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쪽. 친구가 되는 꿈 : 『장수탕 선녀님』


    둘째아이 출산을 몇 주 앞두고, 6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그 전 직장의 근무 햇수까지 포함하면 10년여의 직장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라 해도 무방했다. 그건 예감이 아니라 기정사실에 더 가까웠다. 전문직 종사자도 아닌 여성 노동자가 아이를 어느 정도 키워놓은 다음 자신의 자리를 찾아 ‘돌아가는’ 경우는 전무하다시피 했으니까.   

    다니던 직장에 크고 작은 문제가 있어 적잖이 염증을 느끼던 차였다. 후련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막막했고, 걱정스러웠다. 전업주부 생활을 잘 감당할 수 있을지, 두 아이의 성실한 엄마 노릇을 거뜬히 해낼 수 있을지. 무엇보다 사회적인 쓸모를 다한 것만 같은 내 스스로를 견딜 수 있을지가 가장 자신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집에만 있고 아이 둘만 바라보면서도, 모든 것 앞에서 당당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의아했던 것이다.

    나는 도대체 가족 내 돌봄을 무엇이라 여기고 있었던 걸까. 사회적 노동과 가사노동 간 위계는 내 안에 얼마나 강력히, 또 오래도록 심어져 왔던 걸까. 물론 지금은 그것이 남성에게 ‘가족임금’을 지급하는 동시에 여성의 가사노동은 부불노동으로 만드는, 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메커니즘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그 메커니즘이 개인에게 내면화된 결과라는 것도 안다. 당시 이 사실을 다 알았다 해도 현실의 여러 조건과 한계 앞에서 나의 결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당당함만큼은 좀 두둑하게 챙겨 담을 수 있지 않았을까.

    둘째아이를 낳고 한 달도 채 안 되는 산후조리기간을 지낸 이후부터 두 아이를 혼자서 돌봤다.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그 힘겨운 시간을 죽을 생각 한 번 하지 않고 건너올 수 있었는지. 어쩌면 그렇게 마음먹은 적이 있다 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기보존을 위해 인간은 너무 아프거나 힘든 기억에 깊은 구멍을 내기도 한다고 하니 그 덕분인지도.

    구체적인 장면은 지워지고 힘들었다는 감각만 남은 그 시기는, 대신 다른 기억들로 채워졌다. 찰나였다고 할 만한 기억들. 잠깐 내렸다가 그치는 빛 세례. 그 빛은 작은 얼굴 안에서 분명하게 끌어올려지던 입 꼬리였고, 웃음으로 더욱 통통해진 볼 두 쪽이었고, 내 두 귀를 몽땅 다 떼어줘도 모자랄 법한, 자지러지는 웃음소리였다.

    웃음은 깜짝 선물처럼 우연히 찾아올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졌다. 큰아이가 어린이집에 간 사이, 까꿍 놀이와 얼굴 변신 신공, 몸 개그 등을 건네고 아이의 웃음을 받아 챙겼다. 그 사이에도 시간은 흘렀고, 우리에겐 어느새 나란히 함께 앉아 가만가만 책장을 넘길 수 있는 시절이 와 있었다. 마치 셰에라자드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없던 아이들이 침대 위에 하나둘 생겨나 기어 다니게 되었다는 일화와도 같이.

    이때부터는 몸이 아니어도 되었다. 문명의 도구가 신체의 일을 대신 떠맡아준 것이다. 물론 책이라는 도구는 매개일 뿐 책장을 넘기고 글자들을 파악하고 등장인물들의 감정과 상황에 몰입한 채 그들 하나하나가 되어 그들의 목소리로서 말하는 일은, 나의 임무로 오롯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그게 나았다. 적어도 백지 위에서 시작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세상에 없는 괴상망측한 표정 하나를 수십 번 되풀이하느라 얼굴에 경련이 나게 하는 일은 이제 없을 테니까.

 
    그때 우리 무릎 위를 가장 만만하게 오르고, 또 가장 빠르고 쉽게 웃음을 안겨준 책이 바로 <장수탕 선녀님>이다. 표지부터 이미 압권인 책. 선녀님이라는 이름표를 달지 않았다면 도무지 식별 불가능하고 호명 불가능해 보이는 인물이 여기에 있다. 요구르트의 맛에 도취된 듯한 그 얼굴은 그게 누구인지 따지기도 전에 웃음부터 몰고 나온다. 선녀의 전형이라든지 고정된 정체성 개념에 대해 질문하게 만들다가 그 질문과 함께 다시금 호방하게 웃도록 만드는 힘을 가진 얼굴. 이 그림책을 쓰고 그린 백희나 작가가 스스로를 ‘인형장난전문가’라고 칭한 것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전문가’가 ‘장난’과 만나, 입구 풀린 풍선처럼 제멋대로, 하지만 박력 있게 춤추며 날아가는 힘이 느껴지지 않는가.

    풍선의 춤은 그림책 내지의 페이지마다에 빠짐없이 깃들어 있다. 옛날 목욕탕 매표소에서 무심히 매표하는 어른의 심드렁한 얼굴과, 냉탕에서 물장난하는 덕지를 향해 “덕지 너, 감기 걸려도 엄만 모른다!” 하고 소리치면서도 그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도록 내버려두는 덕지 엄마의 성실한 얼굴. 개헤엄에서 시작해 국가대표 선수 놀이, 뱃놀이까지 모든 것에 진심인 덕지의 천진하고도 또랑또랑한 얼굴.

    물론 이 이야기 춤의 본격적인 전개는 이 다음부터다. 덕지는 목욕탕에서 자신을 선녀라고 소개하는 ‘이상한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그를 이상하고 지루한 할머니쯤으로 생각하던 덕지는 그의 변화무쌍한 냉탕 놀이 신공들을 접하고 또 그와 한바탕 신나게 놀게 된 뒤론 그를 완전히 다른 눈으로 보게 된다.

    그건 아마도 우정과 사랑의 눈이었을 터이다. 요구르트의 맛이 궁금하다는 선녀 할머니의 한 마디에 덕지는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던 때 밀기에 재빠르게 자발적으로 응했으니 말이다. 오직 요구르트를 받아 챙기겠다는 일념으로. 요구르트를 어서 선녀 할머니에게 가져다 드려야겠다는 의지로.

    그렇게 꿈같은 목욕의 시간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덕지는 그날 밤 감기에 걸린다. 펄펄 끓는 몸으로 신음을 얕게 토하며 선잠이 든 덕지에게 선녀 할머니가 작은 요정의 몸으로 찾아와 냉탕의 영이 깃든 차가운 손을 덕지의 이마에 얹는다. 그가 하는 말이 그렇게 웃기고 근사할 수가 없다. “덕지야, 요구룽 고맙다. 얼른 나아라.”


    아이와 나는 이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마다 그 익살스러운 얼굴들과 몸의 표정 앞에 수시로 멈춰 웃느라 무척 바빴다. 그럼에도 나는 이 그림책이 모든 걸 다 쥐고 흔들도록 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에 이를 악물고 대사를 읊었다. 나는 프로였고 프로여야만 했지만, 아이는 내가 문장 끝을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웃음으로 미끄러질 때 더 많이 웃었다. 이 그림책과 함께 여러 번의 계절을 나고 해를 난 뒤에는 아이가 내게 대신 읽어주기도 했다. 읽었다기보다는 외운 것에 가깝다. 책을 외우고 나의 톤과 연기를 외워서. 나를 똑 닮은 목소리로 책을 읽는 아이는 그때, 나이면서 나의 엄마이면서 내 딸이기도 했다.

    이 일은 어쩌면 덕지와 선녀 할머니의 우정을 닮는 일이기도 했다. 냉탕 놀이를 가르쳐주는 자와 배우는 자가 요구르트를 받는 자와 주는 자가 되었다가 다시 치유를 하는 자와 치유를 받는 자가 되는 일, 그리고 또 그다음의 놀이를 기다리는 일. 이는 누가 누구에게 무언가를 해주는 것이라는 정의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함께 노는 일이고 허물없이 위치를 바꾸는 일이며 기꺼이 서로를 닮는 일이다. 같은 눈높이에서 사랑을 나누는 일이며, 상대가 기뻐하는 것을 기뻐하는 일이다.

    바꾸어 말할 수도 있겠다. 함께 놀고 닮아가고, 상대의 기쁨을 기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고 우정이다. 그렇게 간단히도 우린 누군가의 친구가 될 수 있겠고 친구가 될 꿈을 꿔볼 수 있겠다. 나이와 정체성과 국적, 또 그 밖의 모든 것을 떠나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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