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계속 싸울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기를


    은수 님에게

    요즘 날씨가 많이 더워진 게, 여름이구나 싶어요. 전 여름을 즐기지는 못하지만 여름만의 붉고 푸른 에너지를 구경하는 건 좋아해요. 여름 하면 선풍기를 틀어놓고 TV를 보면서 수박 먹는 풍경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전 길치라서 길을 자주 잃곤 하는데요. 제 어릴 때 뜨거운 여름날 길을 잃어서 헤매다가 가파른 육교를 오르던 중 너무 힘들어서 눈물이 찔끔 나왔는데, 그때 수박을 먹는 그 장면이 머릿속에 가득했어요. 가끔 힘들 때는 종종 그 육교를 오르는 꿈을 꿔요.
    여름밤의 추억들도 떠오르네요. 홍대 놀이터2(라고 우리는 불렀던 공원)에서 친구들과 밤을 새우던 기억이요. 그곳은 바로 제 집 앞에 있어서 저의 주요 서식지였죠. 정말 다양한 사람들과의 추억이 가득해요. 돈 없는 우리의 만남의 장소였고요. 홍대라는 구역 안에 포함된 곳이지만 당시에는 인적이 드물어서 우리만의 아지트 느낌도 있었어요. 전 카페 대신 벤치에 앉아 딸기우유를 자주 마셨어요. 지금은 끊었지만요.
    물론 마냥 좋은 기억만 있는 건 아니에요.
    열대야가 심하던 날 어느 날 밤 늦은 시간에 집으로 향하는데 뒤에서 어떤 남자가 계속 따라왔어요. 종종걸음으로 걸으니 쫒아 와서는 어디 가냐고 물으며 계속 놀이터에서 놀자고 하더라고요. 돈이 없어서 첫차를 기다려야 한다면서요.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지. 전 없는 오빠를 만들어서 오빠가 마중 나오고 있다는 식의 거짓말을 했어요. 이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고 저 말고 다른 여성들에게도 흔할 거예요. 그런 걸 보며 또 누군가는 그러게 왜 밤늦게 다니냐고 하겠죠? 저도 늦은 밤 술 취해서 돌아다니는 그 남자들처럼 늦게까지 놀 수 있는데도 말이죠.
    당당하고 싶어도 이런 경험들 때문에 위축되고 겁이 많아져요. 전 그래도 별일 없었으니 운이 좋은 편이죠. 가까운 제 친구는 갑자기 나타난 남자가 손목을 잡고 끌고 가려고 한 적이 있고, 제 동생 친구는 술 취한 남자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심하게 폭행당한 적도 있어요. 떠올려보니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크고 작은 사건이 너무 많네요. 택시 타는 것도 무서워서 혼자 택시를 타기 시작한 게 몇 년 안 된 것 같아요(몸이 힘드니까 자연스럽게 타게 됨).
    아무리 예전과 달라졌다고 해도 과연 이런 세상에서 여성이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남녀갈등이 심각해진 요즘 분위기나 사건 사고들을 보면 정말 소름끼치도록 이상하고 답답하고 공포스러워요. 개그맨 박나래나 GS 포스터처럼 어이없는 백래시 사건들이요. 도대체 말이나 되나요? 페미니즘 이슈를 “남녀갈등”이나 성별이분법에 따른 편 가르기로 논점을 흐리는 무식한 정치인들에게도 정말 화가 나요.
    아, 또 횡설수설하네요. 이런 속상한 기분을 두서없이 토로할 친구가 있다는 게 참 감사한 일 같아요.
    은수님을 비롯해 주변에 혼자 사는 친구들이 많이 걱정돼요. 영화 ‘도어락’ 있잖아요. 혼자 사는 여성의 공포를 잘 보여주는 정말 무서운 영화인데, 그 영화를 보고 한동안 더 공포에 떨었던 거 같아요. 근데 그 영화에서 위험한 상황을 당한 여자에게 위로하며 한다는 말이, 혼자 살지 말고 빨리 결혼하라는 대사였어요. 기가 차죠? 남자들은 수발들어줄 사람이 필요해 보이면 결혼하라는 소리 듣던데…….

    여름 이야기를 하다가 한참 딴 길로 샜네요.

    몇 년 전 마스크가 필요 없던 여름날 밤에 은수 님과 신촌에서 새벽 심야 공포영화를 보고 땀에 절어 망원동까지 걸어온 기억이 문득 떠오르네요. 많이 피곤하긴 했지만 참 즐거웠어요.

    언제쯤 다시 그런 추억을 만들 수 있을까요.
    지금 이 순간들도 그리운 날이 있겠죠?

    그리움과 속상함에 멈춰있지 말고 시간과 함께 저도 움직여야겠어요.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한 정수가 씀



illust cellophane



정수님에게

 

    정수님, 요즘 날씨가 참 오락가락하네요. 지난주엔 그렇게 더웠는데, 이번 주는 또 비가 내리고 선선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어요. 이쯤 되면 여름이겠지 싶어 옷 정리를 모두 했는데 말이에요. 몇 년 전부터 이상하다, 이상하다 했는데 이젠 정말 기후위기가 피부로 느껴져요.

    저는 겨울보다 여름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기도 하고, 겨울은 어쩐지 생동감이 없어 몸도 마음도 가라앉거든요. 그래서 더워서 헐떡대더라도 분주히 쏘다닐 수 있는 여름의 에너지를 좋아한답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아직 밝고, 늦게까지 거리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소리를 듣는 걸 좋아해요. 이른 더위에 창문을 열어놓은 이웃집에서 올라오는, 밥 짓고 반찬 만드는 냄새도 좋아하고요. 다들 오늘도 살아가고 있구나, 안심하게 돼요.

    제가 겨울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는 집까지 쫓아와 저를 성추행했던 남자 때문이기도 해요. 늦은 밤도 아니었는데, 겨울엔 저녁 8시면 이미 어둑어둑하잖아요. 여느 때와 다름 없이 동네 중간에 버스에서 내려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걸어 집에 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뭔가 이상한 느낌이 있어 뒤를 돌아봤는데,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가 서있었어요. 저랑 나이대는 비슷해보였는데, 그 남자를 보자마자 저는 완전히 얼어붙었죠. 저는 더듬더듬 뒷걸음질을 치고 남자는 천천히 다가왔어요. 결국 벽에 닿아 도망갈 곳이 없어졌는데, 저를 벽에 몰아세우고 남자가 주머니에 있던 손을 빼더군요. 마치 슬로모션처럼 그 장면이 아주 천천히 진행됐어요. 저는 칼을 꺼낸다고 생각했고,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했어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자는 제 치마 속에 손을 넣고 만지고는 그대로 도망갔어요. 그동안 제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핸드폰으로 남자의 어깨를 마구 때렸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누가 볼지 모르니까.

    그 날 이후로 저는 짧은 치마를 즐겨 입지 않게 되었어요. 당시엔 페미니즘에 대해 모를 때였고, 스스로의 옷차림이 문제된다고 생각했죠. 머리도 짧게 자르고, 남자애처럼 하고 다녔어요. 그날... 더 저를 절망스럽게 했던 건, 집에 올라간 다음이에요. 제 소리를 들은 엄마가 방으로 따라 들어와 처음 물었던 말은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그래”였어요. 엄마가 나간 뒤 두려움과 서러움으로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나요.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엄마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거예요. 내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엄마도 두려웠던 거겠죠. 하지만... 그날 엄마가 제게 처음 한 말은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무너지던 제 마음도요.

    남성들은 주로 자신의 권익을 위해 피해자임을 자처하죠. 대개는 선택적이에요.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성 또한 남성들에게 구조화된 폭력을 경험하게 하겠지만, 여성의 경우와는 확연히 다르잖아요. 여성은 성적 대상화나 성차별의 경험을 통해 ‘피해자성’을 인지하게 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거나 혹은 그 경험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죠. 여성이 피해자임을 자처할 때에는 자신의 생존, 삶을 위해서예요. 그 여성이 페미니스트건 그렇지 않건 상관없이요. 여성이 자신이 겪은 성차별 폭력을 부정하는 경험은 여성성에 대한 부정의 경험으로 이어지고, 저와 같이 남성성을 위장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기도 해요. 생존방식이죠. 흉자, 명자와 같은 말들이 있지만, 이 말들이 문제적인 이유는 남성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그와 같은 생존방식을 선택하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고작 남성의 평균 성기 사이즈가 작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생존의 위협을 줄 수 있다면, 성차별 문제는 좀 더 쉽게 해결됐겠죠? 남성들의 예민함을 피곤으로 치부해버릴 수만은 없지만, 사실 백래시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저급한 논리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서늘해지곤 해요. 지금껏 여성들은 자신이 경험한 것들이 의미하는 바를 알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는데요. 무논리로 웅앵대는 그남들은 역시나 지능과 노오력이 부족해서 괘씸합니다.

    저는 아직 대학을 다니는 친구들과 주기적으로 만날 일이 업무적으로 있는 편인데요. 큰 변화가 없다 좌절하기도 했는데, 20대 여성들은 이미 스스로 정체화하지 않아도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그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좀 감격스러운 순간들이 많아요. 작지만 큰 변화가 느껴진달까요. 이 연대의 순간들이 아마도 계속해서 우리를 싸우게 하는 힘이 되리라 생각해요. 지치는 건 어쩔 수 없어도, 언젠가 이 사회가 바뀌는 건 이미 숙명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돼요. 주어진 상황에 낙관하며 계속 싸울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기를.

    정수님을 비롯한 일상생활 속에서 싸우고 말하고 문제를 느끼는 여성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해요. 정수님에겐 제가, 제겐 정수님이. 그리고 이런 작은 관계들이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또 다른 여성들에게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라요.




   여름이 다가오자 기운이 차오르는 은수 드림


photo ⓒ 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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