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서평 / by 꽃씨

항상, 이미 초과하는 서발턴


    인도의 서발턴 여성은 두 번의 디페랑différend[각주:1]을 경험한다. 첫 번째 디페랑은 라나지트 구하Ranajit Guha 같은 인도의 서발턴 역사학자들과 미셸 푸코와 질 들뢰즈 등의 프랑스 포스트구조주의 이론가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두 번째 디페랑은 영국인 남성과 인도 토착민 남성 사이에서 벌어진다. 그렇게 서발턴 여성은 이미 초과되어 있고, 여전히 초과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 유럽중심주의에 맞서는, 또는 근대 이성 주체와 대결하는 ‘늠름한’ 남성들이 있다. 구하는 개량주의적 인도 공산당을 박차고 나와 19세기 후반 인도 농민 봉기를 연구하고, 기록을 남기지 못했던 농민들을 역사의 주체로 재현representation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들뢰즈는 푸코와의 대담 중에 “재현이란 더 이상 없습니다. 행동만 있을 뿐이죠.”[각주:2]라고 말하고, 푸코는 “대중들은 지식인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으며, 알고 있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표현”[각주:3]한다고 답한다. 둘 모두 재현의 문제를 손쉽게 기각해버렸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등록되지 못한 이들이 있다. 바로 서발턴 여성들이다. 서발턴 역사 연구 속에서도 서발턴 여성은 제외되었다. 독립운동을 하는 것도, 농민 봉기에 참여하는 것도, 모두 남성이 되었다. 그렇게 서발턴 남성은 ‘말하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을 재현해 줄 언어를 더듬더듬 찾는 여성들에게, 지식인들은 재현이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일축한다. 여성은 스스로를 재현할 말을 아직 찾지 못했지만, 아무도 여성의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제국주의라는 적과 싸우는 남성도, 근대 주체철학에 대적하는 남성도 스스로는 ‘투명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그들이 사로잡힌 이데올로기를 사유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들이 놓친 것, 그들이 누락한 것이 있다. 그것이 드러나는 것만으로도 남성들의 한계와 폭력성이 폭로되는 것이 있다. 그래서 더욱 그것은 말할 수 없고, 말하면 안 되는 것인지 모른다. 


    과연, 서발턴 여성은 재현될 수 있는가? 물론, 재현되어 왔다. 영국 남성들에게, 인도 토착민들에게, 항상 어떠한 제 3세계 여성으로 재현되어져 왔다. 영국 남성들에게 서발턴 여성은 사티sati[각주:4]와 같은 야만적인 풍습으로부터 구해주어야 할 ‘대상’으로 재현되었다. “백인종 남자가 황인종 남자에게서 황인종 여자를 구해주고 있다.” 또한, 인도 토착민들에게 서발턴 여성은 숭고한 의식을 취할 수 있는, 자기희생의 ‘주체’로 재현되었다. “여자들이 죽고 싶어 했다.” 서발턴 여성은 그렇게 쉽게 자유의지를 보유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오랜 전통과 과감하게 단절하는 여성이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사명을 죽음까지 불사하며 수행하는 ‘용기’있는 여성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여성의 자유와 해방을 의미하는가? 여성이 말하고 싶었던 것과 이렇게 재현되는 것은 일치하는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영국인 남성과 토착민 남성이 여성의 침묵을 이중으로 강제한다는 것이다. 첫째,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여성들이 원하는 것인 듯 대치시킨다. 영국인 남성은 미개한 풍습에서 여성을 구해주는 영웅적 남성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또한, 자신들이 인도의 야만적인 풍습을 법으로 금지하고, 인도를 발전시키는 ‘문명화 사명’을 수행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토착민 남성은 자신이 죽었을 때 부인도 따라서 죽기를 바랐을지 모른다. 또한, 인도의 전통이 서구 중심적 ‘문명’이라는 틀로 재단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길 바랐다. 그들은 당차게도, 한 번은 남성으로서, 다른 한 번은 국민으로서 욕망을 가졌다. 따라서 영국인 남성도, 토착민 남성도 서로 대립하는 듯하지만 사실 둘은 동일하다. 자신의 욕망을 여성에게 투영시킨다는 점에서, 여성의 욕망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그 점이 여성의 욕망을 침묵시킨다는 점에서. 둘째, 서발턴 여성들은 이질화되어있다. 하지만 두 편의 남성들에게 모든 서발턴 여성은 그저 제 3세계 식민지 여성일 뿐이다. 제 3세계 여성들의 욕망은 하나로 단일화되고, 대상화되고, 몰개성적이 된다. 이렇게 강요된 침묵 속에, 아무도 여성의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백인종 남자가 황인종 남자에게서 황인종 여자를 구해주고 있다.”는 말도, “여자들이 죽고 싶어 했다.”는 말도, 영국인 남성과 토착민 남성의 말이지, 서발턴 여성의 말은 아니라면, 정말 서발턴 여성은 말할 수 없는 것인가?


    새로운 말하기를 시도한 여성, 부바네스와리 바두리를 보자. 인도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 단체의 일원이었던 그녀는 정치적 요인을 암살하라는 임무를 받았지만 감당할 수 없었다. 그녀는 불륜으로 인한 임신 때문에 자살한 것으로 오해받지 않으려고 생리하기를 기다렸다가 목을 매었다. 그녀는 인도 여성이 수행하는 사티 자살의 숭고함은 수용하지만, 생리하는 여성을 불결하게 여겨 금지시키는 금기에는 도전하는, 이중의 시도를 감행했다. 그렇게 ‘생리하는 몸으로 자살’하는 행위를 통해서, 몸을 글쓰기의 텍스트로 바꿈으로써 말하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몇 세대가 지나도록 들려지지 않았다. 왜곡되거나, 무화되거나, 기각되거나, 그것에 반하는 행위들에 의해 침묵당했다. 이후 부바네스와리를 복원하고 그의 죽음의 의미를 암호 해독하듯 더듬더듬 해석한 스피박의 시도는 과연 성공적인 것일까?


    서발턴 여성의 고유성과 특수한 상황적 지위를 충분히 고려하면서도, 서구 페미니즘이 서발턴이라는 말없는 주체에 도움을 줄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스피박의 시도를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역사 속 어디에서나 여성들은 말하지 못했고, 침묵을 강요당해왔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말하는 여성을 침묵시키는 두 가지 전략이 있는데, 여성을 ‘동물화’시키거나 여성을 그녀의 ‘성별’로 환원하는 것이다. 여성들이 암여우, 암캐로 불리거나, 여성의 말과 행동이 자궁을 뜻하는 ‘히스테리’ 취급을 당하는 것은 우리에겐 ‘일상’이다. 따라서 여성들은 언제나 말하기를 고민한다. 미투 국면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고민한 것도 말하기의 방법, 여성의 말이 사회에서 수용될 (불)가능성이었다. 어쩌면 여성이 말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지 모른다. 세계에는 하나의 이성,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언어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빠지기 쉽지만, 빠져서는 안 되는 유혹들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첫째, 그 일(一)자에 포섭되기를 욕망하지 말 것. 둘째, 그것이 아니라고 해서, 섣불리 두 개의 이성, 두 개의 목소리, 두 개의 언어를 주장하지 말 것. 첫 번째 시도는 현재의 폭력적 구조를 유지한 채 내가 아닌 또 다른 타자들을 방치하는 것이다. 두 번째 시도는 마치 싸우는 형제처럼, 다르지만 동일한 것이 되려는 시도로써, 제 3, 제 4의 끊임없는 차이의 존재들을 억압하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태도는 우리의 “서발터니티를 보존하기”일지 모른다.

    “서발터니티를 보존”한다는 것을 무엇인가? 그 의미는 아마도 추측될 뿐이다. 나는 서발턴인가, 아닌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아닌가? 이러한 문제 제기 속 서발턴은 무엇인지 함부로 규정하지 않는 것. 또한, 손쉽게 가장 약한, 가장 정당한 위치를 점하려고 하지 않는 것. 낭만주의에 빠지지 않은 채, 올바른 목소리가 아니라 ‘다른’ 목소리를 추구하는 것. 말하고자 하는, 혹은 들으려고 하는 다양한 시도, 실패, 미끄러짐, 그 과정 속에서 순간순간 책임을 다하는 것, 그렇게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존재가 되는 것... 이라고 가정해본다. (자기연민, 자기도취, 비현실적 성찰에 빠지지 않은 채, 다른 목소리를 침묵시키지 않고 나조차 다른 존재가 되는 실천을 모색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1. 디페랑/쟁론이란, “두 가지 논의 모두에 적용될 수 있는 판단 규칙의 결여로 인해 공정하게 해결될 수 없는” 갈등의 한 경우이다. 디페랑/쟁론에서는 “어떤 것이 문장화되기를 ‘요구’하지만, 곧바로 씌어질 수 없다는 잘못을 겪게 된다. 이렇게 되면 자신들이 언어를 소통의 도구로 사용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침묵에 수반되는 이러한 고통의 감정을 통해 다음과 같은 점을 깨닫게 된다. 곧 그들이야말로 언어에 의해 호출되며, 이러한 호출은 그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실존하는 관용어들 속에서 소통될 수 있는 정보들의 양을 늘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문장으로 씌어져야 하는 것이 그들이 현재 문장으로 쓸 수 있는 것을 초과한다는 점, 그리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관용어들을 설립하는 일이 그들에게 허락되어야 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쟁론』, 진태원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 2015, 9쪽, 36-37쪽.) [본문으로]
  2. 미셸 푸코, 「지식인과 권력」, 『푸코의 맑스』, 이승철 옮김, 갈무리, 2005, 190쪽. [본문으로]
  3. 위의 책, 191쪽. [본문으로]
  4. 힌두 과부가 죽은 남편을 화장한 장작더미에 올라가서 자신을 불태우는 제의.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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