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오스크』의 주인공 올가는 키오스크(가판대)를 지키는 사람이다. 한 평 남짓한 공간에서 올가의 하루가 열리고 닫힌다. 그림책의 문장처럼 “키오스크는 올가의 인생이나 다름없”지만 키오스크의 좁디좁은 공간과 각진 테두리는 올가의 세상이 아니라 올가가 세상과 만나도록 하는 몸 혹은 피부에 더 가깝다. 키오스크를 통해 올가는 세상과 이어지고, 그러면서 올가는 매일매일 환해지니까. 미소 가득한 얼굴로 단골손님을 맞는 올가는 그들이 무엇을 살지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또는 어떤 마음으로 이곳을 찾는 것인지를 거의 알고 있어서, 그 마음과 필요에 걸맞은 물건을 정확하게 건넨다. “연애에 늘 실패하는 숙녀는 여성 잡지에서 도움말을 찾아요.” “머리를 올려 묶은 아주머니는 낚시랑 고양이랑 정치에 관심이 많아요.” “..
나를 왜 낳은 거야? 내 허락도 없이? 청소년 시절, 목젖 끝까지 이런 말이 차오른 적이 종종 있다. 삼키고 또 삼켰다. 그게 내 부모든 신이든, 대답은 침묵으로 돌아올 게 뻔했으므로. 그때 세상은 온통 숙제로만 가득했다. 고통과 환멸과 지루함으로 이뤄진 숙제. 숙제를 내주는 사람의 기쁨만을 위해 숙제가 존재하는 세계. 거기에 종종 ‘이게 다 너를 위한 거야’란 말이 기쁨을 더 찬란한 기쁨으로 만드는 액세서리가 되기도 하는 세계. 초등학교 때 만났던 단 한 명의 선생님을 존경했다. 아이들을 조건 없이 골고루 살피고 보듬고 있다고 느낀 유일한 분이었다. 나머지는 이내 그 속에 뭐가 들었는지가 다 보였다. 그들이 더 많이 호명하고 더 많이 웃어주는 학생의 경우, 예외가 없었다. 그들 어머니의 얼굴을 번번이 ..
하드커버로 된 표지를 열자 노란색 간지가 드러난다. 큰딸 이름이 삐뚤빼뚤 커다란 글씨로 적혀 있다. 거기엔 글자들의 세계에 처음 편입되어 이제 막 제 손으로 그것을 쓸 수 있게 된 아이 마음의 환희가 담겨 있다. 서지정보가 새겨진 페이지를 보니, 이 책의 초판 1쇄 발행일은 1999년이고 2007년 36쇄 발행까지 이뤄진 것으로 나와 있다. 큰딸이 6~7세 되던 해에 구입한 책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의 책장을 아이와 함께 넘기곤 했던 당시의 기억이 선명하지는 않다. 다만 눈이 트일 정도로 환한 톤으로 그려진, 또 아이가 간지에다 써넣은 글씨만큼이나 삐뚤빼뚤한 그림체에 끌렸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밝은 톤의 그림이 아니었다면 책을 금방 덮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고양이는 신기한 존재다. 온갖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어도, 힘겨운 마음 때문에 어쩔 줄 모르다가도, 고양이 쪽으로 눈을 돌리면 적어도 그렇게 고양이를 바라보는 동안만큼은 함부로 행복과 평화를 말하고 싶어진다. 아무리 바라봐도 질리지가 않고, 눈앞에 저 존재가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워서 네가 나를 사랑하는지, 혹은 내가 너를 사랑하는지 물을 겨를조차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물론 함께 살게 될 경우 성가신 일이 많긴 하다. 고양이와 사는 건지 털 뭉치와 사는 건지 모를 만큼, 사방에 날려가 달라붙은 온 털들을 처리하는 것이 매일의 숙제로 건네진다. 고양이 대변 냄새는 또 너무 강렬한 나머지 매일같이 새롭다. 하지만 이런 매일의 일거리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나는 이렇게나 아름다운 고양이가 내 가까이에 실재하..
마흔 되면 죽어야지, 그 추레한 나이를 어떻게 견디고 살아? 마흔 되기 전에 뭐든 이루지 않으면 일단 실패 아닌가. 마흔 넘은 뒤에는 그저 견디는 삶만 남잖아, 다 져버린 삶. 20대 초반, 친구들과 둘러앉아 이런 이야기를 나누던 게 생각난다. 이런 대화는 힘이 세서 혼자 남겨진 뒤에도 귓속에서 숱하게 되풀이되었다. 정말 오래된 이야기인데도 이 말들은 여전히 생생하다. 물론 그 생생함과는 다르게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20대 후반에 결혼하여 10년간 직장 생활을 이어갔으며, 그 와중에 딸아이도 둘 낳고 키웠다. 이혼도 했다. 시와 산문을 쓰는 사람이 되었으며, 글을 쓰고 만지는 일, 글 쓰는 이들을 보살피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되었다. 기획자와 활동가의 정체성 또한 키워가고 있다. 그러는 동안 ..
둘째아이 출산을 몇 주 앞두고, 6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그 전 직장의 근무 햇수까지 포함하면 10년여의 직장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라 해도 무방했다. 그건 예감이 아니라 기정사실에 더 가까웠다. 전문직 종사자도 아닌 여성 노동자가 아이를 어느 정도 키워놓은 다음 자신의 자리를 찾아 ‘돌아가는’ 경우는 전무하다시피 했으니까. 다니던 직장에 크고 작은 문제가 있어 적잖이 염증을 느끼던 차였다. 후련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막막했고, 걱정스러웠다. 전업주부 생활을 잘 감당할 수 있을지, 두 아이의 성실한 엄마 노릇을 거뜬히 해낼 수 있을지. 무엇보다 사회적인 쓸모를 다한 것만 같은 내 스스로를 견딜 수 있을지가 가장 자신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집에만 있고 아이 둘만 바라보면서도, 모든..
[페미의 시 읽기]의 대문을 처음 열어줄 작품은 실비아 플라스의 시 예요. 사실 '실비아 플라스' 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그 치열한 시 쓰기를 떠올리게 하기보다는 시인의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상상하게 하곤 했죠. 플라스는 두 아이가 다음 날 먹을 아침을 넉넉하게 챙겨놓고, 아이들 방으로 가스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접착테이프로 문틈을 꼼꼼히 봉한 뒤, 오븐에서 새어나오는 가스에 의해 천천히 질식되어 죽어갔다고 해요. 플라스의 자살과 관련된 대표적인 두 인물을 들자면 그녀의 아버지와 남편(테드 휴즈)을 꼽을 수 있을 거예요. 바통을 이어받듯 그들이 직간접적으로 행해왔던 여성억압은, 플라스의 전 생애동안 떼어낼 수 없는 피부처럼 달라붙어 그녀를 옥죄었을 테니 말예요. 그녀의 여러 작품들에서 고스란히 이에 대한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