 조금 웃음이 났고 그 아이를 화나게 한 게 뭔지 아주 조금 궁금해 했다. 네가 화나 봤자 뭐 별 거 있겠어, 하는 마음도 있었다. 네가 인생의 쓴맛을 아니? 너 뭔가 잃어본 적은 있니?
첫 페이지를 넘기자 아이를 바라보는 ‘우리’가 있었다. 그들은 아이를 ‘여자애’라고 칭했다. 그들 중 “냄새를 가장 잘 맡는” 개가 여자애를 바짝 따라갔다. 나머지도 그 뒤를 따랐다. 그러다 한순간 여자애가 소리쳤다.
“이럴 수 있는 거야??!”
물론 목소리는 그들 쪽이 아니라 공중을 향했다. 목소리는 아주 높고 길었다. 그러기를 여러 번. 목소리 뒤에서 걷거나 멈춰 서서 기다리던 그들 중에 “키다리 친구”가 조심스레 무슨 일이냐고, 여자애를 향해 물었다. 여자애는 가방을 열어 자신이 키우던 노랗고 작은 새를 보여주었다. 엘비스라는 이름의 그 새는, 죽어있었다. 그들은 더듬더듬, 하지만 빠짐없이 여자애를 향해 조그맣게 한마디씩 했다.
“안됐다. 정말 안됐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정말 슬프다.”
“불쌍한 엘비스······.”
“멍멍.”
목소리 중에는 책 위에 쓰이지 않은 ‘침묵’도 있었을 것이다. 침묵 속에 든 따뜻하고 무거운 마음. 그럴 만하다고,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끄덕이는 마음. 잔뜩 화난 얼굴에 허공을 향해 질러대는 그 고함을 이해한다고, 잃어버린 마음의 바닥까지 알 수는 없다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끄덕여주는 마음. 한 마음의 길을 따라 가보려는 이웃의 마음들.
이 그림책을 매일같이 읽었다. 빨간 가방을 든 여자애의 표정을, 이럴 수 있는 거냐고 소리치는 길 잃은 목소리를, 축 늘어진 작고 노란 새를, 노란 새를 데리고 가는 여자애를 뒤따르는 마음의 행렬을 만지고 또 만졌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나는 내게 기대어 있는 아이에게 선택권을 줬다. 이제 너 읽고 싶은 거 뭐든 마음껏 골라 와.
나는 나의 일부가 죽었다고 생각했나 보다. 이러려고 태어난 게 아니고, 이러려고 공부한 게 아니고, 이러려고 꿈꾼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여기에 있지, 하는 마음. 아이의 밥과 잠과 유희와 목숨 전부를 내가 책임지면서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로 지내야 하는 상황이 너무도 비현실적이었다. 실로 조금 죽은 채로 살아있어야 했다. 하지만 세상은, 이게 당연하다고 했다. 여성의 책무라 했고, 그게 모성이라 했다. 어딘가에 던져졌는데, 스스로 뛰어내렸다고 했다. 어딘가 잘못됐다 느끼면, 그 마음이 잘못된 거라고 했다. 나는 소리치고 싶었다, 세상을 향해.
“이럴 수 있는 거야??!”
제 생각과 마음과 행동이 ‘비정상’ 취급을 받을 때, 그 앞에서 자신을 설명할 언어가 없을 때 사람들은 운다. 울거나 쪼그라들거나 숨는다. 종종 더 깊은 곳으로 숨기 위해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더 깊은 곳으로 숨고 싶다는 생각을 나 역시 했었다. 그럴 때 들려오는 목소리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이럴 수 있는 거야??!”
“아, 그래서 그랬구나.”
“멍멍.”
멍멍이라니, 멍멍이라니.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는 목소리가, 그렇게 나를 이해하고 다독이는 목소리가 어딘가에 하나쯤은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은 내가 찾지 못해, 듣지 못할 뿐. 내가 잃어버린 게 무엇이든, 그 무엇을 잃은 내가 어떻게 아파하든 나의 곁에서 내 감정을 뒤따르는 이가 있을 것만 같았다.
둘째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게 된 이후로는 이 책을 집어 드는 게 뜸해졌지만, 이따금 어딘가에 내던져진 기분이 들 때면, 내가 처한 상황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 막막할 때면 이 책을 펴서 소리 내어 읽곤 한다. “이럴 수 있는 거야??!” 그러면 곧장 희미한 형상들이 그 뒤를 잇는 게 보인다. 분명 어딘가에는 있는 이상하고 다정한 목소리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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