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한 사랑>, 궁금해 하는 것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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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자면, 한동안 어린아이가 싫다고 아주 공공연히 밝혔던 적이 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고 제멋대로 굴면서 빽빽 울기만 해서 싫다는 이유로요. 버스나 지하철에서 시끄럽게 칭얼대는 아이들을 보며 대놓고 인상을 쓰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만 해도 아직 성적 대상화를 큰 저항 없이 체화하곤 했던 명예남성(속된 말로 흉자라고도 하지요)이었던지라, 스스로가 약자를 혐오하고 있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낯선 존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한 몫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이야 조카도 하나둘 생기고 친구들의 2세도 있어 아이들과 전에 비해 자주 접하게 되었지만, 그 흑역사 시기는 동생은 물론이거니와 사촌동생도 거의 없고 그야말로 주변에 저보다 어린 생명체가 전무하던 때였거든요. 당시에는 아이를 두려워한 만큼이나 어린아이와 잘 지내는 사람들을 못 견디게 부러워하는 마음 또한 컸던 것 같습니다. 내게는 없는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느껴지는 경외감 비슷한 것이었지요.

    학부 시절 용돈벌이로 과외를 하기도 했으나, 아이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 같다는 죄책감에 미안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과외를 받아도 보고 해보기도 한 입장에서 보니, 과외의 목적은 학습능력 향상보다는 공부를 하고 싶게 만드는 것이 더 크다는 결론에 도달했거든요(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과외 학생과 몇 살 차이도 나지 않는 데다 전문적인 교수법을 숙지했을 리 없는 20대 초반 대학생의 역량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랬습니다. 아이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도 어려운데 영어, 수학에 흥미를 느끼도록 하는 건 제게 있어서 다소 벅찬 일일 수밖에 없었던 거죠. 여전히 타인, 게다가 나보다 어린 사람으로 하여금 무언가를 즐겁게 느끼도록 바꾼다는 것은 인생의 목표처럼 경이롭고 거창한 무언가로 여겨집니다.

    <부지런한 사랑>은 이슬아 작가가 글쓰기 교실을 운영하며 겪은 다정한 일상을 담은 에세이입니다. 저자는 일찍이 본인이 책정한 일정 고료를 선납 받은 뒤 매일 자신의 글을 이메일로 독자에게 보내는 형식으로 독자와 저자가 글을 직거래(?!)하는 혁신적 시스템을 이룬 바 있습니다. 이 글을 모아 프로젝트 이름과 동일한 <일간 이슬아>라는 제목으로 단행본을 내기도 했고요. 저자는 미대 수업에 들어가는 누드모델로 일하기도 하고 잡지사 기자나 웹툰 작가로도 활동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생활전선을 넘나들면서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 또한 경험합니다. 2014년부터 형제 글방, 여수 글방, 청소년 글방, 어른여자 글방, 그리고 코로나 시대의 글방으로 이어진 글쓰기 교실에서 만난 수많은 이들과의 일화를 특유의 담담하고 오밀조밀하면서 따뜻한 문체로 담아냈는데, 읽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는 매우 상투적인 표현 말고는 적당한 대체제가 없네요.

    “열세 살이던 양휘모는 이렇게 썼다. "가끔 엄마에게 혼나고 혼자 있을 때면 이런 노래를 부른다. '어차피 화해할 인생~ 엄마는 나를 좋아하니까 밤이 되면 괜찮아지겠지~' 하며 나 자신을 위로한다.” 어떤 태평함과 담담함이 양휘모의 문장에서 느껴진다. 엄마에게 혼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닐 테니 말이다. 그는 여러 번의 반복을 통해 알고 있는 듯하다. 낮에는 싸웠던 우리지만, 밤이 오면 화해하게 될 거라고. 왜냐하면 엄마는 나를 좋아하니까. 나 또한 엄마를 좋아하니까. 사랑의 확신 때문에 그는 자신을 위로하는 노래도 지어 부를 수 있다. “어차피 화해할 인생이라는 가사를 쓰는 건 그가 지금의 속상함에 매몰되지 않고 앞날을 내다보는 사람이라는 증거다."

    대상이 무엇이든, 모든 것은 마음가짐에 달려있다는 말을 흔히 합니다. 제가 아이들을 예측불가의 짜증스러운 존재로 간주해 불호하는 것으로 일련의 악순환을 만들어 내는 편이라면, 저자는 일단 선입견을 갖지 않고 글방에 온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적당한 때를 기다립니다. 생계유지를 위한 글쓰기 교사의 입장이더라도 글 쓰는 게 싫어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농땡이를 부리는 아이들이 곱게 보이지 않을 만도 한데, 이런 (미운) 모습을 관조하듯 가만히 살피다가 미묘한 흐름을 포착해 상황을 멋지게 반전시키고야 마는 저자의 마음가짐에 감탄하게 됩니다.

    “한줌의 자율권을 선사하는 이 알량한 수법은 열두 살 미만의 아이들에게만 유효하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는 아무것도 고르기 싫다고 말하는 아이가 비로소 등장하기 시작한다. 몇 자 원고지는 상관없고 그저 글을 쓰기 싫다는 걸, 어떤 의자든 상관없고 그저 앉기 싫다는 걸 분명하게 아는 청소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때부터는 교사로서의 매력과 파워를 내장부터 끌어 모아 정면승부를 하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그가 나의 수업을 좋아하도록, 글을 잘 쓰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도록 강수를 둬야 한다.”

    저자가 아이들로 하여금 글을 쓰게끔 하는 여러 기술이 있지만, 그중 기본 중의 기본은 아이들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글쓰기 교실에 온 아이들의 모든 것을 궁금해 합니다. 한 명 한 명에게 보낸 쪽지에는 아이들에 대한 궁금함의 결과물인 개별화된 애정이 담뿍 담겨 있습니다. 진정한 애정은 대상을 늘 궁금해 하는 것이라는데, 저자의 글쓰기와 아이들에 대한 애정은 실로 대단해 보여요. 글쓰기를 사랑하는 작가라서 가능한 일이기도 할 테지만,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한 올곧은 책임감에서 기인하는 건강한 직업윤리의 소유자라는 생각도 듭니다.

    글쓰기를 가르친다는 것은 다른 과목이나 주제에 비해 다소 막연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지식을 흡수한 뒤 온전히 쏟아내는 것만 가르치면 되는 여타의 것과는 다르게, 글쓰기는 이미 내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끌어내는 과정이잖아요. 글을 쓰려면 많은 경험과 다채로운 감정을 축적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지만, 이러한 흐름대로라면 인생을 얼마 살아보지 않은 아이들의 글을 폄하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아이들은 쓰기 싫어 콧물을 훌쩍거리다가도 결국 자기만의 찬란한 문장을 완성해냅니다. 결국 글을 잘 쓰고 싶다면 호기심과 부지런함이 유일무이한 비결이라는 것을, 저자는 제목으로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글쓰기는 결국 부지런한 사랑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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