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쪽. 돌봄의 운동장을 상상하기 : 『엄마의 의자』


    하드커버로 된 표지를 열자 노란색 간지가 드러난다. 큰딸 이름이 삐뚤빼뚤 커다란 글씨로 적혀 있다. 거기엔 글자들의 세계에 처음 편입되어 이제 막 제 손으로 그것을 쓸 수 있게 된 아이 마음의 환희가 담겨 있다. 서지정보가 새겨진 페이지를 보니, 이 책의 초판 1쇄 발행일은 1999년이고 2007년 36쇄 발행까지 이뤄진 것으로 나와 있다. 큰딸이 6~7세 되던 해에 구입한 책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의 책장을 아이와 함께 넘기곤 했던 당시의 기억이 선명하지는 않다. 다만 눈이 트일 정도로 환한 톤으로 그려진, 또 아이가 간지에다 써넣은 글씨만큼이나 삐뚤빼뚤한 그림체에 끌렸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밝은 톤의 그림이 아니었다면 책을 금방 덮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묵직한 불운 하나가 바위처럼 떡하니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 불운은 화재사고다. 이야기의 화자로 등장하는 소녀와 그녀의 엄마, 외할머니, 그리고 고양이가 함께 살던 집에 불이 난 것이다. 불이 나던 날, 소녀는 엄마와 함께 새 신발을 사고는 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책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날은 식당에서 일하는 소녀의 엄마가 월급을 받는 날이 아니었을까 싶다. 소녀와 소녀의 엄마는 불길에 휩싸인 집을 발견하자마자 할머니부터 찾는다. 다행히 할머니는 집 밖에 있었다. 한참 헤매던 끝에 찾아낸 고양이도 별 탈 없이 무사했다.

    집 안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밝고 화려하게 채색된 대부분의 페이지들과는 달리, 화재가 난 집 안을 그린 페이지만이 움푹 팬 것처럼 어둡게 박혀 있어 마음이 아렸다. 다음 페이지로 서둘러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작가의 마음 역시 다르지 않았던 것일까. 바로 다음 페이지가 유달리 환했다. 노랗고 알록달록했다. 이 페이지를 가득히 메우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한마을에 사는 이웃 사람들이다. 때는 소녀의 가족이 다른 집으로 이사하는 날이고, 동네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껴두었거나 잘 쓰지 않는 가구와 살림살이를 소녀의 집으로 가져다준다. 곰 인형과 먹을거리도, 일을 돕는 손길도 더해진다.

    이사한 집에는 아주 큰 유리병이 새로 놓인다. 그리고 그 유리병 속에는 동전들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소녀는 이따금 학교를 마치고 엄마가 일하는 식당으로 가 양념통을 세척하거나 양파를 까는 등의 잔일을 하고 돈을 받는데, 그 돈이 고스란히 그 유리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유리병이 가득 채워지면 소녀는 엄마와 할머니가 편히 앉아 쉴 수 있는 예쁜 안락의자를 살 계획이다. 그렇게 큰 유리병이 다 채워지려면 얼마나 많은 계절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소녀는 그 계절들을 계산하지 않는다. 그저 유리병 앞으로 틈만 나면 달려가고 또 달려갈 뿐이다.


    소녀의 엄마는 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존재이고 소녀의 할머니는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는 존재다. 그리고 이 둘 모두가 소녀의 양육에 힘쓰는 존재다. 이 사실을 언급하는 대목이 책에 따로 나와 있진 않지만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떤 여리고 취약한 존재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하는 데에는 가까운 이의 도움과 헌신이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으니까. 우리는 각자의 힘만으로 혼자 자라거나 저절로 자라 지금의 자리에 있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그렇게 ‘자라는 일’을 끝내고 나면 우리는 모두 온전해지는가. 여리거나 취약한 상태와 그렇게 영영 이별하게 되는가. 자라는 일이 끝나고 성인이 되면 언제나 홀로 설 수 있고, 또 필히 홀로 서야만 하는가. ‘홀로’ 안에는 많은 것이 포함된다. 경제적인 것, 사회적인 것뿐 아니라 정서적인 독립까지. 이 질문에 고민 없이 곧장 ‘예스’라 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줄곧 완벽한 ‘독립’의 가능성을 외치다가도, 내가 예상치 못했거나 의도하지 않은, 뜻밖의 사건이나 사고 앞에서는 입을 닫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그림책 속 가족의 화재사고와 같은 것 앞에서는 말이다.

    물론 이 가족은 혼자가 아닌 셋이서 ‘함께’인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독립 가능한 존재로만 상상되는 어른과 독립 불가능한 존재로만 상상되는 어린이 사이의 칼 같은 이분법에 관한 것이며, 그런 이분법이 얼마나 허위적인지에 대한 것이다. 즉 능력 ‘있는’ 어른이 능력 ‘없는’ 아이를 돌보는 안정적인 구도가 전에 없이 진동하고 흔들리는 상황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화재사고는 소녀뿐 아니라 그녀의 엄마와 할머니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며 이례적인 고난이었음에 틀림없다. 내내 소박하고 검소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조금씩 불려나갔을 살림살이마저 한 번에 다 잃게 된 이 사람들의 고통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 이들의 그을린 일상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고 닦고 또 닦아 윤을 내는 가장 강력한 존재는, 다름 아닌 소녀다. 노동과 땀을 보태고, 힘을 내는 자신의 마음을 엄마와 할머니를 향해 열어 보여줌으로써 말이다. 그 누구보다 여리고 취약해져 있었을 엄마와 할머니는 이때 소녀의 분주하고 부지런한 마음 덕에 다시금 조금씩이라도 자라나는 존재가 된다.

    소녀의 마음에 감화한 듯 할머니 역시 반찬거리를 사고 남은 동전들을 부지런히 유리병 속으로 던져 넣는다. 소리에 대한 묘사는 등장하지 않지만 나는 상상한다. 자박자박 얕게 깔린 동전 위에 또 다른 동전들이 떨어지며 울려 퍼지는 소리는 마치 음악 같지 않았을까 하고. 소녀가 아니었다면, 엄마와 할머니에 대한 소녀의 사랑과 보살핌이 없었다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음악. 독자 중 누군가는 이미 떠올리고 있을 테지만 그 음악에는 이웃 사람들의 관심과 도움 또한 잔잔히 깃들어 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소녀의 가족은 마침내 모아둔 동전을 털어 지폐로 바꾸고, 작은 꽃무늬가 새겨진 아름다운 안락의자를 들여놓는 데 성공한다. 음악의 시간이 회화의 시간으로 옷을 갈아입은 것처럼 꽃무늬들은 야무지고 단단하게 의자의 표면에 들어차 있었다. 상처 입은 두 어른을 소녀가 제 약손으로 어루만지며 키워낸 동전 같고 꽃 같은 마음 말이다. 그림책의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 쓰인 소녀의 말에 그 마음이 다 담겨 있다. 이 넉넉하고 깊은 온기의 말을 옮기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 낮에는 할머니가 이 안락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저녁에는 엄마가 식당 일을 마치고 돌아와 여기에 앉아 텔레비전 뉴스를 보십니다. 저녁을 먹은 다음엔 내가 엄마랑 같이 이 의자에 앉습니다. 내가 엄마의 무릎에 안겨 잠이 들면, 엄마는 나를 안은 채 팔을 뻗어 불을 끌 수도 있답니다.”

    돌봄이나 도움은 한 방향으로만 일어나지 않는다. 취약하다는 말은 정체성의 이름이 아니며 불변하는 이름도, 절대적인 이름도 아니다. 취약함은 상황에 따라 새로운 숙주를 찾아 옮겨 다니며, 한 숙주 안에서도 강약을 달리한다. 그렇다면 돌봄이나 도움 역시 맥락에 따라 자신의 방향과 길을 수시로 바꾸거나 새로 낸다는 얘기가 된다. 우리는 스스로를, 혹은 나와 다른 위치에 있는 자들을 돌봄받는 자와 돌보는 자 모두로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의 소녀가, 또 소녀의 엄마와 할머니가 돌봄의 운동장 위에서 쌍방향으로 공을 주고받은 것처럼 그렇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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