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꿈속의 세상


    그런 날이 있다. 분명 어젯밤에 꿈을 꾼 것 같은데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꿈속에서 경험한 감정만이 ‘느낌적인 느낌'으로 남아있는 경우. ‘참 희한한 꿈이었는데, 내용이…’, ‘왠지 내가 막 웃었던 것 같단 말이지. 근데 내용이…!’, ‘뭔가에 쫓기는 기분을 잔뜩 느꼈어. 근데 내가 뭐에 쫓겼더라?’ 같은.

    나의 과거지사도 그러하다. 이미 꿈처럼 아득히 멀어진 일이라 기억나는 것은 소수일 뿐, 대체로 ‘그랬던 것 같아…’의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렇다면 전 편에서 내가 적어 내려간 것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어떤 시각으로 보면 반은 진짜고 반은 가짜일 테다. 아니, 굳이 말하자면 모든 것이 가짜일지도.

    사람들은 자기만의 시각을 갖고 있다. 꼰대처럼 굴지 말고, 개똥철학 좀 넣어두라는 핀잔은 그래서 존재감이 있다. 개인의 철학은 왜 툭하면 무시당하는가? 우리는 사실 서로의 시각이 다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겪은 세상은 당신이 겪은 것과 같지 않다’는 것을 가슴으로 느끼는 탓이다.

    2편과 5편에 걸친 나의 세상도 그러하다. 언니가 기억하는 세상, 엄마가 기억하는 세상, 아빠가 기억하는 세상은 모두 다를 것이다. 내가 적어 내려간 에피소드의 어떤 부분은 아예 그들의 세상에 존재조차 하지 않는단 것이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세상이 없던 것이 되는가?

    내가 살아온 삶은 지나간 것 위주의 삶이었다. 잘 기억나지 않는 사건들을 어떻게든 기억해내라고 다그치는 삶. 못하는 것을 붙들고 자꾸만 해내라고 다그치는 삶. 이런 깨달음들은 야속하게도 서른 살의 어느 날 거울 앞에서 매무새를 다듬는 찰나의 순간에 찾아오곤 한다.

    이제는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나는 지난 시간 마음병 환자로 살았다. 마음병 환자의 대표적인 증상은 부정적인 상념에 지나치게 골몰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엔, 자신이 곧잘 쓰는 표현으로 ‘머리가 좀 커지고’ 나서 내 마음이 왜(Why) 아픈지 고민했고, 그러다보니 왜냐하면(Because)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곤 했다. 

    ‘우리 집은 왜 그 모양 그 꼴이었을까. 왜냐하면 … 했기 때문일 거야.’
    ‘엄마와 아빠가 나에게 왜 그런 행동들을 했을까. 왜냐하면 … 이기 때문이지.’
    ‘나는 왜 태어났을까. 왜냐하면 … 때문이야.’

    그러나 ‘왜냐하면’ 뒤에 따라붙는 ‘…’이란 공백을 채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때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 아는 바로는 어쨌든 이유란 모두에게 있어 다르므로 명확한 답이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알든 모르든 그것은 적용된다. 나 혼자 만들어낸 사건들이 아닌데 어찌 그것이 ‘이것 때문이다!’라고 확답내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야말로 출구 없는 미로에 빠졌다.

    게다가 사람은 보통 신경 쓰이는 일이 있을 때 시야가 좁아진다. 난 마음의 고통을 감내하는데 내가 가진 거의 모든 에너지를 사용했기 때문에 세상에 얼마나 많은 회색 영역이 존재하는가를 둘러볼 여력이 없었다. (회색 영역도 좋고, 쿠션 영역도 좋고, 무지개 영역이라 불러도 상관없다.)

    그저 모 아니면 도, 정답 아니면 오답, 흑 아니면 백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더욱 나는 ‘왜냐하면’의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삶 속의 깨달음들은 그런 식의 접근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에겐, 그리고 여전히 일정부분 지금까지도 그러한 방식이 내게 가장 효율적이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죽음을 택하기보다는 세상에 머무르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니까.

    나는 이 에세이의 첫 편에 나와 같이 마음병에 걸려 앓는 자들에게 위로가 되고 싶다는 말을 썼다. 그리고는 바로 다음 편에서 내가 아팠던 이야기들을 꺼내놓았지. 2편을 쓸 때만 해도, 어째서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는 사람이 지 얘기부터 잔뜩 꺼내놓는가, 그런 내 모습에 의문이 있었다. 연대를 하겠다는 건가, 동정을 해달라는 건가. 애매한 딜레마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6편에 와서 배운 것은, 내 안의 것들이 정돈되지 못한 채로는 누구도 위로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에세이를 통해 내가 최후의 보루처럼 간직해온 이야기들을 툭툭 털어냈다. 이제는 느낌만이 남은 나의 기억들을 갈무리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필요가 있었던가 보다.

    ‘내가 그때 참 힘들었는데, 기억이...’

    글을 써내려가면서 내 느낌들은 더욱더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무너뜨려갔다. 마치 꿈처럼. 꿈  속에서는 그 어떤 것도 실제적으로 나쁠 수 없다. 기쁠 수도 없다. 꿈이 깨면 모두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저 애매모호한 느낌만이 남는다.

    주폭에 능하고 툭하면 바람을 피워 바깥살림을 한 아버지, 정서적으로 나를 학대하는 어머니, 내게 무관심한 언니, 할머니… 글을 쓰기 위해 지난 기억을 복기하다 문득 이제는 모두가 내게 꿈속의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의 서두에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우리는 웬만해서는 전날 꾼 꿈을 잊은 채 하루를 살아간다는 점이다. 혹은 하루를 살다보니 꿈을 잊기도 한다. 아침에 막 일어났을 때 그 꿈의 내용이 얼마나 선명했든지 간에. 세상의 많은 꿈들이 우리의 바쁜 하루 속에서 증발한다. 마찬가지로 이 모든 아픈 기억들 또한, 제아무리 선명할지라도, 결국 ‘지금’의 내 삶 속에서 조금씩 희미해진다.

    그렇다. 기억은 지금의 우리에게 그저 꿈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꿈은 더 이상 내게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하지만 지나간 꿈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면 결국 꿈은 실제의 경계선을 넘어온다. 눈앞의 현실을 가려버리고 내가 지금 이 순간을 살지 못하게 만든다. 아무리 맛있는 디저트를 먹어도 맛을 느낄 수 없다. 마음이 담긴 선물을 받아도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도 모르는 새 이미 알고 있었던 그 패를 꺼내야한다.

    「꿈은 꿈의 세계로 보내주자」
    「나는 내 세계에서 내 삶을 살자」 

    보다 더욱 인간스러운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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