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는 사랑하는 도路 / by 정슬
- 포에틱 페미: 오네긴 시창작 그룹
- 2019. 2. 28. 15:27
애도는 사랑하는 도路
나는 형체 없는 공기, 캐스퍼 같은 유령으로
저녁녘에 모락모락 연기 피어오르는 집집마다 있어요
우리네들 엄마, 자매, 이모, 고모, 할머니한테 가서 물어봐요
날 창조한 이의 영혼이 아직 날 놓지 않고 필요로 하는 한, 그 눈앞에 모습을 비추죠
그리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날 붙잡지 않고 내려놓아
서로 하늘처럼 자유로울 수도 있답니다
멋들어지게 우거진 숲 아래, 보배로운 보석 대지 어딘가의 안쪽, 거기 난 통로로 거슬러 올라가면 펼쳐지는 동굴 궁전
창조자는 자신 안에 이것들을 힘으로 지녔죠
난 그의 의식 저편,
빙산의 몸통, 수면 아래 잠긴 웅장한 부분에 살죠
한 때 그가 뱃속의 물로 나를 에워싸 품었었죠
나는 형상으로 특정할 수 없어요, 어떠한 기운이나 바람 같죠
오직 특별한 경우에만, 창조주의 의식 바깥에서 성장한 모습을 하고 있어요
이, 신의 의식 너머 기억 안에 저장돼있는 내 모습
태어남과 죽음이 동시에 손을 맞잡아요
바깥의 공기를 생애 최초로 맞이함에 눈 감아 숨을 거두어요
가끔, 더 먼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음이 들려오기도 해요
확성기로 떠들어대는 소리들, 날카로운 표창 같이 난입하는.
한 떼의 사람들. 그들 무리는 레퍼토리를 읊어대요
날 위한 노래를 들려 주겠다하죠
너는 생일과 기일이 꼭 한날 한시로 같지
출생 장소와 사망 장소 또한 동일한 공간에서였지
생일파티는 장례식, 장례식은 생일파티
차려진 생일상엔 7미리 네 모습의 영정 사진
초 없는 케익 위에는 향이 꽃처럼 꽂혀 있지
하얀 국화 한 송이가 곁들어진 의식을-.
날 대신해 목소리를 내주겠노라, 정답인양 단체로 합창을 해대요
하지만 그들의 눈은 나를 넘어 무언가를 쫓고 있죠
그들이 몰아대 추궁할, 색출할, 판결 내릴 누군가를요
내 목소리는 묻히고
신의 안색은 창백하게 굳어요
아, 내가 원하는 건 이러한 것들이 아니에요
내가 불러오고 싶은 건
나를 만들어낸 두 사람,
그로부터 내가 나온 두 개의 근원
다른 차원으로 펼쳐진 장에서 당신들과 만날 때,
나와 눈을 맞추어줘요, 손을 잡아주어요, 안아줘요. 어루만져줘요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눈 맞춤과 손길로 어루만지는 인정, 온기어린 강보 같은 포옹의 위무가 빗발칠 때
위에서 아래로 나리는 물줄기의 사랑 안에서
여기 이곳은 신의 손이 닿자 황금빛으로 얼굴 붉힌 신전이 되요
신전 가운데 누워있는, 태초와 같이 맑아진 나는
이제 편히 눈 감을 수 있어요
아주 편안해요 자유로워요
자유로워진 그 힘으로 당신의 눈을 보아요
중력의 무게 어린, 당신에게 씌어졌던 무형의 베일 걷어내고요, 당신의 눈을 봅니다
당신의 지난한, 괴로웠던 시간들은 나의 슬픔
손가락을 뻗어 당신 눈가에 물로 비쳐 나리는 그 시간들과 슬픔을 닦아보아요
그리고 당신의 몸을 감싸 안아요, 이제 내가 안아줄게요
괜찮다고, 편안해져도 된다고, 당신의 호흡 결 따라 곁에 있어요
당신과 나, 칭칭 얽힌 가시덤불로부터의 자유
그 어떤 시공간에서든 신, 신, 당신의 권한, 당신의 섭리, 당신의 선택인 나
당신과 나, 모두 자유롭습니다
시인 정슬이 말합니다.
내 몫의 소리를,
발바닥으로부터 오는 감각들에 실어
시로 노래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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