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쪽. 돌봄이라는 일상의 혁명 : 『키오스크』

    『키오스크』의 주인공 올가는 키오스크(가판대)를 지키는 사람이다. 한 평 남짓한 공간에서 올가의 하루가 열리고 닫힌다. 그림책의 문장처럼 “키오스크는 올가의 인생이나 다름없”지만 키오스크의 좁디좁은 공간과 각진 테두리는 올가의 세상이 아니라 올가가 세상과 만나도록 하는 몸 혹은 피부에 더 가깝다. 키오스크를 통해 올가는 세상과 이어지고, 그러면서 올가는 매일매일 환해지니까.

    미소 가득한 얼굴로 단골손님을 맞는 올가는 그들이 무엇을 살지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또는 어떤 마음으로 이곳을 찾는 것인지를 거의 알고 있어서, 그 마음과 필요에 걸맞은 물건을 정확하게 건넨다.

    “연애에 늘 실패하는 숙녀는 여성 잡지에서 도움말을 찾아요.”

    “머리를 올려 묶은 아주머니는 낚시랑 고양이랑 정치에 관심이 많아요.”

    “선글라스를 낀 남자는 오늘의 운세를 읽은 뒤 복권을 사고요.”

    올가는 무척 뚱뚱한 몸을 가지고 있다. 종일 꼼짝없이 키오스크를 지켜야 하는 올가의 생활 패턴이 그녀의 몸을 조금씩 부풀게 했으리라 짐작된다. 하지만 키오스크 너머로 사람과 사물, 동물과 식물, 해와 바람에게 인사 건네는 올가가 늘 웃고 있는 걸 보면, 그녀의 뚱뚱함은 그녀가 그(것)들 안에 숨은 사랑을 빠짐없이 주워서 꼭꼭 씹어 삼킨 덕분인 건 아닌가도 싶다.

    말하자면 이런 사랑들 말이다. 올가에게서 물건을 사가는 사람들이 하는 작별인사 안에 묻은 다정함, 사탕을 받아 든 소녀의 입 꼬리에서 흘러내린 기쁨, 여행 다녀온 어느 단골의 어깨에 남은 어제의 숲 냄새, 키오스크 앞 보도블럭 틈새에서 움트는 새싹의 명랑한 안간힘 같은 것들. 그러니까 올가가 매일 가볍게 웃을 수 있도록 하는 그 힘은, 숨은 것들을 ‘발견’하는 힘일 테다. 매일 되풀이되는 무미건조한 일상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일. 그런데 의미는 단독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내가 외부와 이어질 때, 즉 외부에 의해 자극을 받거나 외부와의 접촉면에 새겨진 기표들을 내가 맞닥뜨리고 해석해낼 때에야 그것이 다시 내 안으로 들어와 의미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올가의 몸처럼 설정되어 있는 ‘키오스크’가 이미 이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키오스크에 진열된 물건들이 바깥의 손들과 만나지 않는다면 키오스크는 제 존재 의미 자체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외부와 연결되고 매개될 때에야 비로소 온전한 의미를 갖게 되는 키오스크. 물건들이 그렇게 주인을 찾고 의미를 찾아 건네지는 순간은 올가의 마음이 그쪽으로 건너가는 일과도 닮아 있다. 단골손님 하나가 가판대 앞에 설 때 그가 필요로 하는 물건이 무엇인지 미리 알고서 올가가 그걸 재빠르게 건네는 장면은, 아무도 바라봐주지 않는 다른 이의 슬픔을 그녀가 먼저 알아보고 가만가만 끄덕이는 일처럼 보이기에.

    이때 건네는 행위, 그것은 돌봄에 다름 아니다. 건네는 일에는 늘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타자가 있으며, 두 사람 사이에 행위가 일어날 때 타자와 나는 그렇게 주고받는 행위를 통해 연결된다. 건네받은 타자에게는 증여받은 사물이, 건넨 나에게는 건넸다는 사실이 남는다. 남겨진 사실들은 둘 모두가 참여한 공동 행위의 흔적이며, 흔적이 되풀이될 때 그것은 삶의 리듬이자 법칙이 된다. 다른 이와의 연결을 통해 그가 내게 새긴 시간과 행위의 흔적, 다른 이의 체온에 대한 기억, 그리고 이것들을 통해 내가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라는 감각에 관한 법칙 말이다. 이 삶의 법칙을 몸으로 아는 과정이 돌봄이 아니면 무엇일까.

    육체와 피부라는 뚜렷한 경계를 가지고 독립된 사고를 하며 자립적인 삶을 영위하는 존재라고 굳게 믿었던 나 자신이, 실은 숱한 타자들이 지나간 흔적의 그림이며, 바깥의 풍경들이 스며들기에 더없이 좋은 창으로 이뤄진 집이자, 건네기 위한 물건들로만 대부분 채워진 키오스크라는 것을 아는 과정이 돌봄이 아니면 무엇일까.

 

 

    얼마 전 『저는 삼풍 생존자입니다』의 저자가 ‘세바시 강연’에서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녀는 말했다. 사고 이후 수년 동안 삶에 대한 기쁨과 의미를 모조리 잃어버렸다고. 사람을 가려서 오지 않는 죽음, 당장 몇 초 뒤에라도 내게 찾아들 수 있는 죽음 앞에서 모든 일이 무의미해져버렸다고. 단 몇 발자국을 사이에 두고 일어난 폭발, 그리고 불행은 그녀에게 너무도 선명했다. 한동안은 행복도 그럴 것이라 믿고 행복을 찾아 헤맸다. 행복 역시 불행처럼 확실하게 유리창 깨고 방 안으로 밀어닥치는 것이라 생각했다. 행복을 찾기 위해, 그런 식으로라도 살아 있다는 감각을 되찾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그녀가 보육원에서 일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루는 세 살쯤 된 아이가 바깥으로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왜 그러니, 말을 해봐. 뭘 줄까? 젤리 주면 나갈래?” 꼼짝 않던 아이가 고개를 들었을 때 화난 듯 치켜 뜬 그 눈에는 눈물이 흘러넘칠 듯 고여 있었다. 아이는 말했다. “안아줘.”

    아이를 안고 얼마나 오래 울었는지 모른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제야 행복이란 게 뭔지 알았다고, 행복은 유리창 깨고 오는 게 아니라 이렇게 사소한 순간에 예고 없이, 아주 낮은 걸음으로 찾아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직접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어쩌면 이런 이야기도 하고 있는 게 아니었을까. 행복은 언제 어떻게 고통받거나 죽을지 모르는 약한 존재들이 그 불안과 불확실성을 혼자 힘으로 섣불리 뛰어 넘으려 하지 않고, 서로 기대고 연결됨으로써 크고 작은 사랑을 주고받을 때, 덤처럼, 농담처럼 툭 떨어지는 것이라는 이야기.

    아이를 안은 것은 저자이고 안음의 수혜자는 아이이지만 포옹이라는 행위의 흔적은 두 사람 모두에게 남는다. 두 사람의 체온이 서로에게 조금씩 건네지는 것. 이때 주체와 대상의 구분뿐만 아니라 선후 관계도 뒤엉킨다. 포옹을 요청한 건 아이이지만 아이의 마음을 알기를 원하며 먼저 질문한 건 저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떤 일의 결과로 누가 절대적으로 이득을 보는지, 혹은 누가 먼저 이 행위에 관한 깃발을 꽂았는지가 무의미해지는 것이 바로 돌봄이다. 그리고 이는, 죽음이 너무도 거대하고 무지막지해서 산다는 것이 쓸데없고 하찮아 보이던 저자에게, 살아있다는 감각을 최초로 부여한 장면이기도 하다.

    살아있다는 건 이렇게 내 옆에 있는 누군가를, 내 쪽으로 달려오는 누군가를 알아보는 일이며, 그가 없이는 나라는 존재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보는 일이 아닐까. 그렇기에 산다는 건, 누군가에게 자꾸 말을 건네고 내 고유의 것이라 믿었던 것을 떼어주면서 나라는 신체와 키오스크를 수정하거나 조금씩 다르게 가꾸는 일이 아닐까. 그리고 이 일이야말로 타자와 나에 대한 돌봄이 상호적이고 동시적으로 일어나도록 하는 일상의 혁명인 건 아닐까.

 

 

https://www.youtube.com/watch?v=JZezEf1Ni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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