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 늘어뜨린 꼬리에 리본을 단 여기저기 상처 입은 한 마리의 암삵은 앞으로도 연결되고, 사랑하고, 생각하며 삶을 이어 나가기로 했다. 암삵의 삶 첫 화를 봤다. 연재를 시작한다는 사실에 마냥 신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놓던 그때. 마냥 신나고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내가 글을 쓴다는 게, 그 글을 누군가에게 꾸준히 보여준다는 게, 누군가가 내 글을 읽어준다는 게. 글은 아주 어릴 때부터 썼지만, 글을 쓰고 싶다고 본격적으로 마음을 먹은 건 스물한 살 때였다. 그러고도 십여 년,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글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여기, 웹진 쪽에 연재하게 된 암삵의 삶이었다. 연재는, 작지만 거대한 욕망으로 시작했다. 내 얘기를 하고 싶다는 욕망과 내 얘기를 통해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싶다는 욕..
삵은 여행을 떠났다 하루에 3만 보씩 걷던 때가 있었다. 재작년 가을 무렵 스페인에서였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작정 떠난 스페인에서, 되지도 않는 영어를 하며 그렇게 혼자 온종일 걸어 다닌 것이다. 혼자 여행을 자주 가던 건 아니었다. 스페인 이전에 혼자 떠나본 여행이라고는 당일치기로 두물머리를 다녀온 것뿐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떠난 건지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유럽 비슷한 곳을 가고 싶어서 마카오를 가려다가, 그냥 진짜 유럽을 가버렸다. 겁도 없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혼자 처음 떠나는 해외여행을 그렇게 정신없이 다녀왔다.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유명한 건축물도, 맛있는 음식도 아니다. 노상 카페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던 기억이다. 이국적인 풍경과 내 귀에서 흘러나오는 내가 ..
암삵의 삶을 연재한 지 1년 3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라는 개인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어느덧 마무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장과 장을 연결하는 ‘개인주의자적 삶’ 시리즈에서 나는 ‘나’라는 개인의 면면들을 연결하고 통합하고 싶었다. 그게 잘 되어 왔는지는 모르겠다. 마지막 ‘개인주의자적 삶’을 쓰기에 앞서 지금까지 써 왔던 ‘개인주의자적 삶’을 한번 쭉 훑어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각각의 이야기마다 그래도, 적어도 개인주의에 대한 내 생각이 담겨 있긴 한 듯 같다. 그 사실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두가 다르다는 사실’, ‘언어 뒤에 감춰진 불확실성’, ‘폭력의 정체’, ‘주관적인 사랑과 삶’, ‘생각과 표현’. 지금까지 개인주의자적 삶을 통해 다뤄온 이야기들이다. 다르다는 사실을 통해서..
삵은 자신을 위한 생각을 하고 싶었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아는 것은 어렵지만 나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느끼는 건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다. 나의 몸과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하나로 통합하여 ‘나’라는 존재를 느끼는 것. 감정과 몸은 ‘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에 ‘나’를 느끼는 것은 나의 감정과 몸을 느낌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러나 내가 ‘나’라는 당연한 그 느낌이 누군가에겐 당연하지 않다. 내게는 조울증 말고 또 다른 병명이 있다. ‘경계성 인격장애’가 그것이다. 경계성 인격장애는 만성적인 공허감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흐릿한 자아감과 연관되어 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느낌이 덜하다 보니, 그 자리를 공허가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내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한다는 건 스물세 살..
삵은 마음으로 생각을 비춰보았다. 길에는 이정표가 필요하다. 그리고 가로등도, 그 길을 걷는 나 자신도 필요하다. 경험이라는 이정표가 비춰주는 생각이라는 길은 때론 캄캄한 어둠이 내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기 일쑤다. 이를테면 도저히 앞날이나 지금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경험을 겪었을 때, 혹은 생각의 여력이 없을 만큼 다양한 경험을 쏟아지듯 겪게 됐을 때. 어린 나는 압도적인 경험 앞에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캄캄한 밤길을 헤매듯 헤짚으며 걸을 뿐이었다. 열네 살의 일도, 열아홉 살의 일도 그러했다. 그러나 그럴 땐 가로등을 켜면 되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길을 비춰볼 수 있는 불빛. 내게도 가로등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아주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내게 가로등이 있다는 사실..
삵은 스스로 지도를 그리는 게 서툴렀다. ‘생각’하면 떠오르는 친구가 있다. 4차원 식구 중 한 명, 사랑하는 삶 2편의 주인공, 암삵의 삶 로고를 그려준 사람. 2020년 3월 24일, 그 친구는 더 넓은 세상으로 떠나갔다. 갑작스럽게, 그러나 급하지 않게 벌어진 일이었다. 나와 하루를 따뜻하고 조용하게 보낸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그렇게 되었다. 갑작스러웠지만 이상하게도 급하게 떠났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루를 조용히 함께 보낸 뒤라 그런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친구의 배려였다는 생각은 든다. 늘 내게 따뜻한 숨 같았던 사람. 한없이 아껴주던 사람. 마지막까지 그 친구는 나를 배려했다. 나와 하루를 잘 보내고, 뒤늦게 발견되어 내가 속상하지 않게 집으로 가는 길..
내 몸으로서의 삶, 연결되는 삶, 우울한 삶, 어떤 피해자의 삶, 사랑하는 삶. 그리고 미처 다 쓰지 못한 삶들까지. 그 모든 삶을 다중적으로 살아오면서 나는 끊임없이 생각을 해야만 했다. 내가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배워가는 건 생각을 통해서이기 때문에. 생각은 억지로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닌 만큼 나는 다가오는 생각을 맞이하는 법을 배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떨 때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만큼의 생각들이 나를 덮쳐오기도 했다. 또 최근에는 다가오지 않는 생각 때문에 내 삶이 텅 비어버린 게 아닐까 걱정도 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괴로운 건 매한가지다. 생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생각대로 와 주지도 생각대로 진행되지도 생각대로 끝나지도 않는다. 예전에 그런 글을 쓴 적이 있다. ..
크게 싸운 날이 있었다. 서로에 대한 불신과 소통에 대한 확신의 부족으로 시작된 다툼이었다. 다툼 끝에 오빠가 내게 제안했다. 커플 다이어리 정말로 써 보는 게 어떻냐고. 지나가는 말로 커플 다이어리에 대해 오빠에게 이야기했었는데 오빠가 그걸 기억하고 제안해온 것이다. 내가 제안할 때는 막연한 것이었지만 큰 다툼과 화해 끝의 제안은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에게 하지 못했던 말과 서로에 대해 정리되지 않았던 생각들을 정리해보는 것. 그리고 기억하는 것. 우리가 다이어리를 채우는 방식은 이러하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각자의 입장을 써 보는 것. 주제는 다양하다. 관점, 만남, 섹시함, 권태 등등. 따로 쓰기도 하고 같은 공간에서 같이 쓰기도 한다. 우리는 서로의 다이어리를 나눠보며 다이어리보다..
삵은 사랑의 힘을 믿었다. 누군가 내게 그랬다. 내가 태어난 이유는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고. 아마도 내가 가진 사랑의 방식 때문에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내가 겪은 사랑이란 사랑에 나를 던진 시간이었다. 사랑에 자신을 던지는 건 미련한 사람이나 하는 짓이다, 라고 온 세상이 외치는 지금이지만 나는 사랑에 나를 던졌다. 나를 걸었고 나를 채웠으며 나를 있는 그대로 내보이고 또 받아들인 세 번의 사랑. 추락하던 나를 상대로 채운 사랑, 서로를 채웠고 또 서로를 놓아준 사랑, 서로를 알아보고 받아들였고 이제는 서로를 이해해가려는 사랑. 세 번의 사랑은 나를 뒤 흔들어 놓았고 바꿔 놓았으며 또 나를 찾게 해 주었다. 사랑에 나를 던진다는 것은 쿨한 사랑과는 대척점에 있다. 나는 사람 자체가 쿨하..
삵은 있는 그대로를 나누는 사랑을 했다.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직감은 했다. 우리는 언어적 소통을 통한 관계 이상의 관계가 될 거라는 것을. 그와의 첫 만남, 노래방에서 음정을 틀리고 어쩔 줄 몰라하는 그의 모습에서 진부하고 또 진부한 표현이지만 그의 영혼을 보았다.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보였으니까. 서툴고 솔직하고 그래서 이리저리 다쳤지만, 그런 그의 모습 그대로 여지껏 살아남은 그의 영혼이. 아니, 이렇게 말로 표현하는 것으론 내가 본 것이 다 담기지 않는다. 마치 사과의 맛을 아무리 언어로 표현한다 한들 그 맛이 느껴질 수는 없는 것처럼.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발견과 소통을 나눈 관계, 그와 나의 사랑이다. 우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삵은 자신을 채워줄 사랑을 했다. 우리는 많이 아팠다. 새빨간 나와 새까만 그. 열아홉의 우리는 서로를 만나 보듬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하며 같이 자랐다. 영화 노트북의 한 장면처럼 도로 위에 누웠던 기억, 밤거리를 밤새 함께 걷던 기억. 거친 싸움과 눈물과 무너짐의 기억. 그 모든 기억이 차곡차곡 쌓여 11년이라는 세월이 됐다. 11년이라는 시간의 끝은 나쁘지 않았다. 싸움도, 일방적인 통보도 아니었다. 더는 연인이 아니기로 하자는 내 제안을 그가 수락했고, 그렇게 우린 연인이 아닌 관계가 되는 것에 합의했다. 그런 시간을 누군가와 함께 보내고 그런 이별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준 그에게 무척 고마운 마음이다. 우리는 행복했다. 어느 곳에 서..
삵은 자신을 건 사랑을 했다 “그냥, 싫어졌어.” 그 한마디로 사랑이 끝난 적 있다. 방황에 방황을 거듭하던 열여덟 살의 끝 무렵에 만난 사랑이었다. 그와 나의 사랑은 72일로 그렇게 막을 내렸다. 나는 그를 만나면서 나의 지난날을 전부 이야기했다. 그 일들이 어떤 일인지 나도, 그도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내 잘못은 아니라고 처음 말해준 사람. 열 몇 시간을 통화하고도 말이 끊이지 않았던 그와 나. 아침에 눈을 뜨면 너무 행복해서 셀카를 찍어두던 시절. 반면에, 사랑을 잃어버린 고통에 대해 처음으로 느끼게 해 준 사람. 이별 후 비루하게도 매달리던 나와 그런 나를 차갑게 비웃던 그. 눈을 뜨는 게 고통스러워서 배 아래 쪽부터 울려 나오는 울음을 쏟던 시절. 첫 연애는 아니었지만, 나의 첫사랑이었던 그..
자책에 빠져 있는 나를 드러냈을 때,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흔하디 흔한 말. 나도 나를 사랑하려고 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랑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랑에 대해 분명한 것은 단 하나다. 사랑은 아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는 것. 나는 나를 사랑한다고 느끼지 않는다. 느끼지 못하는 것을 억지로 느낄 수는 없다. 그건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사랑하기보다 나를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를 대하는 것이 조금은 더 편해졌다. 사랑을 느낀다는 것은 무엇인가. 살면서 사람에게 사랑을 느껴본 적이 세 번 있었다. 방황하던 중에 두 명의 사람을 사랑했고 방황의 끝에 세 번째로 사..
돌아올 수 없는 1. 2015년 8월 14일, 희라의 일기 “하와이에 가고 싶어” “그럼 가자. 꿈속에서 너는 수영복을 입고 팔을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머리 뒤에 베고 누워서 날 바라보는 거야. 그럼 난 그 맞은편에서 비키니랑 비치웨어 입고 널 바라보고 있을게. 비치웨어는 꽃무늬 롱 원피스로.” 그 순간 선풍기 소리와 장맛비 소리는 하와이의 파도가 됐어. 담뱃진에 절은 벽지의 얼룩은 해변이 되었고 오래된 냉장고 소리는 파도 소리가 되었지. 우리는 땀인지 무기력인지 하여튼 정체 모를 것들이 진득하게 달라붙은 옷들을 벗어버리고 꽃무늬 롱 원피스와 수영복 차림이 되었어. 너한테 말하진 못했지만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다가 일어나서 해변을 거닐며 그 옷마저 한 장씩 벗어버리고 싶었어. 섹스가 하고픈 게 아니라 그냥..
삵은 밟힌 꼬리의 책임을 묻는 일도 흉터를 가리려는 노력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자책은 오만과 같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상황을 과대 혹은 과소로 보는,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면에서 자책과 오만은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거라는 요지의 말이었는데,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끊임없이 자책과 오만을 오가던 내게 더더욱 그 말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오만의 뒤엔 늘 수치심이 뒤따랐다. 수치심은 곧 자책을 불러왔다. 상황을 제대로 봤다면 자책할 일도 오만할 일도 아닌 것을. 자책과 오만은 상황을 과대 혹은 과소로 보는 것 외에 다른 공통점이 있다. 상황에 대한 책임을 과도하게 본인에게 돌리는 것이다. 그러다 상황이 나빠지면 자책을, 상황이 좋아지면 오만을 부리게 된다. 책임이란 무엇일까. 전부 내 ..
삵은 밟힌 꼬리를 바라보며 그곳을 지나가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주의* 아래 글에는 성폭행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당 내용이 불편하신 분, 트리거가 될 수 있는 분들은 주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003년이었다. 여름 방학이었고, 나는 열네 살이었다. 당시에는 윈엠프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한 음악 방송이 한창 유행했다. 나도 방송을 해 보고 싶었다. 더럽게 재미없는 열네 살이 진행하는 방송의 청취자 수는 많아봤자 고작 4명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게 참 재밌었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멘트를 하고 사람들이 내 방송을 들어준다는 게 좋았다. 청취자 중 몇은 나를 친구로 추가했다. 몇 안 되는 청취자 중 한 명이 내게 쪽지를 보내왔다. 당연하게도 반가웠다. 반갑게 청취자시냐고 응답..
누군가 삵의 꼬리를 밟고 지나간 일은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라는 영화를 인상 깊게 본 적이 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피해자를 그리는 영화의 방식이었다. 피해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인물의 당위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방식으로 그려낸다는 점이 상당히 인상 깊었다. 피해자는 영화 속 옥분 할머니처럼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 주변에 있다. 그럭저럭 혹은 잘 살아가며. 피해자다움에 대한 억압은 이미 이야기되어온 지 오래다. 보편적인 피해자의 고정된 이미지를 피해자에게 강요하는 것이 억압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피해자라면 약자여야 하고 고통스러워해야 한다는 강요. 경찰에 신고하며 울지 않아서 피해자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피해자가 약자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억..
언젠간 하게 될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되도록 천천히, 언젠가는. 그러나 생각보다 조금 빠르게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나의 우울에 대한 이야기를 써 내려가면서 이 이야기에 대한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으니까. 내 우울을 따라오고 내 우울을 이끄는 이야기, 나의 경험이자 비밀이었던 이야기. 나를 생각하게 만들고 미워하게 만드는 친구이자 가장 큰 적. 나의 숙제. 떨쳐낼 수 없는 그림자. 16년이 지나도 여전히 어떤 부분은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이제는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 나는 성폭행 피해자다. 폭력은 늘 일방적이다. 지난번에 이야기했듯 인간이 아닌 물건으로 바라보고 물건으로 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국어사전이나 교과서 등의 가르침에는, 우리의 머릿속에는 폭력의 이미지만이 그려져 있다. 주먹..
어떤 분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시를 쓰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고. 최근 몇 장의 그림을 그리면서 내 마음을 형상화하는 것에 대해 흥미를 느끼던 차라 시를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마음을 형태로의 형상화가 아닌 문자로 형상화하는 것은 내게 새로운 치유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이번 번외에서는 나의 마음에 대해 생각하며 그린 그림 몇 장과 시 몇 편을 소개해보려 한다. 늪지대의 밑에는 주사를 맞고 나서는 눈물이 나지 않는다얼얼하게 붕 뜬 기분으로 커피를 휘저어 보지만얼음과 춤추는 커피는 내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는다자칫하면 붕붕 끌려 들어가는 것늪지대의 밑바닥엔 오래된 거울이 있다 거울에 비친 나는 겹겹이 겹쳐 있다겹쳐진 나는 물이 번진 수채화가 되고거울은 비닐처럼 얇아진다비닐 사이사이엔..
삵은 야생동물임에도 사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을쓸모없는 존재라 여기며 스스로를 저주했다. 사람이 사람을 ‘사용’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는 이들은 공사를 막론하고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다. 쓸모가 있을 땐 취하고 쓸모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린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쓰이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 텐데 우리는 어릴 때부터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길 강요당하고 산다. 쓸모 있는 존재. ‘사용’하기 좋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강요라는 생각이 들기도 어려울 정도로 이 사회의 당연한 규칙. 규칙에 따라 우리는 나름의 쓸모가 있는 존재가 되어 이 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구성원은 서로를 사용하며 이 사회를 굴려 나간다. 그렇기에 이 사회에서 쓸모란 존재와 같은 무게를 지닌다. 쓸모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