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나게 시끄럽고 지독하게 위태로운 나의 자궁』 서평 / by 단단


   『서루조당 파효』(교고쿠 나츠히코 著)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중고서점을 운영하는 주인과 그 주인에게 인생 책을 소개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간략히 소개할 수 있겠는데요, 범박한 설명이긴 합니다. 누군가에게 인생 책을 소개받거나 소개해 줄 수 있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책에도 주인이 있다는 말을 듣곤 하는데, 저자와 독자의 합이 잘 맞는, 또는 만나야 할 인연 같은 그런 관계를 말하는 것이겠죠. 조당의 주인은 바로 사람들에게 만나야 할 책을 만나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세 개의 연결고리가 생성됩니다. 저자와 독자, 그리고 그 둘을 만나게 하는 조당의 주인. 책을 만난다는 것은 단지 돈을 지불하고 책 한 권을 사는 일이 아닌 듯 보입니다. 저자의 글쓰기 노고와 조당의 주인처럼 책을 이해하고 사람을 이해하는 사람, 그리고 앎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 독자의 마음이 우연을 빙자한 필연으로 맺어지는 것이겠죠.

    사석에서 지인이 “단단, 이 책을 읽으면서 단단이 생각났어.” 라고 말하며 책 한 권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 말에 내가 생각날 만큼 나와 긴밀히 결부된 내용이라면 도대체 어떤 내용일까, 궁금했습니다. 지인으로부터 간단한 책 소개말을 듣고 나니 의심의 여지없이 내 얘기라며 동조했고, 지인은 나와 헤어지기 전 서점에 들러 책을 구매해 제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두 손에 책을 받아 들었을 때, 긴 제목을 한 자 한 자 꼼꼼히 눈 안에 새기듯 읽어 내리다, 자궁과 나팔관을 상징하는 꽃의 배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꽃으로 자궁을 표현하다니 식상하잖아, 라고 말할 뻔 했던 것을 꿀꺽 삼켰습니다. ‘엄청나게 시끄럽고’라는 표현이 꽃 그림에서 정신없이 묻어 나오지 않겠습니까. 여성의 자궁을 둘러싼 논쟁의 지형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듯 했습니다. 흥분되고 설레면서도 조심스러웠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많이 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편히 울 수 있는 안정된 곳에서 읽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게 책을 펼쳐 읽었습니다. 눈물을 흘릴 만한 구절보다는 딱딱한 의학적 용어가 더 많은 책인데도, 문장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갈 때마다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많은 의학적 용어에도 불구하고 그 용어들이 전혀 낯설지 않았고, 저자가 의학 종사자가 아님에도 이런 전문적인 용어를 술술 써내려 갈 만큼, 그렇게 자신의 몸을 탐구했던 지난한 시간이 저의 전 생애와 겹쳐졌기 때문입니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지독하게 위태로운 나의 자궁』은 자궁내막증을 앓고 있는 한 여성의 전 인생에 걸친 의학탐구 서사라 할 수 있습니다. 의료체계 안에서 하나의 질병을 다루는 태도가 얼마나 사회 전반에 걸쳐있는 인식수준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 사회인식이 어떤 모습이냐에 따라 우리의 질병이 쉽게 고쳐질 수도, 안일하게 방치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사회역학자 줌카 굽타(Jhumka Gupta)는 자궁내막증이 사회정의의 문제라고 말했다. 2016년 3월 19일 워싱턴DC에서 열린 ‘세계 자궁내막증 행진’ 행사에서 자궁내막증이 사회병리라면서 이를 ‘성적 불평등, 사회적 불평등, 여성과 소녀의 완전한 잠재력 실현을 가로 막는 사회의 태도’로 규정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여성이 자궁내막증을 앓고 있는지 그리고 과학계의 부진한 연구와 더딘 발전보다도 구시대적인 신념 체계와 권력 구조가 왜 우리 문제의 더 큰 원인이 되는지를 모른다. 우리가 자궁내막증을 인구 차원에서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단 한 명의 환자조차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저 역시 애비 노먼처럼 제 병을 이해해보고자 오랜 시간 자료를 찾고 공부했습니다. 의사와 마주했을 때, 전문가와 비전문가 사이의 불평등한 위치로 인해 마땅히 얻어야 할 병에 대한 지식에 접근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또 치료과정에서 제가 한 사람으로서 내 몸에 대한 치료 방법의 선택권을 차단당한 채 단지 재생산이 가능한지 아닌지의 여부로만 병의 치료방법을 판단하고 결정 당했습니다.

과학계와 의학계는 자궁내막증에 관해 잘 알지 못한다. 실제로 최신 연구에 정통한 쪽은 오히려 환자들이다. 이런 사실이 때로는 역효과를 낳지만 말이다. 환자가 자기 병에 대해 전문가가 되려고 하는 주된 이유는 병을 관리하고 치료하려는 것이다. 주치의의 진단에 반박하려는 게 아니다. 그러나 산더미 같은 의학 자료를 들고 오는 광적인 환자는 보통 호된 소리를 듣거나 구글 검색을 그만두라는 조언을 듣는다.

    아는 척 하는 환자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의학 지식에 감히 접근하고 알려 했습니다. 단 하나의 이유, 끌려다니지 않고 내 몸에 대한 결정권을 내가 갖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치료의 과정은 내 몸을 돌보기 위한 시간이기도 했지만 주도권을 갖기 위한 투쟁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의료체계 안에서 ‘여성’의 질병을 다루는 데는 과학적 태도보다 사회의 신념체계가 우선으로 작동합니다. 그 신념이 단지 여성을 재생산(임신, 출산)의 도구로만 이해한다면, 여성이 겪는 질병과 고통은 이해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제거되어야 할 것이 됩니다. 치료 방법과 과정에 여성에 대한 존중은 사라집니다. 의학이 수많은 인간(남성중심)학의 한 부류가 아닌 과학의 한 영역을 담당한다고 자처하려면, 재생산의 도구로써의 여성이 아닌 한 인간이 겪어야만 하는 불확실성의 두려움에 대해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한 것 아닐까요. 

이 세상에 자연을 거슬러 생기는 일은 없다. 우리가 아는 자연을 거슬러 생길 뿐.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여성의 몸에 대한 사회적 신념 체계를 바탕으로 한 의료 행위는 자연의 진실을 이해하려는 과학적 태도에 반하는 행위입니다. 여성의 몸에 대한 사회적 신념 체계를 바탕으로 한 의료 행위는 또 다른 차별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신념보다 과학적 태도이고, 과학적 태도란 한 명의 인간을 이해해보겠다는 전제에서 시작됩니다.

    어쩌면 우리를 ‘지독하게 위태로운’ 상태로 내모는 것은 질병 그 자체가 아니라 여성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사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애비 노먼은 한 개인의 질병이 단지 한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임을 정확히 지적합니다. 그리고 여성 질병이 사회의 차별적인 인식 아래 놓여있기 때문에 합당한 치료를 받을 권리 또한 박탈당해 왔음을 말합니다.

    평생 만날 일 없을 것 같은 이 저자의 글이, 한국에서 홀로 병과 싸워왔던 제게 동지애를 불러일으키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저자의 치열했던 삶이 기록되고, 번역되고, 제 지인에게 읽히고, 저에게 넘어오는 일련의 과정은 전부 우연인데도 만나야 할 인연을 드디어 만난 것 같은 필연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저도 이 리뷰로 우연을 만들고, 누군가에게 필연적인 만남이 되길 기대하는 조당 주인의 마음으로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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