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팬텀 스레드>의 사랑론 / by 고해종

액체적 사랑의 윤리 

    사랑은 액체적이다. 무엇보다도 사랑을 상실한 때에 이 명제는 우리에게 더욱 선연해진다. 사랑은 변하고, 잡히지 않으며, 야속하게 흘러가버린다. 아무리 그것이 단단하고 분명하게 느껴질지라도 그것은 결코 응고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 아폴리네르는 그래서 사랑을 흐르는 물에 비유했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사랑의 액체성은 인간 존재에 엄존하는 더욱 심원한 불협화음을 증언한다. 한편으로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서 사랑을 필요로 한다.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한계, 인간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상실의 필연성. 사랑은, 불안이라고 명명되는 이 근원적 절망에 맞서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방식이다. 사랑으로 연대함으로써 인간은 언젠가 사라져버릴지라도 자신의 존재가 지속될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근본적으로 고독한 존재라서, 절실한 '나'의 고통, '나'의 불안은 누구와도 온전히 공유될 수 없다. 사랑은 이미 시작부터 실패를 예비하는 불가능한 기획이다. 유한으로 무한을 갈망하며, 순간에서 영원을 포착하려는 처절한 투쟁으로서 사랑. 사랑은, 동시에 발산하고 수렴하기를 요구하는, 인간 존재 자체에 내재하는 현기증 나는 모순을 함축한다.

    그러니까 사랑할 때 도래하는 하나의 역전이 있다. 나를 내어주고 타인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위험한 역전. 롤랑 바르트가 사랑에 젖은 마음을 정당한 비문(非文)으로 표현했듯이, 깊이 젖어든 사랑의 아픔과 함께 우리는 결국 나와 다른 하나의 존재를 온전히 인정할 수밖에 없다. <팬텀 스레드>는 이런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레이놀즈와 알마가 그려내는 사랑의 모습은 일견 기이해 보인다. 어떤 불가해한 광기가 두 사람을 감싸 안고 있으며, 그 치명적인 열정이 그들의 사랑을 단숨에 숭고로 도약시키는 듯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사랑의 미학적 치명성은 광기어린 열정이 아니라 오히려 지난한 인간적 과정 속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우리가 거기에서 숨겨진 실처럼 발견해야 할 것은, 욕망의 비-주체에서 주체로, 나아가 사랑의 주체들로 향하는 성장의 서사이다.

    영화는 알마와 의사 하디의 대화로 시작된다. 이 장면을 통해 우리는 이 영화를 관통하는 정신분석학적 시각을 획득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엄마라는 최초 대상의 결여를 메우기 위해 드레스 만들기의 규칙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을 정립하는 레이놀즈는 정신분석학에서 다루는 전형적인 남성적 주체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는 온전한 욕망의 주체로 존립하지 못한다. 그는 채워질 수 없는 공백에 붙들려 있다는 점에서 신경증자이며, 그것을 끊임없이 소환하고 반복하는 규칙에 종속되는 만큼 강박증자인데, 이 때 절대적으로 승인되는 것은 드레스와 결부된 하나의 저주다. 신탁과 같은 이 저주는 결혼이라는 표면적 형식을 갖춘 욕망에 대한 금지를 선언하는 것으로, 잠재된 여타의 욕망을 억압한다. 따라서 레이놀즈는 주체성을 대리할 뿐, 유일하게 주체적인 것은 꿈속에서 그에게 말을 거는 드레스를 입은 엄마라고 해야 한다. 비록 그가 그 모두를 현실적으로 승화시킨 것처럼 보이지만, 우드콕 하우스 전체의 동일성은 결국 ‘엄마의 드레스’라는 팔루스를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알마는 이 구조적 동일성의 대상으로서 등장한다. 규칙을 어기는 조안나는 더 이상 우드콕의 대상으로 남을 수 없으며, 알마는 조안나를 대신하는 완벽한 대상으로 채택된다. 그러나 대상으로서의 존재는 언제나 자신을 대상으로 삼는 주체에 의존적인 만큼 불만족스럽다. 레이놀즈가 알마의 치수를 재고 시릴이 그것을 리스트로 작성할 때, 알마의 미소 뒤에 어룽이는 쓸쓸함은 그녀의 대상성을 암시한다. 이격은 무의도적이지만 지속적으로 표출된다. 레이놀즈의 미적 기준에 대해 그녀가 취향을 내세울 때, 아침 식사에서 소음을 발생시킬 때, 작업실에 차를 가져갈 때, 알마는 명백히 이질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마는 그것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한다. 레이놀즈의 옷을 입을 때 그녀가 느끼는 자기 충만감이 있기 때문이다. 너무 넓은 어깨, 가는 목, 작은 가슴, 큰 엉덩이 등. 레이놀즈의 옷은 그런 알마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대상으로서 알마는 그래서 차라리 레이놀즈의 질서를 수용하고 그와 동일시함으로써 존재하기를 시도한다. 그녀는 레이놀즈의 패션쇼장의 렌즈 안에서 전이적으로 매혹적 감정에 빠져들고, 자신의 행동양식을 수정함으로써 우드콕의 생활규칙을 수용하는 듯하며, 나아가 그를 대신해서 바바라 로즈의 드레스를 벗겨낸다. 이 때 레이놀즈가 알마에게 하는 키스는 두 사람의 관계에 하나의 방점을 찍는 듯하다. 그러나 다음 날 알마의 텅 빈 눈빛이 보여주듯이 그녀의 존재는 결코 온전히 인정되지 않는다. 레이놀즈는 여전히 아이처럼 엄마에게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가 드레스를 만들면서 욕망하는 것은, 엄마의 욕망 자체이다. 그가 작업의 전후에 배고픔을 호소하고 아이같이 약해지는 것은 자신의 유아기적 고착성을 방증한다. 그러므로 알마는 자신의 주체적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자기 존재 전부를 건 인정투쟁의 과정에 진입해야 하는 것이다. “내 이름은 알마, 여기에 살아요.”

    이제 위반은 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이 레이놀즈를 알기 위한 알마 자신의 방식이므로. 그녀는 레이놀즈와 단 둘만의 식사를 준비하면서, 그가 오일과 소금으로만 간한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버터로 조리한 아스파라거스를 내놓는다. 이 식사를 통해 확인되는 것은 둘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거리이며, 이 단절이 알마의 자리를 마련한다. 레이놀즈가 대표하는 구조의 남성성에 반해 그녀는 무엇보다도 여성성을 체현하면서 하나의 주체로 서고자 한다. 알마가 여성적인 것은 그녀가 생물학적으로 여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구조 바깥의, 예외로서의 팔루스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욕망하는 것은 자기 존재의 주체적 위치, 그 실재이며, 이런 주체는 드레스를 입은 엄마와 경쟁하면서 자신을 대상화하던 레이놀즈라는 실제적 타자의 존재 자체를 다시금 자신이 욕망하는 대상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알마는 엄마를 향하는 레이놀즈의 걸음을 멈추고자 한다. 알마의 독버섯은 레이놀즈의 드레스 작업을 좌절시키고 강제적으로 그를 상실된 최초 대상과 마주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발견되는 것은 레이놀즈의 숨겨진 실, 사실 자기가 저주받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의 결여된 이면이다. 최초 상실의 대상인 엄마는 순전한 그리움의 대상이지만, 그것은 절대적으로 상실된 만큼 말이 없다. 동시에 레이놀즈는 존재론적 위기에 처하게 된다. 애초에 그의 존재 전체가 그 텅 빈 환상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 균열의 지점에서 레이놀즈의 시선은 엄마를 가로질러 알마에게 옮아가는데 이러한 시선의 횡단이 레이놀즈의 주체적 독립을 적시한다. 즉, 알마를 통해 엄마와 새롭게 조우함으로써 그는 최초의 외상으로부터 부과된 욕망의 금지를 파기하고, 그동안 억압되었던 욕망을 주체적으로 회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침내 레이놀즈는 그의 팔루스인 웨딩 드레스 앞에서 알마에게 청혼한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제도는 사랑을 담보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자 욕망의 주체들로서 이 부부는 평행하게 어긋난다. 비록 레이놀즈가 '엄마의 드레스' 만들기를 멈추고 남편이라는 위치를 승인했을지라도, 또 알마가 드레스의 대상에 머물지 않고 아내라는 위치를 차지했을지라도, 그들은 서로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융합시키려는 주체로서 외따로 존재할 뿐이다. 이 때 결혼은 두 주체 사이의 비-관계를 은폐하는 표면적 형식에 그친다. 댄스 파티로 향하는 알마와 그런 알마를 내쫓고자 하는 레이놀즈가 그리는 권태롭고 지겨운 평행선은, 상대방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완전한 대상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오로지 자신들의 삶을 고집하는, 두 주체의 만남에 전제된 근원적 차이의 파국을 폭로한다. 절대로 같아질 수 없는 다른 둘. 사랑은 이 비-관계성을 넘어 도래한다.

    이렇게 도래하는 사랑 안의 두 주체는 상호 주관적이되 상호 의존적이다. 그들은 오직 서로에 기대어서만 자신의 주체성을 정위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주체인 한 자신의 대상을 포기할 수 없고, 스스로 상대방의 대상이 되는 한에서 주체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역설을 그들은 받아들여야만 한다. 따라서 레이놀즈와 알마는 마침내 사랑의 주체들로서 자신의 존재를 위탁할 타자의 존재 자체에 접근하고자 시도하며, 그로써 주체가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사태를, 즉 나르시시즘을 넘어서는 사랑의 주체성을 보여준다.

    이런 사랑의 재발명에 대한 시도는 에로티즘적으로 나타난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을 긍정하는 것.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죽음이라는 초월론적 영역으로 비약하지 않는다. 그것이 삶을 긍정하는 만큼, 사랑은 이 세계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버섯과 함께 녹아드는 버터는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사랑의 액체적 성격을 적확하게 드러낸다. 사랑은 위험한 독성을 지닌 채 녹아드는 것이어야 한다. 레이놀즈는 알마를 확실하게 바라보면서 독버섯을 자기 안으로 삼킨다. 이것은 곧 액체적 사랑의 조건이다. 자신의 존재를 위해 타자를 발견하고, 타자의 발견을 위해 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 용기. 타자에 대한 역설적 경험을 함축하는 사랑의 액체성은 인간의 존재를 향해 지난하게 점근한다.

    그러므로 레이놀즈와 알마는 영원히 서로를 죽일 것이다. 그 반복되는 살해 속에서 서로를 살게 하고 완성시킬 것이다. 함께 아이를 낳고, 드레스를 만들면서 자신들의 사랑을 세계 안에 숨겨진 실처럼 남겨둘 것이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사랑 안에서 서로를 죽일 듯 갈망하는 두 개의 주체를 본다. 그리고 그로써 또한 증명되는 것은 사랑이란 그러한 둘로써 새롭게 구축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 다시 말해 서로에 대한 충실성의 절차가 지속적으로 개진됨으로써만 사랑은 세계 안의 새로운 주체성으로 현시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더 이상 나의 것도, 타자의 것도 아닌 주체성의 전망이자 애써 힘겹게 구축하는 ‘어떤’ 보편성의 교합이야말로 액체적 사랑이 시야에 넣는 것이다.

    사랑은 불안이라는 인간의 근원적인 절망에 맞서 인간의 삶을 추인한다. 그러나 사랑이 소진될 때 이 추인은 더 이상 유효할 수 없다. 삶을 위해서, 사랑은 단순히 소진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자신의 삶을 살면서, 세계 안에서 존재해나감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다시금 추인해야 한다. 사랑이 액체적 양태를 띠면서 삶을 추인하는 만큼, 액체적 사랑의 윤리는 삶으로 다시 그 사랑을 추인하고 증거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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