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쪽. 다정한 얼굴들을 기억해내기 : 『태어난 아이』


    나를 왜 낳은 거야? 내 허락도 없이?

    청소년 시절, 목젖 끝까지 이런 말이 차오른 적이 종종 있다. 삼키고 또 삼켰다. 그게 내 부모든 신이든, 대답은 침묵으로 돌아올 게 뻔했으므로. 그때 세상은 온통 숙제로만 가득했다. 고통과 환멸과 지루함으로 이뤄진 숙제. 숙제를 내주는 사람의 기쁨만을 위해 숙제가 존재하는 세계. 거기에 종종 ‘이게 다 너를 위한 거야’란 말이 기쁨을 더 찬란한 기쁨으로 만드는 액세서리가 되기도 하는 세계.

    초등학교 때 만났던 단 한 명의 선생님을 존경했다. 아이들을 조건 없이 골고루 살피고 보듬고 있다고 느낀 유일한 분이었다. 나머지는 이내 그 속에 뭐가 들었는지가 다 보였다. 그들이 더 많이 호명하고 더 많이 웃어주는 학생의 경우, 예외가 없었다. 그들 어머니의 얼굴을 번번이 학교 안에서 마주쳤다. 난 내 엄마에게 원망을 늘어놓기도 했고 때론 부탁조로도 말했다. 딱 한 번만 학교에 가주면 안 돼? 엄마는 단호했다. 돈 없다!

    난 발육이 빠른 편이었다. 여중을 다니던 시절, 남자 교사들은 가끔 칭찬이나 격려를 한답시고 나의 등을 쓸어내렸다. 브래지어 후크가 놓인 위치에서 그 손들은 어김없이 느려졌다. 수치심을 느꼈고, 그러고 나면 한 며칠 동안은 그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는 수시로 맞닥뜨려야 했던 시선 강간에 맞서는 방법이 내 쪽의 ‘정숙함’이라 여겼다. 가슴이 도드라지지 않게 어깨를 구부렸고, 치마를 끌어내렸으며, 교내에선 체육시간을 제외하고는 뛰는 일이 없었다.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정숙함 따위 개나 줘버렸어야 한다.

    고등학교 2학년 담임이었던 중년의 남자 국어교사는 숙련된 수업 기술과 품위, 세련된 마스크로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어쩌다 반장이 된 나를 그는 조금 특별하게 대해줬다. 어느 날 엄마가 교통사고를 당했고 갈비뼈가 부러져 몇 주간 입원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공부만으로도 벅차던 시기였지만 나는 식구들의 밥상 차리는 일까지 책임져야 했다. 자꾸 눈물이 나왔다. 선생은 과제를 면제해주거나 비공식 조퇴를 시켜주는 등으로 나를 배려했다. 급기야 그는 나를 조용히 부르더니 미리 사둔 극장 티켓 2매를 보여줬다. 내키지 않았지만 나의 힘겨움을 헤아리고 위로하려는 것으로 읽혀 거절할 수 없었다. 나란히 극장에 앉았다. 영화가 중반쯤 진행되었을 때, 너무도 진부하지만 내겐 생소하고도 섬뜩하기 그지없는 일이 벌어졌다. 내 손이 그의 에로티시즘의 도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얼어붙었고, 그때 처음으로 손이라는 것이 연필을 쥐거나 피아노를 치거나 밥을 차리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았다. 해리상태라는 게 그런 걸까. 얼어붙은 채로도 나는 내 손이 다른 이의 것이라도 되는 양, 손에 대한 사실을 인식하고 분석했다. 극장 밖으로 나와서 그는 내게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다고 했다. 아.이.스.크.림.을 말하는 그의 입 모양에 몸서리가 쳐졌다. 대답도 하지 않고 곧바로 돌아서서 내달린 것만큼은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이었다. 2학년의 나머지 몇 개월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흘러갔다는 것이 기적 같았다.

    오늘의 고통과 환멸이 내일로 이어질까 두려웠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도 고통은 모조리 내 어깨 위로만 쏟아지는 것 같았다. 나쁜 일은 늘 너무 나빠서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어쩌면 초등학교 시절 왕따를 당했던 경험이 나의 입을 막았는지도 모르겠다. 내 피해사실이 입들을 돌고 돌아 나의 치부나 부도덕함으로 부풀려져서는, 그것이 내가 맺은 그나마의 관계들마저 다 망쳐버리고 말까 봐. 왕따를 당하던 날들의 기억과 함께, 혼자서 꽁꽁 싸맨 나쁜 일들은 나를 갉아 먹으며 쑥쑥 자랐다. 그것들을 없애려면 나를 없애야 했다. 어떻게 죽어야 덜 아플지를 궁리했다. 태어나는 것과는 다르게, 내 허락과 선택에 의해 죽을 수 있다는 건 참 좋구나 싶었다.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됐다. 죽음을 조금 잊었다. 사는 게 낫다는 생각에는 이르지 못했다.


    최근 우연한 계기로 읽게 된 사노 요코의 『태어난 아이』를 저 시절에 만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한다. 그랬다면, 사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어렴풋하게나마 하게 되지 않았을까. 책 속의 화자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다. 유령의 존재라고나 할까.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자유롭게 거리를 돌아다니며, 신체와 감각과 마음을 가진 이들을 마주한다. 그중에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눈에 특히 선연히 들어온 것은 한 여자아이의 모습인데, 그 여자아이는 근처에서 장난을 치던 강아지들에게 살짝 엉덩이를 물린 뒤 아파한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도 강아지에 의해 똑같이 상처 입지만 전혀 아프지 않다.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플 일도 없는 것이다. 아이는 그저 무심한 눈으로 여자아이를 쫓는다. 여자아이는 아파, 아파, 하고 외치며 울면서 뛰어간다. 그곳에는 여자아이의 엄마가 있고 그녀는 아이의 엉덩이에 반창고를 붙여주며 토닥인다. 여자아이 곁의 뜨거운 마음이 여자아이를 만지고 키운다. 그때 여자아이의 마음 안에는 이런 말이 가득 들어차지 않았을까. 사는 게 낫구나, 아파도 사는 게 낫구나.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 뒤 마음먹는다. 태어나야겠어! 마침내 태어난 아이가 된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여자아이가 했던 과정을 그대로 겪으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살아서 아프고, 살아서 사랑받는 아이가 된다. 위로받고 지지받고 사랑받을 걸 알기 때문에 고통의 다음 이야기 또한 아는 아이가 된다. 나아가 아이는 삶으로, 실패로, 절망으로 뛰어드는 사람이기도 할 테다. 고통과 환멸과 지루함으로 채워진 숙제 안쪽에 듬성듬성 사랑과 환대의 구멍을 내어 빛이 들게 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림책에서는 아이로 하여금 뛰어드는 힘을 갖도록 하는 핵심적 존재로서 ‘엄마’라는 인물을 그리고 있지만, 나는 그것을 지지와 사랑과 다정을 건네는 그 밖의 숱한 존재들로 확장해 읽고 싶다. 잘 보이지 않을 뿐 세상에는 엄마 없이 자란 이들과, 다양한 이유로 엄마와 제대로 관계 맺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뿐만 아니다. 한 어린이가 자라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 취약한 이에 대한 무조건적 환대는 엄마 혼자가 아닌 사회 전체의 몫인 것이다.

    이런 생각도 한다. 사랑과 지지의 신호를 알아차리고, 믿고, 기억해내는 용기 역시 필요한 게 아닐까 하는. 내게는, 농담 따먹기 취향이 기가 막히게 잘 맞았던 동네 친구와, 아무렇지도 않게 습관처럼 외상을 주던 슈퍼마켓 아주머니, 고양이 세 마리를 키우면서 그 동네 고양이들까지 고루 챙기고 내게도 고양이를 대하듯 다정하게 말 걸며 반짝반짝하게 닦은 사과 한 알씩을 건네던 동네 이모, 중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줄곧 한반이 되길 바랐고 그리 되면 약속처럼 단짝이 되었던 친구도 있다. 그런데도 나는 그들의 얼굴과 그들의 환대를 기억하는 데 무능했다. 나는 나의 고통을, 내게 상처를 낸 자들의 얼굴을 기억하는 일에 더 깊이 골몰해 있었던 것이다. 그 반대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나는 나를 없애는 상상도, 그 방법에 대한 궁리도 할 필요가 없었을지 모른다. 사는 게 낫구나, 이따금 중얼거리며 무엇에든 잘 뛰어드는 사람으로 자라나는 데 보다 부드러운 과정을 거쳤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금의 나는 꽤 괜찮다. 조금 거친 과정을 통과해오긴 했지만 말이다. 무릅쓰는 일에 겁을 덜 내게 되었으며, 다정한 얼굴들을 기억해내는 능력 또한 부지런히 키우는 중이다. 나 역시 누군가의 기억 한 모퉁이에 떠오르는 얼굴이기 위해선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시시때때 고민하기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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