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가난의 문법>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고전 명작으로 꼽히는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입니다. 이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한 번은 들어봤음직한 유명한 문장이지요. 과연 그렇구나, 하며 고전의 위대함과 영속성에 감탄하게 됨과 동시에, 이에 속하지 않는 너무나 분명하고 명백한 집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여성 빈곤 노인층의 일관성입니다. 사업 실패나 불우한 환경 등 남성 노인들이 각자 서로 다른 다양한 이유로 거리로 내몰렸다면 여성 노인들의 불행은 하나같이 닮았습니다. 가정 내에 얽매이는 한정되고 구조화된 한평생의 결과는, 본인의 의지와 역량에 의한 것이 아닌 가부장의 경제적 지위에 좌우되는 삶이다 보니 그렇게 그들만의 열악한 평균에 수렴될 수밖에요.

 

원트윗 작성자께 허락을 구했지만 스레드 뮤트 중이라서인지 답변을 받지 못해 깔끔한 레이아웃을 제공하지 못함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ㅠㅠ

 

    <가난의 문법>은 이들 빈곤층 노년 여성을 대상으로 한 조사 및 취재 기록입니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유리천장 지수, 고령화 속도 등 안 좋은 건 죄다 1등을 도맡고 있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은 노인 빈곤율 또한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지요. 노인 빈곤층은 은퇴 연령이 지나게 되면 임종 전까지의 시간을 버텨내기 위해 비공식적, 임시적 노동으로 연명할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사회보장제도에서 소외된 노후계층은 자력구제의 일환으로 폐지를 수거하게 됩니다. 언젠가부터 폐지를 줍는 노인은 우리가 길에서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수많은 풍경 중 하나가 된 지 오래입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잦은 배송 서비스의 결과 쓰레기 대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편의성의 노예가 된 우리가 배출하는 다양한 종류의 일회용품의 증가는 이들과 함께해왔습니다.

 

    작금의 구조를 서로의 니즈를 충족시키는 일종의 합리적 거래로 여기는 것은 지극히 편협한 시각입니다. 빈곤 노년층과 재활용 업체와의 공생이라는 주장은 허울 좋은 헛소리일 뿐인 것이, 폐지를 사들이는 기준가격이 들쭉날쭉인 경우가 허다해 조금이라도 폐지 값을 더 많이 쳐주는 업체를 매번 수소문해야 한다는 비공정성을 비롯해, 교통사고나 호전적인 행인 등 다양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나 이들을 위한 안전대책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사실상 자원순환공정은 폐지 및 재활용품을 노인이라는 값싼 수단을 통해 수집하는 전형적 착취구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근력과 장비 활용 등 상대적 자유도가 높은 남성 노인은 여성 노인에 비해 빠르게, 그리고 더 많은 일감을 획득하고요. 힘 있는 집단이 그보다 열악한 집단의 생존을 고려해 공존을 모색하기보다, 그저 고민 없이 동일선상에서 경쟁해야 평등하다 여기는 몰지각한 사고는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세대를 초월하는 공통점이라는 것만은 정말이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상 한국사회는 노인의 노동을 장려하지 않는 동시에 장려하는 이율배반적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당초에 65세 이상의 인구는 더 이상 일하지 않아도 생활이 가능하도록 정책을 세웠으나, 그 정책이라는 것이 견고하지 않게 설계되어 혜택 수혜대상에서 누락되는 집단이 발생하게 된 것이지요.

 

한국사회서 '노인(들을 위한) 일자리'란 말은 모순된 표현이다. 적어도 산업과 고용의 측면에서는 그렇다. 한국사회의 고용 정책은 65세 전후의 나이인 은퇴시기를 지나온 사람들은 더 이상 노동하지 않게끔 계획됐다. 그리고 사회복지정책은 은퇴를 한 노인이 더는 임금을 버는 활동을 하지 않아도 되게끔, 사회보장 제도가 그들의 삶을 보호하게끔 되어 있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노인들의 취업률은 여느 나라보다 높고, 정부 역시 사회복지 정책의 일종인 '노인 일자리'를 내놓고 있는 실정이다. , 산업은 노인을 은퇴자로 이해하지만, 복지 정책은 노인을 복지사업의 참여자로 이해하는 상호 모순적인 상황이다.”

 

    결국, 잘못된 국가정책으로 소외된 노인 빈곤층에게 생계를 지원한다는 명목 하에 이 모든 부조리가 은폐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도의 모순에서 그 이유와 해결책을 찾기보다 개개인의 능력과 의지의 부족이 실패의 원인이라 순응하고 체념하도록 사회화된 이들 노년층은 비가시적 존재로 머무르는 것이 지배적 양상이고요. 한반도의 유구한 전통 탓에, 누구보다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는 이들은 여성 노인 집단입니다. 이들이 굳이 목소리를 내지 않다 보니 요즘사람들은 이 사태에 대해 구조적 문제로 보기보다는 개개인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불행한 결과 정도로 축소하여 오판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가상의 인물인 영자 씨의 이야기를 통해 이 오해를 바로잡고자 노력합니다. 그의 생애는 비록 허구이지만, 한국사회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한 개연성 있는 연대기임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현모양처라는 지상과제를 위해 가사노동 외에는 훈련받은 기술이 없는 영자 씨는 결혼 후 남편 사업의 흥망성쇠, 정확히 말하면 한국전쟁, 외환위기, 국제금융위기 같은 역사적 사건에서 거의 모든 것을 잃습니다. 왜냐고요? 하물며 풍파를 헤쳐 나가기 위한 능력이 있는 사람도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가난한 여성노인은 이전의 한국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여성 생에의 목표를 남편에 대한 내조와 자녀의 양육으로 삼게 하고, 따라서 교육을 받고 직업을 가질 기회를 갖지 못하게 했던 결과인 것이다.”

 

    영자 씨의 몰락을 초래한 위험요소는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국가의 방임입니다. 우리는 교육기관을 통해,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배웁니다. 하지만 영자 씨와 그의 가족이 잘못된 선택으로 고통받고 있을 때, 그가 누릴 수 있다고 헌법에 나열된 기본권은 이들을 외면했고 단지 납세의 의무만을 수취하는 것에 그쳤습니다. 국민이 주어진 의무를 다하는 동안 국가는 국민의 권리를 보장해줘야 한다는 기본적인 체계의 실종은 신자유주의의 필수요소라 해도 과언이 아니긴 합니다. 하지만, 최소한 안정적 세수 확보를 위해서라도 국가는 국민의 안정적 생활을 보장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야만적 각자도생, 적자생존 구도 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우리 모두의 무의식에 상존하고 있는 불안정에 대한 두려움을, 과연 이번 생 안에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영자 씨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다른 질문을 던지게 한다. 개인의 선택이 우연한 연유로 잘못되었다고 한들, 왜 국가와 사회는 그녀를 구하지 않았을까? (...) 그녀와 그녀의 동년배들이 살아낸 이 숨 막히는 서울에는 현대사의 풍파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거대한 격동의 시간만 다루는 한 국가의 정치사와 경제사도 물론 그렇지만, 국가 및 사회와 간접적 영향을 주고받은 한 사람의 생애 역시 지금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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