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또라이들의 세상

Unexpressed emotions will never die.
표현되지 않은 감정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They are buried alive and will come forth later in uglier ways.
산 채로 묻힌 뒤 훗날 더 추악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Sigmund Freud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밈달, <안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2021, 왁스, 유리, 비즈, 레진, 8X16X20 cm

     꿈을 꿨다. 어떤 남자가 벽을 따라 늘어선 키 높이의 풀들을 다듬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물을 것이 있는 듯 주변을 서성거리며 우물우물 거린다. 앞에 선 그의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남자는 이내 인상을 찌푸리더니 대답 대신 다듬던 풀잎파리를 쥐고 확 잡아 뜯는다. 입을 다물라는 뜻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지만 동시에 이 상황이 모두 나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또한 꿈임에도 불구하고 가슴 안으로부터 아주 익숙한 통증을 느꼈는데, 어릴 적 술에 취한 아빠가 방문 너머로 나를 부를 때의 아찔한 느낌과 같은 것이었다.

    '꿈속의 나'는 남자가 화를 낸 것에 대해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가 곱게 내 이야기를 들어줄 것이라는 발상 자체가 없었다. 이 불편한 전제는 짧고 단순한 나의 꿈에 당연하게 따라 붙은 옵션이다. 나는 또한 그가 과격한 행동으로 나를 위협했을 때 자신을 탓했다. 내 말에는 누군가 애써 들어줄 만큼의 가치가 담겨 있지 않다는 또 다른 옵션인 것이다. 무의식이 꿈을 통해 구현해 낸 나의 민낯이었다.

    나는 사람을 믿지 못한다. 우리의 마음을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하나하나 열어볼 수 있다면 내 마지막 인형에는 '인간 불신'이라고 적혀 있을 테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풀어내자면 우리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어릴 적 기억에 엄마는 늘 일을 했고 아빠는 백수로 지내는 날이 더 많았다. 그는 거의 매일 술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한번 병을 따면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마셨다. 이른바 알코올 중독이었다. 또한 '책임감'과의 우정을 논한다면 당시의 엄마를 따라올 자가 없었는데도 늘 술에 취한 아빠는 퇴근한 엄마를 붙잡고 시비를 거는 것이었다.

  ‘네가 이 집에서 하는 게 뭐가 있어.’
  ‘네가 뭔데, 씨발년아.’

    물론 시비는 높은 확률로 폭력을 동반했다. 보통 물건을 먼저 집어 던졌는데, 아빠가 무언가를 던지거나 깨는 행동으로 엄마를 위협할 때면 나는 방문을 살짝 열어두거나 아예 방 밖으로 나가 엄마와 아빠 근처에 앉아 있었다. 아빠는 엄마와 언니는 때려도 나는 때리지 않았으므로 늦둥이 딸을 봐서라도 이쯤 하고 자라는 나름의 시위였다.

    술상은 대부분 초저녁에 시작됐고 아빠는 이른 시간부터 취해 있기 일쑤였다. 그때는 집에 없는 엄마를 대신해 나를 불러냈다. ‘임주연.’ 아빠는 경남 사투리를 사용했다. ‘에 소리가 살짝 올라가가고, ‘에는 쉬는 듯이 내려가며, 끝 글자 에서는 다시 날카롭게 올라온다. 그 목소리와 억양이 끔찍하게 싫었다. 내 이름 석 자는 밧줄이 되고, 뱀처럼 공기를 가르며 나를 찾아낸다. 부름에 답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목이 졸려 죽임을 당하고 말리라는 공포가 뒤따랐다.

    아빠가 나를 열 번 부른다면 열 번 모두 가고 싶지 않았다. 네 엄마가 왜 자신을 무시하는지 말해보라는 등 걸핏하면 감당하기 어려운 질문으로 나를 압박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나는 입을 다물고 아빠의 재떨이나, 담뱃불 때문에 구멍이 난 매트리스 커버 같은 것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가끔 침묵은 지독하게 길어서 방 안에 내 심장소리가 울리는 듯 착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가 대답 없는 나를 노려볼 때면 온 얼굴이 따끔따끔하기도 했지만 입은 열리지 않았다. 어떤 말도 아빠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대신 내가 당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는 시그널을 온 몸으로 발산했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다가 힘이 들면 엉뚱한 말을 하기도 하면서 고문과도 같은 몇 분, 길게는 몇 시간을 참아냈다.

    그리고 마침내 아빠는 어린 딸에게 들을 말 따위는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새삼스레 나를 놓아준다. 이것이 그와 공생하기 위해 내가 택한 방법이었다. 엄마처럼 아빠에게 덤빌 배짱도, 언니처럼 논리를 갖고 때려 박을 말솜씨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폭력의 선택지로 나를 전락시킬 마음 또한 추호도 없었다.

    5~6살 무렵의 기억 하나를 소개하겠다. 나는 현관 타일 바닥에 맨발을 동동거리며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는 안방이 보였는데, 거기서 엄마와 아빠가 엎치락뒤치락 싸우고 있는 것이다. 가차 없이 서로를 향해 주먹을 내리 꽂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위협적인 분위기에 압도당한 나는 본능적으로 이 순간 누가 나를 지켜줄 수 있을까 고민했던 것 같다. 그때 내가 사는 아파트의 경비아저씨가 생각났는데 그 아저씨가 아빠를 활로 쏴서 죽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계속 반복했다. 언제나 폭력은 아빠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끝내 현관문을 열지 못하고 하염없이 안방을 바라보며 울기만 했다. 어서 모든 것이 끝나기만을 바랐다. 작은 아이에게 무력함이라는 족쇄가 채워지는 순간이었다. 목이 찢어져라 울어도 부모님은 나를 털끝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가장 안전한 공간이여야 할 집은 언제든지 폭력에 노출될 수 있는 위험한 곳이었다. 믿고 의지할 수 있어야 할 부모님은 유치원 선생님보다도 더 두려운 존재였으며 그로써 '사람에 대한 믿음'이란 내 안에 자리를 잡기도 전에 증발해버린 것이다.

    부모님이 싸울 때면 나는 대부분 그들 곁에 함께 있었는데, 폭력에 노출되는 일이란 극한의 존재적 공포를 동반하고는 했다. 지속적인 가정 폭력과 공기처럼 함께하던 불화는 쉽사리 잊을 수 없는 무거운 기억으로 남았고 더불어 내게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한 일이 됐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빠가 엄마를 왜 때리는지 한 번도 묻지 않았다. 물론 그 당시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내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는 방법조차 알지 못했으며 그들은 들을 여유도 없어 보였다. 그저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엄마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아빠의 비위를 맞췄다. 눈앞의 현실에 좋고 싫음을 표현하며 여유부릴 새가 없었다. 나보다 12살 많은 친언니는 이미 어른이었고 엄마를 이어 폭력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늦둥이라는 보호막은 어른이 되는 순간 가차 없이 깨어지고 나 역시 안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시달렸다. 특히 언니는 아빠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숨기지 않았는데, 그런 태도가 아빠를 자극할 때마다 나는 불똥 튈 상황을 만드는 언니가 너무나 미웠다.

    어린 주연이는 믿고 기댈 사람이 필요했다. 든든하게 나를 백업해주는 어른이. 그래서 아이답게, 무조건적으로 사랑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연유로 내게는 다른 종류의 믿음이 싹텄다.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나라는 존재는 그 어디서도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이란 믿음 말이다. 그러니 나 역시 세상에게 기대하며 상처받아서는 안됐다. '인간불신'.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종교가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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