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쪽. 상상의 힘 : 『할머니의 팡도르』

 

 

    마흔 되면 죽어야지, 그 추레한 나이를 어떻게 견디고 살아? 마흔 되기 전에 뭐든 이루지 않으면 일단 실패 아닌가. 마흔 넘은 뒤에는 그저 견디는 삶만 남잖아, 다 져버린 삶.

    20대 초반, 친구들과 둘러앉아 이런 이야기를 나누던 게 생각난다. 이런 대화는 힘이 세서 혼자 남겨진 뒤에도 귓속에서 숱하게 되풀이되었다. 정말 오래된 이야기인데도 이 말들은 여전히 생생하다. 물론 그 생생함과는 다르게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20대 후반에 결혼하여 10년간 직장 생활을 이어갔으며, 그 와중에 딸아이도 둘 낳고 키웠다. 이혼도 했다. 시와 산문을 쓰는 사람이 되었으며, 글을 쓰고 만지는 일, 글 쓰는 이들을 보살피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되었다. 기획자와 활동가의 정체성 또한 키워가고 있다.

    그러는 동안 나이를 먹었다. 이따금 어색하게 쭈뼛거리거나 혹은 과장하듯 스스로를 중년이라 부르던 시절도 지나, 이젠 부러 말할 필요조차 없는 아주 당연한 중년이 되었다. ‘다 져버린 삶’이 아니라 피었다 지고 또 피었다 지면서 조금씩 다르게, 그칠 줄 모르고 피어오르는 중년인 것이라 말하고 싶다. 본격적인 글쓰기와 공부를 시작한 시기, 정상가족 체계 내에 안주한 여성의 삶과는 다른 형태의 삶을 상상하고 도모하기 시작한 시기가 마흔 언저리였으니까.

    그러니 마흔이 넘은 지금의 나는, 20대 때 나누었던 저 대화를 아주 우스운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지난날에 가졌던 불안과 회의감을 자력으로써, 즉 나 자신의 삶으로써 불식시킨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의 모든 시간에 다 자신만만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따금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쉰이 되면 지금보다 체력도, 활력도 떨어지겠지? 청년 세대에서 널리 공유되는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들이 즐겨 쓰는 플랫폼이 내겐 그저 두려운 것이기만 하면 어쩌지? 지금 내가 향유하고 감각하는 즐거움들이 그땐 모두 시들해지면 어쩌지?

    그리고 아무도 나를 찾지 않으면 어떡하지?

    일일이 나열하기조차 힘든 층층의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서도 가장 마지막에 놓인 이 염려가 내겐 가장 두렵다. 모두가 나를 잊으면 어쩌지?


    『할머니의 팡도르』의 첫 페이지에도 이와 닮아 있는 목소리가 흐르고 있었다.

    “죽음이 나를 잊은 게야.”

    그림책에는 외딴집에서 홀로 살아가는, 아니 죽어간다고 말하는 것이 더 어울릴 법한 “셀 수 없이 많은 주름”과 “종잇장처럼 마르고 가늘어”진 입술을 가진 할머니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죽음에게까지 잊힌 게 아닌가 할 정도로 할머니의 외로움은 깊다. 때는 겨울이고, 그 겨울의 매서움과, 빙벽처럼 자신을 감싸고 있는 두터운 외로움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그 집에서 빵을 만든다. 모든 것을 이기고서. 마치 할머니가 빵을 만드는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빵을 만드는 행위 자체가 할머니를 기억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지만 할머니의 치밀한 주름과 마른 입술만큼이나, 그 행위에는 생기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할머니가 사는 외딴집의 문을 두드린다. 사신이었다. 죽음이 할머니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문을 열어주는 할머니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다. 할머니는 그런 붉은 얼굴빛으로, 자신을 기억해주어 고맙다는 말을 대신하는 것만 같다. 할머니는 당장 자신과 함께 가자는 사신에게 빵을 완성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일주일만 기다려달라고 말한다. 얼마나 오래 꾹 다물고 있었을지 모를 할머니의 입술이 사신 앞에서 그렇게 부산스러울 수가 없다. 그건 누가 뭐래도 ‘생기’임에 분명했다.

    그런 할머니 앞에서 사신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어쩌면 할머니가 아니라, 할머니의 생기에 압도당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신은 얼결에 먼 곳까지 물러났다가, 부르르 떨며 화를 내기도 했다가, 할머니의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떠올리며 고개를 젓고는 금세 다시금 할머니를 찾아오기도 한다. 할머니는 그에게 자신이 만드는 음식 재료들의 맛을 선보이면서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다시 사정한다. 실은, 사정의 형식을 갖춘 다정한 명령.

    빵이 만들어질 때까지 사신은 결국 기다리게 되고, 그 과정에 등장하는 마을의 아이들은 수순처럼 반짝인다. 엔딩 역시 아름답다. 초대된 독자 모두에게 오묘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빵을 하나씩 쥐어주기라도 한 것처럼, 모락모락 숨은 뒷이야기가 피어오르는 듯한 풍경의 엔딩.


    하지만 나는 이런 아름다운 결말에 붙들린 것이 아니라, 할머니가 생기를 되찾는 장면으로 자꾸만 되돌려졌다. 죽은 것마냥 되풀이되던, 빵 반죽을 젓던 할머니의 그 행위가 별안간 삶의 행위로 탈바꿈하던 순간 말이다. 죽음의 방문이, 죽어 있던 삶을 살아 있는 삶으로 전환시키던 순간.

    나는 이 그림책에 등장하는 죽음(사신)을 어떤 ‘끝’으로 이해한다. 끝은 결정적인 맞닥뜨림에 다름 아니다. 나를 향해 오는 무엇, 혹은 내가 피하고 싶었던 무엇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 그런 맞닥뜨림이 없다면, 즉 무언가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면 그것으로부터는 어떤 의미도 생겨나지 않을지 모른다.

    나이를 먹는 일이 두려운 것은 어쩌면 지금의 내 삶이 한곳에만 고이고 고여, 그게 나의 구덩이가 되고, 무덤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 아닐까. 잊히는 것 역시, 누군가 나를 다르게 기억할 것이 없을 때, 늘 같은 모습이라 더는 새로이 떠올릴 것이 없을 때, 그런 내가 계속 같은 자리에 있거나 영원히 그곳에 있을 것만 같을 때 일어나는 일이 아닐까. 그럴 때 나는 나에게조차, 또 죽음에게조차 밋밋한 존재가 되어 필연적으로 잊힐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다르게 하기가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다르게 하기 위해서는 상상의 근육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을 찾아온 사신 앞에서 볼을 붉히고 그전과는 전혀 다른 리듬으로 빵을 빚게 되었던 할머니처럼 말이다. 사신의 존재가, 할머니가 불러낸 상상에 대한 비유라 한다면, 할머니 역시 자신의 ‘끝’을 다르게 마주하기 위한 상상의 힘을 적극적으로 끌어다 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할머니의 상상에 대한 답신으로써,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다. 내 옆에 누구든 있을 수 있고, 나의 삶이 언제든 누군가의 삶과 얽혀 다르게 출렁일 수 있음을 상상하자고.

    이런 상상의 능력을 연마하고 있는 한, ‘아무도 나를 찾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은 접어두어도 좋지 않을까. 그림책 속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내가 먼저 얽혀 들어가면 되니까. 상상하고 움직이면서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그들의 삶에 연루되면 되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속하여 숨쉬는 시간, 사회, 사람들에게 나를 조금 열어두는 일일 테다. 물론 나 자신부터 넉넉히 먹이고 돌보는 일은 필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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