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벽 너머의 세상
- 이밈달의 낯선 세상: 이밈달
- 2022. 2. 17. 13:12
종종 내가 쓴 글들을 읽어보려다 실패한다. 모든 글이 결국 내가 붙들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던, 달콤 쌉쌀한 꿈이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의 서툰 몸부림을 마주하는 것이 아직은 어려운 탓이다.
공개적인 곳에 무언가를 쓴다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나는 그런 점에서 일면 좀 미친(?)구석이 있는 것 같다. 누가 묻지도 않았건만, 호기롭게 내 어린 시절의 치부라면 치부일 수 있는 이야기들을 잔뜩 써내려갔다. 내가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한 거지? 나는 요즘 매일같이 이런 생각에 시달리고 있다.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거야?’라거나 ‘얘는 뭔데 글을 써?’ 혹은 ‘자아비대증 말기로군.’ 같은 식으로 나를 비웃을까 봐 두렵다. 그러나 한편으론 나 자신에게 이런 말도 자주 한다. ‘예술가가 되고 싶다더니, 이제야 네 자릴 찾았구나. 너 정말 대단해!’, ‘예술은 카테고리에 국한되지 않아! 하고 싶은 걸 하는 너 진짜 멋져!’ 같은 말.
천사, 그리고 악마와 함께 사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싶다. 나는 글을 쓰면서 스스로를 믿는 방식을 배워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나의 글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언제나 한편으로는 지극히 부끄럽다. 하지만 이미 글은 올라갔으므로 나는 엎질러진 물을 뒤로 하고 새로 엎지를 물을 떠야만 하는 것이다. 난 고양이가 아닌데… 떠놓은 물만 보면 왜 이렇게 엎지르고 싶어지는 걸까. 하하.
나는 여전히 내면의 똥을 치우느라 고군분투 중이건만 SNS를 볼 때면 나만 빼고 다들 참 잘 사는 것 같아 보인다. 글을 쓰지 않는 시간에는 유난히 롤러코스터를 타는 스스로의 감정기복과도 상대하며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 때로는 이게 전부 무슨 짓인가 싶어져, 자문한다. ‘주연아, 일 벌리지 말고 그냥 얌전히 살면 안 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왜냐하면 쓰고 싶기 때문이다. 에세이라고 칭하는 것도 부담스러웠지만, 편의상의 분류일 뿐이라고 나 자신에게 양해를 구했다.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이제 자답한다. ‘아니, 나는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
근래에 글을 쓰다가 깨달은 것인데, 나는 '~하는 척'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아팠던 척(아프긴 아팠는데 약간 과장해서 생각하는 면이 있다. 투정부리기 위한 명분이라도 찾는 것처럼.), 깨달은 척(깨달은 것이 아주 없는 건 아닌데, 뭐, 대단한 인생의 장애물을 넘기라도 한 듯 힘을 주는 경향이 있다.), 마음 따뜻한 척(정이 많은 스타일이긴 하나 속으로는 무관심하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스타일이다.) 말이다.
결국 이런 ‘척’ 지향적 태도는 내가 나 스스로를 부족한 사람이라 여기고 그것을 숨기며 살기 위해 택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 습관대로 글을 쓰고, 완성된 글은 내 안의 모순을 직접적으로 마주할 수 있게 한다. 내가 내 글을 보며 느끼는 부끄러움은 언제나 비밀리에 간직해온 내면의 모순을 전시하고 만 것에 대한 수치심인가 보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모습이 나 자체임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책임을 가져가야겠지.
뭐, 이제와 새삼스럽게도, 나는 상당히 속이 꼬인 사람이라 고백한다. 아니, 꼬였다기보다는 자아 인식이 상당히 약한 편에 가깝다. 어떤 날에는 현자처럼 마음이 넓어질 때가 있고, 어떤 날에는 심통이 난 5살짜리 아이처럼 안하무인에 제멋대로이기도 하다. 대체 누가 진짜 나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변덕스럽고, 고집쟁이다. 그러니 글이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전편에 저 글은 대체 누가 쓴 거야?’
내 안에는 어린 아이가 있다. 뜬금없는 부분에서 질투를 느끼고, 누군가 내게 무심한 태도를 보이면 어떻게 네가 나에게 이런 식으로 대할 수 있냐며, 수동적인 중세시대 귀족 자녀 같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서러움에 취하기도 하는. 그 아이는 자신이 얼마나 아팠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좋아한다. 누구도 자신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지 않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내 안에는 아팠던 만큼 성숙해진 사람이 있다. 나의 절친한 친구 소설가 위단비에 의하면 나는 '마음의 사람'이다. 게다가 너무나도 사랑받고 싶은. 어린 시절 사랑을 위한 내 노력은 오히려 나를 다치게 했다. 마음의 벽이 높아졌다. 사람과 세상,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기준이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는 말이다. 나는 마음의 사람인데, 마음으로 소통할 수 없는 길로만 자꾸 걸어갔다. 다 내가 부족해서라고, 더 완벽해야지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고, 오해하면서. 그리고 이 사람은 이제 그런 오해는 필요 없다는 것을 아는 이다.
이처럼 글을 쓰면서 나를 돌아보는 일은 ‘다리가 저린 상황 속에서도 할 일을 하는 것’과 같다. 다리가 저린데도 앞으로 걸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해야 하는 일이 있으므로. 그리고 걷다보면 언제 저렸냐는 듯 다리는 멀쩡해질 것이다. 아니, 다리가 저린데 왜 걸어야 하냐고? 앉아서 쉬라고? 안타깝게도 마음의 세상에서는 다리가 저릴 때 걷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다리가 저린 일이 잘 없다.
다시 한 번, 이 에세이는 내가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개중에는 자신에 대해 치열하게 탐구할 필요를 못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내 글을 읽는다면 아마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나처럼 자아 인식이 약하고 정서적으로 혼란스러운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쓴다. 글을 쓴다는 것보다 전시한다는 것에 가깝게 느껴진다. 실은 나 혼자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걸 확인받고 싶은 마음도 있다. 나는 외로우니까 글을 쓰기도 한다. 첫 편에 독자들을 돕고 싶다고 말한 것은 사실 나 자신도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다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사랑을 받고 싶으면 벽에 문이라도 내줘야지, 문짝하나 없는 벽 너머에 내가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아, 나는 너무 오랜 시간 고립되어 있었다. 이 글을 읽는 그대 역시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내가 보기에 내 글은 너무나도 부족했지만, 단비가 용기를 줬다. 단비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그대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다. 내가 겪은 일들은 비유를 하자면 간이 매우 짠 음식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자꾸만 이야기하고, 바깥으로 표현하고, 나눌수록 담백해진다. 담백하게 생각할수록 끝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우리는 나 말고 다른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물론 남을 해치고, 물건을 훔치고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의 최종적인 목표는 인간들 틈에서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니까.
이 선을 지키지 못했다간 감옥에서 비인간적으로 살게 된다. - ‘내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담백해질 자유가 있다. 세상과 건강하게 소통하며 풍요로운 삶을 살 자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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