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마워서 미안해하지는 말자

 

 

   정수 님께,

 

    정수 님, 설 연휴 잘 보내셨나요. 저는 근 반 년 만에 본가에 다녀왔어요. 오랜만에 산에도 오르고, 이제 곧 떠날 채비를 하는 백조들도 보았어요. 어떤 밤엔 동생과 긴 산책을 다녀오기도 했고요. 왜인지 뿌연 밤이었는데, 가로등 불빛 앞에 선 메마른 가지들이 생각나요. 산책 나온 사람도 거의 없어서 그 텅 빈 공간을 미친 듯이 달렸다면 아주 후련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요즘 저는 일상을 견디고 있어요. 뭐든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될 때도 있지만, 때때로 이렇게 벽에  가로막힌 듯한 느낌이 깊숙이 밀려올 때가 있어요. 저를 둘러싼 환경이 영영 바뀌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 매일 경악스러운 뉴스가 쏟아져 나오지만, 저는 그저 정해진 일정대로 일상을 반복하고 있어요. 제가 밥을 먹고 사람들과 웃고 떠들고 잡스러운 콘텐츠를 소비할 때에도 어디선가 누군가가 고통받는 일들이 계속되지만, 손가락으로 기사를 누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제겐 없던 일이 돼요. 이슈 화이팅에 지쳐 점점 뉴스에서 멀어지면서 평온함을 느꼈어요. 계속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누군가는 계속 싸우고 있는데, 멀어지면서 마음이 편해진다니. 혼란스러웠어요.

 

얼마 전 한 친구가 이야기하더라고요. 최근에 중국 정부에 의한 위구르족 인권 탄압에 대한 기사를 읽었는데, 예전에 위구르족이 사는 지역을 여행했던 게 생각났대요. 밤늦게 읽은 기사였고, 다음날 출근을 위해 화면을 끄고 잠자리에 들려고 노력했답니다. 우리는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합리한 사건 사고들에 대해 가장 빨리 접할 수 있는 환경 속에 있지만, 스마트폰을 끄는 순간 그 숱한 사건사고들이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과는 완전히 무관한 일이 되기 쉽다는 사실에 마음이 갑갑했다고 해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신의 말이 어떤 변화를 불러올 수 있을까. 그리곤 제게 묻더라고요. 은수는 페미니즘과 관련한 활동을 하며, 정말 세상이 바뀌고 있다고 생각하냐고요. 포기를 원한다기보단 희망을 원하는 그 눈빛과 물음 앞에 저는 잠시 할 말을 잃었어요. 왜냐하면 저 또한 그 질문 앞에 많이 지친 상황이었기 때문이에요.

 

대단한 운동을 했다고 하기도 힘들고 활동가로 일한 것도 아닌데, 저는 왜 이렇게 지쳐버린 걸까요. 자신의 일상을 돌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거기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억울하고 화나고 슬픈 일들로부터 멀어지면서 오는 안정을 검열하게 돼요. 힘들다는 말조차도 생산적으로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저는 결국 거의 모든 SNS를 중단하게 됐어요.

 

얼마 전 우상호 의원이 성폭력 가해자인 박원순에 대해 공감을 표하며, 적극적으로 2차 가해에 나섰더군요. 기존 남성 정치인이 가졌던 상징 권력과 그의 지지집단을 계승하려는 자신의 욕망에 도취된 그 역겨운 모습... 그걸 가치나 진심이라고 그는 굳게 믿고 있겠죠. 이런 후진 인간들이 계속해서 배설하는 것들을 얼마나 더 목격해야 하는 걸까요.

 

그들에게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로 인해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 느끼고 더 단단해질 때도 있지만이렇게 본래 그 말이 담고 있어야 할 가치가 오염될 때마다 더 적확한 언어를 짜내는 일에 지치기도 해요. 그리고 지친다는 말을 할 때마다 마치 패배를 선언하는 것만 같아서 분한 마음이 들어요. 제가 기대하는 것만큼 자주, 쉽게 이기는 싸움일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요.

 

2020214
은수 드림

 

P.S. 늘 이렇게 바보같이 무너지는 제 곁에 있어줘서 미안하고, 고마워요.  

illust ⓒ 은수


 

멋진 은수 님께

 

    요즘 은수 님이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제가 뭘 하든 도움이 되어 드릴 수 없다는 것도 알아요. 주변에서 아무리 돕고 싶어 해도, 자신을 덮쳐 오는 그 어둠은 결국 스스로 빠져나와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분명 이겨낼 수 있고요. 그걸 잊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은수 님의 지금 상황에 많은 분들이 공감할 것 같아요. 조금이라도 힘이 될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심에 골똘히 생각에 잠겨보기도 했지만, 한심하게도 저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만 들어요. 친구분이 제게 세상이 바뀌고 있다고 생각하냐 물으면 저는 고민 없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거 같고요. 전 저를 비롯해서 세상과 인생, 그리고 인간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어요. 그럼에도 노력하는 게 좋아요. 지금을 위해서, 지금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을 위해서요.

 

전 부끄럽지만 어떤 상황이 힘들어서 버티기 힘들 때는 회피하고 합리화를 해요. 그에 뒤따라오는 죄책감도 이제는 잘 견디고요. ...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하지 않아요. 나름의 계산을 하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죠. 현명한 선택보다는 내가 당장 힘들지 않은 쪽을 선택하곤 했어요. 포기했다고 할 수도 있고, 한심하게 느낄지도 모르지만 전 그냥 제가 대단하고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게 됐다고 생각해요.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과 삶을 위해서 고민하거나, 옳고 현명한 선택을 하기 위해 고민하거나, 세상 모든 부조리에 대한 고민 등 삶은 다양한 고민으로 가득하고, 사소한 것이라도 깊이 생각하고 탐구하는 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보다 조금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게 있어요. 매순간의 소소한 상황들에도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마음이요. 약속을 지키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것, 사랑을 표현하는 것 등등, 지금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아서, 그동안 놓쳐버린 것들이 아쉬워서, 모든 게 곧 사라질 것 같아서 미루거나 거절하고 싶지 않거든요. 그래서 가끔 과부하가 되기도 하고 제대로 못 지킬 때도 많지만 그래도 이런 자세가 제 삶을 조금은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전 이렇게 그야말로 소소한 일상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가끔 제가 은수 님의 어떤 목표에 방해가 되는 친구가 아닐까 고민하곤 해요. 조금 더 유익한 화제로 함께 토론하고 고민을 나누는 멋진 친구가 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고요. 이런 말을 한다면 은수 님은 쓰레기 같은 고민(feat.김혜자)이라고 말하겠죠. 쓰레기 같은 고민을 참 많이 해요.

 쓸데없는 고민할 때 서로에게 꺼내는 짤

저는 티브이를 보다가 불우한 이웃을 위한 후원 광고가 나오면 채널을 돌리기도 해요. 동물을 위한 기부 요청 글을 보면 아주 적은 돈이지만 후원을 하고요.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귀찮아서 플라스틱을 사용하는 반면, 재활용에도 열심이고요. 여성인권과 관련된 부조리한 사건들에 분노하고 속상해도 어디 가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해요. 동물권에 관심이 많지만 모임 같은 데는 나가본 적이 없어요. 그런 저를 두고 비난한다면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저도 제가 너무 모순적이고 비겁해 보여서 괴로울 때가 많아요. 그렇지만 괴로움에 발버둥치다 보면 전부 그만두고 싶어져서 그냥 지금 내가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거라도 하자는 마음이에요. 조금이나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하면서요.

 

이런 모습을 알고 사람들이 실망하거나 비난할까봐 두려워요. 멋지고 좋은 사람이고픈 욕망은 언제나 간절하니까요. 그래도 지금의 저를 부정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얼마나 노력하고 열심히 살았는지는 제가 아니까요. 그리고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괜찮은 것 같아요. 물론 더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비할 수는 없겠지만요.

 

제가 위로한답시고 힘들면 도망쳐도 된다는 말을 하곤 했잖아요. 어쩌면 그 말이 은수님을 더 힘들게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그건 은수님이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는지 알기 때문에 한 말이에요.

 

지금을 이겨내도 또 힘들어질 거예요. 이 우울 역시 앞으로도 또 오겠죠. 때론 약하게, 또 때론 강하게. 그 지겨운 반복이 힘들다 해도, 그래도 조금씩은 나아질 거라고 믿어요. 그리고 그 시간들을 같이 견디면 좋겠어요. 옆에 있게 해줘서 고마워요.

 

모자라지만 힘센 정수가-

 

P.S. 우리 고마워서 미안해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어요.   

illust ⓒ celloph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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