삵에게는 거울 속에 놓고 온 또 다른 자신이 있었다. “어떤 일 때문에 주로 우울한 것 같아요?” 뭐 이런 질문이 있나 싶었다. 우울에도 이유가 있나? 이유가 있어서 우울한 사람들도 병원을 찾아 오는구나 싶었다. “존재요. 제 존재적 문제로 우울한 것 같아요.”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이유 없는 우울. 반복적인 자살 충동. 의사는 제법 말을 차분하게 이어가고 나의 고통을 토로하지 않는 내 모습에 약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자살 충동 이야기를 하자 바로 약을 처방해주었다. 항우울제와 항불안제, 충동조절제 등을 처방 받고 약을 먹기 시작하자 마치 안경을 낀 듯 세상이 선명해졌다. 이게 아프지 않은 나의 세상이구나. 내게 병원을 추천해 준 친구는 병원을 다니고 약을 먹으면 아프지 않은 상태를 알 ..
나에게 관계다운 인간관계가 생긴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그 이전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관계라기보다는 누군가와 얽혀있는 삶을 살았다. 더 이전엔 지나치게 격리된 삶을 살았는데, 격리된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누군가를 내 옆에 얽어놓고 눌러 앉히려 했던 시간이 거의 10여 년쯤 된다. 동아줄처럼 붙잡고서 서로 도무지 놓아줄 줄 모르던 그때.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끊임없이 홀로 세상을 살아가고 싶은 욕망만 키워 가던 그때.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아온 시간들. 10년을 그렇게 살다가 홀로서기를 시작하니 그제야 관계다운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격리됐던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내게 무척 힘든 일이다. 물리적 격리는 아니었고 말하자면 정신적인 격리였는데, 나 스스로 나를 가뒀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식구들의 대화 2019년 6월 3일, 용산 모 카페 삵 : 크게들 말해줘.최주성이 : 하, 참나.제이크 : 이 샌드위치는 저녁이야?연두 : 어, 이거 하나씩 나눠 먹으려고.제이크 : 그럼 저번에 녹취했던 거는 아예 안 들렸어?삵 : 아니, 다 들리긴 들리는데 내가 정리하기 너무 힘들어서. 그때 기운이 별로였어. 좋은 기운이 오늘은 느껴져서.최주성이 : 아~연두 : 오옹~제이크 : 그래? 주제는 있는거야?삵 : 주제 같은 건 없지.최주성이 : 언니 좀 정해와.연두, 제이크 : (웃음)삵 : 아니, 우리가 주제 따로 안 정하고 얘기하잖아.최주성이 : 막상 말할라 하면,제이크 : 근데, 아무리 기운이 좋아도,삵 : 아니, 근데 뭐 말할려고 하지마.제이크 : 아. (뭔가를 까서 먹는 소리)연두 : 아니, 나 오..
다름이 문제 되지 않는 그들이 있다는 건삵에게는 무척 고마운 일이었다. 어느 날 연두는 기분이 몹시 안 좋았다. 걱정이 되어서 연두에게 만나자고 했고 연두는 날 만나주었다. 연두는 처음에는 내게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이야기하다 보니 나를 포함한 우리 사차원 식구들은 그냥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사람들 같다고 했다. 내게도 그렇다. 연두와 제이크, 최주성이 모두 만날 때는 물론 만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자신을 내보일 수 있는 관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척 자랑스럽다. 그러나 나는 인정해야겠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존재가 필요치 않다는 것을. 예전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고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길 원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적 욕망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람들을..
삵과 고래, 기린과 사육사에게서로의 다름은 관계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퀸치광이’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고 밴드 ‘퀸’에 빠진 이들을 일컫는 신조어였다. 그들은 퀸의 무엇에 열광했을까. 나는 그들 관계의 형태가 퀸의 음악과 그들의 팬을 만드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제각각 개성이 강함에도 누구 하나 지워지지 않는 관계.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 그런 관계의 기저에는 신뢰가 있었을 것이다. 신뢰란 어감이 주는 것만큼 따뜻하기만 한 단어는 아니다. 갈등과 고난이 있을 때라야 비로소 신뢰는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퀸의 인터뷰 중 이런 내용을 본 적 있다. 밴드가 잘 되면 결국 해체한다는 말들, 언제까지 퀸일지 두고 보자는 ..
버드나무처럼 사는 삵에겐 오랜 친구가 있었다.강에서 사는 고래, 다람쥐인 줄 아는 기린,그리고 그들을 관리하는 사육사였다. 초끈이론에 의하면 차원은 11차원까지 존재한다. 1차원은 선의 세계, 2차원은 면의 세계, 3차원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의 세계이고, 알려진 바로는 4차원은 시간과 공간의 세계라고 한다. 나는 5차원, 6차원은 어떤 차원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과학적 근거는 없지만 나름의 가설을 세워봤다. 1차원(선)과 1차원이 만나 2차원(면)이 되고, 2차원(면)과 2차원이 만나 3차원(공간)이 된다면, 4차원이 시간과 공간인 이유도 설명이 된다. 공간과 공간이 만나면 공간 안에 시간이 흐르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5차원은 시간과 시간의 만남일 텐데, 애인은 직관적으로 5차원이 에너지의 ..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아주 오래,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할 이야기다. 내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화두이기도 하며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중추와도 같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대해 다른 주제들처럼 시작과 끝을 한 번에 내버리면 아쉬움이 아주 많이 남을 것 같아서 하나의 주제가 끝날 때마다 한 조각씩 자유롭게 풀어놓을 예정이다.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고 마무리될지 나도 모르겠다. 그저 ‘나’라는 개인의 삶을 보여주고 싶다는 연재의 시작처럼 내가 왜 개인주의자로 스스로 정체화했고 왜 개인주의를 선택했는지, 내가 생각하는 개인주의는 어떤 것인지 천천히 풀어낼 생각이다. 어릴 적 나는 거울 속의 내가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왜 다른 친구들과 다르게 생겼을까, 내 성씨는 왜 위 씨일까. 유난히 발이 컸던 나는 6..
인체 모델일을 한다고 하면 다들 그게 무슨 일인지 되묻곤 한다. 그럼 적당한 선에서 드로잉 모델이라고 소개하고 판단에 따라 누드로 작업한다는 말도 덧붙인다. 옷을 벗는다고 하면 대부분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부끄럽지 않은지, 어떻게 용기가 났는지. 전편에 썼듯 나는 거울 앞의 내 모습을 볼 때 부끄러웠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내 몸을 보고, 그리고, 옮길 때에는 전혀 다른 몰입감과 느낌을 받았다. 날 성적 대상이 아닌 내 몸 자체로 보고 그려주는 것. 내 몸과 내 마음이 주는 느낌을 그대로 옮겨주는 것. 그리고 그사실을 믿을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사람들의 시선과 몰입감. 옷을 입고 있어도 나의 몸은 누군가에게 성적 대상이 되지만 오히려 옷을 벗고 누군가가 나를 그릴 때 나의 몸은 성적 대상이 아닌 그 자체..
꼬리에 리본을 단 삵을 사람들은 여전히 쳐다보았지만 삵은 거울 속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처참했다. 네모난 몸과 드러난 갈빗대, 늘어진 살가죽들. 옷을 입었을 때와는 달리 날것으로 거울 앞에 서 있는 나는 초라하고 비참했다. 내 몸의 곡선들은 전부 직선 혹은 늘어진 선들이 되어 있었다. 거울 앞에서 알몸으로 서 본 적이 잘 없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내 몸은 내 생각보다 내게 낯선 것이었다. 처참한 모습 때문인지 자신감이 없었던 마음의 문제인지 모델 면접은 2번 떨어졌다. 두 번째 떨어졌을 때 전화로 사정한 끝에서야 한 달간의 유예기간을 얻어낼 수 있었다. 첫 주는 모델 일을 얻어내기 위한 노력으로 내 생활을 바꿨다. 아침엔 운동을 하고 저녁엔 3시간씩 같은 포즈를 유지하는 연습을 했다. 20분 ..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삵은 아끼는 빨간 리본을 꼬리에 달아도 될지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보이는 것을 신경 쓰지 않을 순 없다. 시각적이며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들의 사회에서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다. 소위 말하는 ‘이미지’라는 것. 이미지는 힘이 있다. 시각적 혹은 비 시각적인 정보를 한 편의 그림으로 압축하여 담아두는 것이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압축된 이미지는 평면적인 하나의 조각이다. 타인을 대할 때 우리는 이미지 조각들의 총합을 통해 상대를 이해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이미지 조각들의 총합은 과연 실재하는 타인과 완전히 일치할까. 라캉은 거울 단계를 통해 타인에게 비추어지는 자신의 자아를 자아라고 믿는다고 주장한다. 아이가 거울을 보고 본인을 처음 인지하듯 타인에게 비추어지는..
꼬리를 내려뜨리기 시작하면서부터삵이 아파트 단지 내를 돌아다닐 때면다른 주민들의 시선을 온몸에 받았다. 작년엔 살이 많이 빠졌다. 일 년 동안 대략 20~30kg정도 빠졌으니 꽤 극적인 변화였다. 일부러 다이어트를 한 건 아니었다. 그저 식사량이 갑자기 줄고 자전거라는 취미가 생기면서 일어난 변화였다. 직장 동료들은 ‘살을 어떻게 뺐냐’고 물어봤다. 심지어 날 모르는 사람이 우리 팀 동료에게 저 사람 살 어떻게 뺀 거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고 한다. 나는 일부러 뺀 게 아니라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했지만, 사람들은 잘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나를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 사회에서 다이어트가 여성에게 필수가 된 것은 따로 말하기 어색할 정도로 이미 오래됐다. 예전엔 접근성과 인식이 좋지..
지구시 동물구 포유동물동, 고양이아파트에 사는 어느 삵은고양이처럼 꼬리에 늘 힘을 주고 다니는 대신에 오늘부터 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살기로 결심했다. 몇 년 전 인공지능이 막 이슈화되기 시작했을 때 인공지능의 한계에 대해 기술한 글을 본 적이 있다. 인공지능과 인간의 결정적 차이는 사물을 구별해내는 체계적 사고에 있다는 요지의 글이었는데, 예를 들어 ‘치와와와 닮은 초코머핀’과 ‘치와와’를 인간은 음식과 동물로 구분해낼 수 있지만 인공지능은 그 둘을 구분해낼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인공지능이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려면 머핀과 치와와, 치킨과 푸들을 구분해낼 줄 알아야 한다. 이에 따라 인간의 사고방식의 특징 중 하나는 인지적, 직감적으로 대상을 비슷한 카테고리로 구분해내는 것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