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부재중인 방> 리뷰/ by 희음

부재중인 방과의 경합으로서의 독백

- 고해종 극·연출 <부재중인 방> 에 부치는 너무 이르거나 늦은 엽서


   

    이 연극은 하나의 좁은 방을 무대로 삼고, 그 무대 위에서 말을 이어나가는 한 여자를 유일한 등장인물로 삼는다. 여자에 대하여 우리가 단번에 알 수 있는 사실은, 여자가 취업 준비생이며 원룸에 세 들어 살고 있다는 점이다. 여자는 일상을 이어나가는 일조차 육중한 짐처럼 느끼고 있다. 먹고 자고, 살고 움직이는 일조차 버겁게 느끼는 존재. 너무 가벼워서 자신을 둘러싼 다른 모든 것들을 너무 무겁게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 


    하지만 여자에 관한 이 특별한 수사는 이제 더 이상 특수한 것이 아니다. 이 시대의 청년, 특히 여성 청년에게 시간의 무게는 가늠할 수조차 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 청년은 청년 담론의 구겨진 페이지에조차 이름이 기입되지 못하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이름을 얻지 못한 자의 말과 글자는 어디에서 떠돌고 있을까. 필연적으로 숨겨지고 지워질 수밖에 없는 그곳, 그 시간 속에서 그는 어떻게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나. 그렇게 삭제되고 말 위험 속에서 그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이 연극이 그에 대한 하나의 질문을, 어쩌면 대답의 자리에 놓일 수 있을지도 모를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라 보았다. 더불어 그 질문이 이 세계에 던져진 인간 보편의 차원으로 확장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지, 그 열어젖힘의 고리는 무언지 궁금해 하며 글을 따라와 주기 바란다. 



    여자의 독백, 독백의 여자


    그리하여 한 여자가 맨발로 걸어 나온다. 독백을 데리고. 연극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런데 극의 마지막도 처음과 다르지 않다. 걸음의 방향만 바뀌었을 뿐, 같은 장면이 되풀이되고 겹쳐지는 것이다. 마치 자신의 다음 독백을 마중 나가듯, 다음 순간의 독백을 끌어당기듯, 강약, 강약, 강하고 여리게, 여리다가 점점 더 세게······. 


    독백의 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여자가 있다는 이야기다. 독백이 여자를 삼켜버린 듯도 하다. 여자가 독백을 데리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독백이 여자를 데리고 나오는 셈이다. 이렇듯 끝도 없이 스스로에게 겹쳐지고 접붙여지는 독백의 장면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나. 


    그 장면에서 나는 한 존재가 겪는 이중의 소외를 본다. 시간으로부터, 그리고 동시에 공간으로부터도 밀려난 존재의 이야기 말이다. 독백이라는 형식과 독백의 내용을 통해 그 존재가 자신이 잃은 것이 무엇인지를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그 독백은 동시에, 잃은 것, 혹은 잃어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항하여 자신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독백은 말하기이며 말의 ‘있음’이며 허공에다 제 성대의 떨림을 쏘아 올리는 것이며, 또 독백은 그 스스로를 ‘있게’ 하려는 몸짓이므로. 시간과 공간을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몸부림이자, 부재중인 시간과 부재중인 공간에 대한 저항에 다름 아니므로.


    저항은 보잘것없고 허약했지만 무척이나 끈질겼다. 그치지 않고 실패했던 것. 하지만 그런 실패를 거듭하기로 작정한 것이 누구인가에 따라 그것은 하나의 성공일 수도 있지 않을까. 



    부재중인 시간에 대하여


    독백 못지않게 도드라져 보인 건 독백의 장소였다. 극의 무대가 되는 곳. 여자는 분명 그곳을 방이라 부르고 있지만 아무래도 그렇게는 보이지 않는다. 길고 텅 빈 공간, 그것은 그저 지나쳐 가거나 통과해야만 할 후미진 골목 혹은 복도에 더 가깝다. 누구라도 길게 머물지는 못하는 곳. 누구라도 그곳에 살림을 차릴 수는 없을 것 같은. 그런데도 여자는 그곳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하루 종일 피로에 절어 있다가도 막상 자려고 누우면 잠이 오질 않아. (···) 한참을 괴로워하다가, 이러다 죽는 게 아닐까 싶을 때쯤 설핏 정신을 잃는 아주 짧은 시간. 화들짝 놀라면 그렇게 하늘이 밝아 오더라.


    하지만 이런 독백은 ‘살고 있음’에 대한 말이라기보다는 ‘죽어 있음’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좀처럼 잠들지 못하는 불면의 삶이란, 내일 다시 새 것으로 떠오르는 태양의 리듬을 좇지 못하는 삶이니까. 갱신되지 못한 채, 아프고 지친 몸을 죽음처럼 질질 끌고 가야 하는 삶이니까. 그러므로 여자의 시간은 죽음의 시간에 다름 아니다. ‘부재중인 시간’인 것이다.


    하지만 여자가 멈추지 않고 독백을 이어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죽음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고 있는 자신의 시간을 이렇게라도 해서 건져내려는 노력의 거듭됨이, 다름 아닌 독백의 형식으로 드러난 것은 아닐까.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시간은 많으니까. 무슨 얘기든지 상관없겠지. 일단 내뱉은 뒤에 적당히 늘어놓으면 무엇이든 그럴싸한 이야기가 되는걸. 아니면 어렵고 멋들어진 말들을 덕지덕지 계속해서 얹어나가도 되지.


    바로 이렇게 말이다. 부재중인 시간 위에 말들을 얹어 나가는 일. 말들을 이어붙이고 말의 탑을 쌓아올려 시간 안에 스스로를 기입하려는 일. 아니, 없는 시간을 찢고 시간을 열어 재생시키려는 일. ‘독백’이라는 말의 ‘있음’을 통해서 바로 그 일을 하려는 것이다.


   

    부재중인 공간에 대하여


    여자가 ‘지금’ 말하고 있음을 읽어내는 것과 동시에, 바로 ‘여기’에서 말하고 있음을 언급하는 것도 중요하겠다. 전자가 부재중인 시간에 대한 저항이라면 후자는 부재중인 공간에 대한 저항일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살고 있어. 이젠 버릇이 되어 버려서, 나도 모르게 가끔 집이라고 불러버리기도 하지만, 사실은 빌린 방이야. 내가 사는 곳은 바로 여기야. 내가 이런 곳에 있는 건 아주 오래된 일이라서, 한 삼 분쯤? 그 정도면 거기가 어디든 마치 내가 항상 있었던 곳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여자의 목소리에는 깊은 슬픔이 베여 있다. ‘여기’에서 살고 있지만 그곳은 잠시 동안만 빌린 방일 뿐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빌림’은 여자에게 너무 자주 있는 일인지라 여자는 그렇게 빌린 방을 원래부터 자신의 공간이었던 척 하는 데에도 능숙하다. 그러나 이런 능숙함은 자기기만 능력에 불과할지 모른다. 더욱 아픈 것은 그것이 자기기만임을 여자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알고 있음에도 그리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버린, 강제된 능력이라고나 할까. 


    빌린 방에서 여자는 이따금 옆집으로부터 풍겨오는 냄새에 집착하기도 한다. 그것이 돼지고기인지 오리고기인지, 양념해서 구운 고기인지 소금만 뿌려서 구운 로스구이인지도 구분할 수 있다. 섬세하고 엄밀하게 가려낼 줄 아는 것이다. 그런데 냄새 맡는 일 역시 여자에게 있어 또 하나의 ‘강제된 능력’인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여자는 정작 자신에 관해서는, 어떤 냄새도 남기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모든 방에서는 냄새가 나기 마련이지만 내가 베고 덮은 베개와 이불에서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을” 거라고 중얼거리면서. 이런 혼잣말은 곧바로 자신을 “이력서에 적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으로 의미화하는 일로 이어진다.


    이력서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온갖 이력들의 쏟아짐으로 인해 심사 프로세스에 과부화가 걸리기 십상인 시대에, 여자는 자신에 대해 기록할 것이 너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숱한 존재들의 냄새로 인해 여자는 상대적으로 더 지워지는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이미 죽은 것들조차 냄새를 풍기는데 자신에게는 냄새가 없다며.


    냄새와 얽혀 있던 여자의 ‘이력’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극의 끄트머리에 가서는 ‘사진’에 대한 은유적 독백으로 전환되기에 이른다.

 

내일은 반드시 이력서를 써야 해. 사진을 찍어야 하겠지. 사진에는 누가 있을까?


    이 말은 내게, 여자의 가장 깊은 곳에서 검게 출렁거리던 슬픔이자, 극이 아껴놓았던 절정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분명 카메라 앞에 섰고 포즈를 취했고 사각의 프레임 속에 자신을 담았는데, 인화된 사진 안에는 ‘내’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 ‘이 방-바로 여기’라는 뚜렷한 공간 안에 내가 분명 기거했음에도 불구하고 머잖아 그 방에는 내가 없을 것이며 내가 있었던 흔적조차 사라질 것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은 이야기.


    물론 이에 못지않게 비극적인 것은 여자가 냄새조차 풍기지 않는 사람이라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 사라지지 않고 ‘여기’에 있는 동안에조차도 흔적을 남기지 못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은 여자에게 있어 처음부터 예비되어 있던 불가능성의 기본값인지도 모르겠다. 공간이 부재중일 때 그 위에서 ‘있음’을 축적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런 비애와 한숨이 극의 후반 즈음에 가서는 조금 다른 뉘앙스를 띄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정말 안 될까?

“엿이나 먹어. 닥치고 내 얘기 잘 들어. 여기가 내 방이다.”

한 번이라도 제대로 말을 하고 싶다. 자고 싶다.


    여기가 내 방이라 말하고 싶다는 바람에 대해 여자는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여자는 이미 그 바람의 말을 말로써 내뱉었다. 거칠게, 체중을 실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가 내 방이다.”라고. 말을 한다고 해서 당장 그 방이 빌린 게 아닌 진짜 여자의 방이 되는 건 아니겠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다는 소망만큼은 여자 스스로 이룬 셈인 것이다. 이 기세를 몰아 극의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무엇인가를 잃는다는 것, 아니 애초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꼭 불행한 것만은 아닐지도 몰라. 부재에도 향기와 힘이 있겠지.


    처음부터 아무것도 갖지 못한 이에게는 ‘잃는’ 일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 지난날뿐 아니라, 다음 순간, 나중, 미래 같은 것도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때 남는 것은 다만 지금 무엇을 하는가이다. 내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일시적으로 공간은 열렸다가 닫히고, 닫혔다가도 열리게 되는 것. 그렇다면 여자의 이 끝나지 않는 독백은, 없는 공간을 열어내는, 희망 없는 희망의, 실패 없는 실패의 과정으로 읽힐 수도 있지 않을까.


    이것은 우리 모두의 독백이 아닐까


    여자의 독백은 부재에 관한 것이지만 그때 ‘부재’는 최종적인 도착점이나 목적지로 설정되어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의 독백은, 옹알이처럼 입안에서 ‘부재’를 굴리고 ‘부재’를 디딤돌 삼아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이야기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이 극을 방 없고 기댈 데 없는 이 시대의 (여성) 청년에 대한 비유로 읽으면서도, 동시에 죽음이라는 한 끝을 끌어안은 채 이 세계에 던져져야만 했던 우리 모두에 대한 이야기로 읽는 이유이다. 부재하는 시공간에 대한 상상을 멈출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그런 슬픔의 상상 위에서도 생을 ‘온몸으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이니까. 어쩌면 그 슬픔의 상상 위에서만 우리의 독백은 더 깊고도 먼 곳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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