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오직 사랑만이 필요했던 세상
- 이밈달의 낯선 세상: 이밈달
- 2022. 1. 13. 14:00
나는 20대 초반 아주 일찍부터 결혼을 꿈꿨다. 만나는 애인마다 이만하면 결혼할 재목인지 나름대로 늘 따져보았다. 스물한 살에는 엄마 앞에서 만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며 호들갑을 떨다가 등짝을 맞기도 했다.
스물부터 스물넷, 짧다 하면 짧고 길다 하면 긴 5년이라는 시간. 나는 해마다 다른 사람을 만났다. 마음 곳곳이 여전히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해 활활 불타고 있었으므로 누군가와 오래 관계를 이어가는 일이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연애를 멈출 수 없었는데, 그것에는 필사적인 이유가 있었다.
바로 애인을 사귀게 되면서 처음으로 안전하게 보호받는 기분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연애란 내가 꿈꿔온 무조건적인 사랑에 걸맞은 훌륭한 시스템이었다. 내 감정을 알아달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결국 소리 없는 아우성에 그칠 뿐이었던 서러움의 시간이 마침내 끝나는 듯 보였다.
그 시절 애인이란 내게 부모이자 친구이자 세상이었다. 오버를 조금 보태서 거의 구세주를 만난 기분을 느꼈다. 생활시간표는 거의 애인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들과의 시간이 어떤 것보다 늘 먼저였다.
그랬던 내가 이런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은 스물다섯 되던 해 3월이었다. 스물넷이 끝나갈 무렵,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와 더불어 사회에서 알게 된 사람들까지, 내가 맺은 사람관계는 철저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졸업 후 들어간 첫 직장에서 간신히 1년을 채우고 도망치듯 퇴사했다. 회사에서는 한 명의 애인을 만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관계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내가 끊고 싶다고 끊을 수 있는 관계도 아니었으며, 한번 끊게 되면 다시 연결하는 데 전보다 더 큰 에너지가 필요해 보였다.
그동안 나는 이별을 결정하면 상대에게 가차 없이 통보하고는 모든 연락 수단을 철저하게 차단했다. 일말의 죄책감도, 미련도 없었다. 내게 연인은 동아줄과 같았으므로 줄이 끊어지면 곧장 새로운 동아줄을 찾아내 연결하면 그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 이상했다. 그동안의 방식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거짓말까지 불사하며 도망치듯 회사를 그만뒀고, 최후의 방어로 휴대폰 번호를 바꾸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신적 고통이 깊어질수록 인지의 파도 또한 거세게 몰아쳤다. 사회 속에서 바라본 내 모습은 맺고 끊음에 몹시도 서툴렀다. 내가 저지른 퇴사였지만 정작 그 일을 감행한 나조차도 이런 방식은 뭔가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또한 나는 그런 내 모습 속에서 연인들과 금세 헤어지고, 새로운 사람과 만나버릇하던 나의 과거를 보았다. 알게 된 이상 모른 척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곧이어 나는 대학교 4학년 말부터 만나오던 같은 학교 사람과도 헤어짐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때의 이별은 그동안 반복해온 여타의 이별과는 무엇인가 결이 달랐다. 그에게 헤어짐을 고하기 위해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옷을 모두 챙겨 입고도 현관문을 나설 자신이 없었다. 온몸을 바닥에 구겨놓고는 서럽게 울었다. 오늘 내 손으로 이 동아줄을 끊어버린다면 아마 당분간은, 아니 어쩌면 평생, 더 이상 새로운 줄을 찾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서 관계를 맺고 자연스럽게 유대감을 쌓는다. 그리고 그 유대감은 개인의 마음이나 일상생활의 밸런스를 안정적으로 조절해주는 요소가 된다. 또한 삶은 언제나 좋은 것과 싫은 것을 함께 끌고 온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 유대감을 얻기 위해 건강한 관계를 쌓아가려면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 역시 마주하고 겪어내야만 한다.
그러나 사람들과 관계가 깊어지며 갈등을 만나는 것은 내게 견디기 어려운 큰 일로 느껴졌다. 타고난 낙천적 성격으로 인해 사람들과 그럴싸하게 어울릴 줄은 알았지만 실제로 마음을 열고 관계를 맺는 일에 서툴렀다. 때문에 인스턴트식품을 섭취하듯, 관계를 더 이어가려는 노력보다는 새로운 사람을 찾았던 것이다.
그렇게 스물다섯의 3월이 지나가고, 4월. 나는 특이한 일을 겪게 된다. 본래 나는 책과 친하지 않았다. 1년에 한 장을 읽을까 말까 한 사람이었다. 그때 친구를 따라 처음으로 북카페에 방문했는데 거기서 어떤 책을 한 권을 발견한다. 책장에는 수백 권이 넘는 책이 있었지만 유독 더 예뻐 보이고 더 눈에 들어오는 책등을 가진. 그리고 나는 바로 그 책을 샀고 며칠 만에 다 읽어버렸다.
일주일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책 한 권을 몽땅 다 읽었다? 그때의 내게는 거의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또한 그러한 변화의 한가운데 있을 때에는 삶의 맥락을 알지 못했으나 지금 와 둘러보면 아마도, 퇴사와 이별을 겪으며 나에 대한 문제를 인지하게 되자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삶의 페이지가 넘어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안녕 주정뱅이’, 여러 개의 단편이 묶인 권여선 작가의 소설집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지극히 한국적인 삶에 대해 자주 썼고 덕분에 글을 읽는 데 익숙하지 않은 나도 생각보다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특히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나가는지에 대한 담담하고 치밀한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담백하게 다가와 내 마음속 빈 감정방울을 채워주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의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 되면서 나는 더 이상 공허를 채우기 위해 애꿎게 타인을 희생시킬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한동안 도장 깨기 하듯 권여선 작가의 책을 찾아 읽었다. 개중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들도 있었지만, 어찌됐든 읽어냈다. 나는 그 작가가 글을 쓰는 방식이 좋았고, 그러므로 일단 끝까지 읽어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절대 중간에 책을 팽개치지 않았다. 이런 것도 갈등과 해결이라고 볼 수 있다면, 손톱만큼이라도 진일보했다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당시 나는 사람의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하는 글을 좋아했고 마침 아는 사람에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일부를 얻게 되면서 고전문학을 접하게 되었는데, 아주 오래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표현된 사람의 심리묘사는 특별히 지금의 우리와 다른 게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사람이 자신에 대해 사유하는 방식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비슷했다. 옛날 사람이라고 무조건 현명한 것도 아니고 지금 사람이라고 특별히 더 진보적이지도 않았다. 나의 감정에 대한 호기심은 점차 인간 감정의 근본적인 원리에 대한 궁금증으로 커져갔다. 곧 나는 교양서적에도 눈을 돌려 특히 정신분석에 대한 책들을 닥치는 대로 사서 읽었다.
그렇게 스물다섯부터 나는 사람을 멀리하고 책을 가까이 했다. 그런데 잘 보면 결국 대상만 바뀌었을 뿐 나는 또 다시 사랑에 빠진 듯했다. 대학교 때 복학생 오빠가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너 그것도 병이야.’ 해마다 애인을 바꾸고 나타나는 내게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건네던 말이다. 평소에 주변 사람을 무시하거나 선을 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 말은 내게 고이 남아있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병에 걸린 듯 연애를 멈추지 못했던 그 시절이, 삶이 내게 준 친절한 수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몰랐을 것이다. 내 안에 이토록 복잡한 응어리가 있다는 사실을. 결국 사람은 사랑을 하기 마련이다. 이유는 없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고, 사랑은 그 사회적 관계 맺기의 핵심 방식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배웠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부터 사랑하고 아껴주어 스스로와의 관계를 곱게 맺는 것이 첫째다. 그리고 나를 아껴줬던 것처럼 주변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일이 둘째다.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고. 만약 자식을 낳게 된다면 그 아이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그러하였듯 나의 부모님 또한 자신의 부모님에게 건강한 관계 맺기를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줄 수 있는 것이 이런 것들뿐이었겠지. 엄마가 언니를 낳았던 스물여섯을 지나고 보니 젊은 날 그들의 분투가 더욱 크게 다가온다.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그들을 마냥 증오할 수 없어졌다. 내가 내 부모의 부모가 될 수 있다면 욕하고 소리치던 그들을 서둘러 품에 끌어안고 토닥여줄 것이다.
심리학자들이 쓴 책을 읽고 배운 것이 있다. 사랑하는 방법은 어른이 되어서도 충분히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은 어디서 마법처럼 생겨나거나 타고나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를 위해 아침마다 물 한 잔을 챙겨 마시는 행위, 고생한 나에게 초콜릿 한 쪽을 먹여주는 행위 같은 사소한 실천이 쌓이고 쌓여 생겨나는 것에 가깝다. 누구든지 만들 수 있고 경험할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스물다섯부터 스물아홉까지의 5년 동안 내가 집중한 것은 오로지 사랑이 필요한 아이, 나 자신이었다. 나는 나 자신과 관계를 맺으며 사랑을 다시금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막히지 않을 것 같았던 마음의 구멍이 조금씩 메워지고 있었다.
'이밈달의 낯선 세상: 이밈달' 카테고리의 다른 글
7. 벽 너머의 세상 (0) | 2022.02.17 |
---|---|
6. 꿈속의 세상 (0) | 2022.01.27 |
4. 임주연의 세상 (0) | 2021.12.30 |
3. 눈 가린 자의 세상 (0) | 2021.12.16 |
2. 또라이들의 세상 (0) | 2021.1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