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쪽. 싸움 곁에서 함께 싸우기 : 『엄마, 달려요』
- 그림책 처음 일기: 희음
- 2021. 6. 7. 10:09
이 책의 그림을 그린 이는 천루이추라는 대만의 작가다. 그런데 글쓴이가 특이하다. 글쓴이 이름의 자리에는 개인이 아닌 ‘대만 산업재해피해자협회’라는 단체명이 표기돼 있다. 이것만 봐도 책의 내용이나 주제에 대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산업재해피해자협회라니. 책을 펼치기도 전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걸 어쩔 수 없었던 누군가는, 이 책을 가만 집어 들었다가 재빨리 본래의 자리로 내려놓을지도 모를 일이다. 책을 집어 들던 순간보다 더 조용하게. 나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요즘의 나는 그럴 수가 없다. 앞 문장에서 ‘요즘’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넣었다 뺐다 했다.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서야 산업재해피해의 현장과 그 현장에 잇대어진 죽음들과 삶들에 대해 제대로 들여다보게 된 나를 고백하기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산재피해와 피해 뒤에 남겨진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로 어느 글쓰기 모임의 진행을 맡게 되면서부터다. 산재피해가족네트워크 ‘다시는’을 중심으로 조직된 모임이었다. 산재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모임 구성원의 8할을 채웠다. 개중에는 뉴스와 기사에서 숱하게 얼굴을 접해, 오래 알던 지인인 것처럼 느껴지는 이들도 있었다.
이런 낯익음은, 그들이 싸우는 사람들이라는 걸 의미한다. 당신 가족의 죽음이 개별의 죽음으로 묻히지 않기를 소망하며 삶을 지탱해왔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가 이런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나’ 하는 마음이 시시때때 고개를 들어도, 남겨진 그들은 ‘남겨진’ 데서 그치지 않고 ‘남아서’ 싸웠고 싸우고 있다는 뜻이다.
그들과 눈 맞추며 이야기하고, 함께 밥을 먹고, 매주 한 편의 글을 써내기를 독려하면서야 그들의 남은 삶과, 그 삶보다 앞서간 죽음들, 다시는 없었어야 했던 죽음들이 또렷이 보였다. 그 죽음들이 되풀이되고야 마는 썩고 일그러진 현장과 그 현장들을 숙주 삼아 자라는 한 사회가 구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2016년 5월 지하철 구의역에서 사고를 당한 ‘김군’과 2018년 12월 충남태안화력발전소의 컨베이어벨트에서 죽음을 맞은 김용균 씨, 얼마 전인 지난 4월 경기도 평택항에서 300㎏ 컨테이너 철판에 깔려 숨진 이선호 씨, 그리고 그 사이사이의 재해현장 속 죽음들에 대한 기사를 퍼다 나르고,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연서명을 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이에 함께하기를 요청했었다. 매해 산업재해로 죽는 노동자 수가 2400명이라는 사실에 경악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는 죽음 뒤에 여전히 바짝 붙은 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두려움과 희망이 어디쯤 놓여 있는지 관심 갖지 않았고, 이 싸움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디에서 흔들렸으며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가늠해보지 않았다. 그랬던 것이, 그랬던 내가, 그들과 목소리를 섞고 눈빛을 주고받는 경험에 의지해서야 조금 달라졌다는 사실, 이 역시 나의 또 하나의 부끄러움이다.
어쩌면 나는 그들이 응당 싸워야만 할 싸움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라고, 그것 말고 무엇을 더 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이다. 그것이 얼마나 큰 결단이며, 매일같이 크게 심호흡하며 먹어야 하는 마음인지를 미처 알지 못했다. 각자에게 저마다 다른 일상이 있고, 각기 다른 걸 보며 웃고 울고 춤추는 순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또한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쉬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걸 살피지 못했다.
무엇보다 나는 그들이 흔들릴 때마다, 그렇게 흔들리다 엉뚱한 바닥에 넘어지려 할 때마다 그들 곁에서 손과 어깨를 잡아준 너무 많은 이들이 있었다는 걸 잘 알지 못했다. 그들의 싸움이 지속되고, 묻히지 않으며, 확장될 수 있도록, 그들과 함께 고통스러워하고 길을 터주며 보폭을 맞춰 걸어준 이들.
예컨대 이런 이들 말이다. 재해피해자의 작업 현장 동료들, 현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은 한 의료원의 원장, 아그렐라 예수수도회 회원, 반올림 대표, KBS 추적60분 PD, 공공운수노조 조합원, 민주노총 지부 노동안전보건 위원장, 노동건강인권센터 새움터 활동가. 이는 『김용균이라는 빛』이란 제목의 김용균 백서에 인터뷰로 실린 이들의 이름 목록 중 일부다. 이들이 김용균 씨 어머니인 김미숙 씨의 투쟁 곁에 서고 함께 걸어준 사람들이다.
물론 이들은 자신들이 내어준 어깨로 건너온 희미한 체온에 다시금 기대기도 하면서, 저마다의 싸움을 해나간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이 싸움은 더 이상 한 사람도 부당하게 죽임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더는 그 부당한 죽음 뒤에 누군가 남겨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축을 이룬다는 점에서 다시, 모두의 싸움이 된다.
그림책 『엄마, 달려요』에도 산업재해로 남편을 잃은 여성이 등장한다. 그림책의 화자는 그녀의 아들인데, 아들이 바라본 엄마의 모습은 늘 온통 칠흑에 휩싸인 채다. “크고 시커먼 먹구름이 엄마를 집어삼켰나 봐요!”라는 아들의 말처럼 여성은 방에만 틀어박혀 내내 죽음에 관련된 서류를 뒤적이거나, 산재에 관한 누군가의 전화를 받은 뒤에야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겨우 밖으로 나간다.
아들은 아빠가 그립고 엄마가 걱정되지만 그보다는 화가 난다. 배가 고프고, 함께 사는 고양이 역시 끼니를 먹지 못한 게 신경 쓰이기 때문이다. 기다리다 못한 아들은 난생처음 조리대와 가스불 앞에 선다. 그 모습을 발견한 여성이 아들을 향해 놀라 소리친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
위험이라는 단어 앞에 멈춰 서지 않을 수 없었다. 말하던 순간,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아찔했을까. 위험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모두에게 얼마나 다른 크기와 무게로 감각되는 것일까.
아들은 엄마가 스스로를 가두었던 검은 방만큼이나 깊고 큰 제 입을 열어 보이며 “배고프단 말이야.” 하고 외친다. 그제서야 엄마는 아들에게 공들여 사과한다. 조리를 하고 상을 차린다. 얼어 있던 시간을 그렇게 조금씩 녹여간다. 두 사람은 세 사람이었을 때만큼이나 열심히 밥과 찬을 비운 뒤, 나란히 바깥으로 나간다. 이제 밝은 곳으로 나가자는 아들의 제안에 힘입어.
두 사람이 바깥으로 나가는 장면에서 이야기는 끝이 나지만, 나는 어쩐지 거기서부터 공동의 싸움이 새롭게 시작될 것만 같다. 죽음 뒤에 남겨졌던 여성이 죽음보다 더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진 방에서 뛰쳐나올 수 있도록 손잡아준 것이 그녀의 아들이었다면, 이제 두 사람이 발 디딘 밝은 곳에는 그다음의 싸움을 위해 그들과 눈을 맞추고 보폭을 맞추며 함께 걸어줄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다.
그 사람들은, 위험이란 단어가 지금 저마다에게 다르게 감각된다 해도, 당신이 느끼는 위험과, 당신이 맞서고 싶은 위험은 어떤 것이냐고 묻고 말 걸어줄 사람들일 것이다. 그 위험에 대한 감각 또는 상상력의 차이를 줄여나가는 것이, 우리가 온전히 함께인 사회,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일 중 하나가 아니겠냐고 제안하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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