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기, 소개

고양이

    지면을 얻었으니, 나를 소개해야 한다. 이런 나를 도대체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자기소개는 매번 어렵지만, 그걸 하기 전에 먼저 이에 대한 생각을 말하자면, 나는 자기소개를 어디서든 무리없이 비슷비슷하게 해 내고도 무탈히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의 인격 수준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는 분명 이 사회의 강자, 권력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리 인자한 표정을 하고 있어도, 나는 좀처럼 그를 믿기 어려울 것이다. 또, 나는 자기소개 자리에서 인기가 많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에게 쉽게 나의 호의를 내어 주지 않기도 한다. (이런 나는 어떤 측면에서는 비사교적인 사람일 수도 있다. 내 이야기를 이렇게 공개된 지면에 가감없이 풀어 말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한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다종다양해서, 사람이 제대로 자기를 소개하려면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자기소개하는 사람은 지금 자기가 내던져진 이 판, 돌아가는 판을 좀 봐서, 눈치 빠르게도 그 중 몇 가지를 샥, 샥, 솜씨 좋게 꺼내서 남들에게 내밀어야 한다. 아주 잘 훈련된 타짜같이. 그리고 소수자, 그러니까, 사회적 약자일수록 이 작업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소수자가 가진 자신을 소개할 수 있는 패들 중에서는 아무에게나 섣불리 드러내면 무시 당하고, 평가절하 당하고, 심하면 폭력에까지 노출될 수 있는 패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수자는 눈치가 아주 빨라야 살아남을 수 있다. 여기에는 어떤 식의 차별주의자들이 모여 있는가? (한국은 국가가 차별을 묵인하고, 구성원들이 차별을 용인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나의 소수자성은 이곳에서 환대 받을 수 있는가? (대부분의 경우, 없다.) 어떤 식의 농담이 받아들여지고 용인되는가? (소수자에 대한 폭력은 흔히 농담 소재다.) 어떤 속성이 놀림과 모멸의 대상이 되는 곳인가? (대부분 역시 소수자성이다.) 이런 순식간의 질문에 재빨리 답을 찾아 내지 못한다면, 자기소개에 쓸 패를 골라내는 작업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게 되는 셈이다. 말하자면 소수자는 이런 상황이다. 우연히 카드 치는 테이블에 앉았는데, 자신의 손에 쥐어진 패가 거의 다 ‘개패’다. 무엇을 내야 할지 모르겠는 상황이다. 까딱 실수하면 소수자의 평판은 커뮤니티 안에서 바닥까지 떨어진다. 인기 없고 따돌려지는 사람이 된다. 이런 상황에 반복되어서 노출되다 보면 소수자는 결국 말하기보다 입을 다무는 쪽을 택하게 된다.

 

    ‘자기 PR’, 이런 말이 유통되는 세상이다. 모든 것이 상품이고, 한 인간의 이미지 역시 남들과의 관계 안에서 ‘팔리는’ 상품이라는 뜻이다. 자기소개 시간에는 부드럽고 자연스럽고 유쾌한 말투로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고 남들을 웃기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인기를 얻는다. (물론 이보다 나쁜 경우는, 말하는 사람이 혼자 웃고, 나머지는 분명 억지로 웃는 그림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강자의 ‘유머감각’이란 그런 식으로 발휘되고 수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자연스러운 자기소개를 하고 그걸 통해 남들과 자연스러운 관계를 맺는 일은 어떻게 가능하게 됐는가? 또, 어떤 사람은 왜 절대로 그 ‘인기 있는 사람’처럼 자기소개할 수 없는가? 무엇이 그 사람들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었는가? 나는 매번 자기소개 자리에서 내심은 이런 생각을 말하고 이런 질문들을 던지고 싶은 사람이라고, 나를 소개하고 싶다. 너무 길어서 안 되겠지만.

 

    자기소개 자리에는 매우 높은 확률로,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드러내는, 예를 들면 가장 쉽게는 어느 학교를 나왔다든가, 무슨 직업을 가졌다든가, 어딘가에서 인재상인가 문학상을 받았다든가, 어느 지면에서 이름을 걸고 글을 쓴다든가, 그런 말들로 자신을 쉽게 설명하고 지나가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드디어 차례가 돌아와 자기소개를 해야 할 때 겨우 이름 정도만 말하고 입을 다무는 그런 사람도 있다. 그때 나는 그 사람에게 시선을 전혀 주지 않거나 혹은 너무 오래 주지 않으려 노력하면서(어느 쪽이든 그 사람에게 더 많은 부담을 줄 수도 있으니까), 조금쯤 상상하기도 하는 사람이다. 한 사람이 자기소개 자리에서 그렇게 말을 적게 하고, 말을 잘 못하게 되기까지 살아오면서 겪었을 많은 일들을 말이다. 과거의 내가, 자주 그렇게 입을 뗐다가도 금세 닫았던 것처럼.

 

    공개 지면에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나를 설명하려고 내가 과거에 되고 싶었던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얼마 전 한 정당에서 “대통령을 꿈꿨던 100명의 여자들을 찾습니다”라는 프로젝트를 하는 걸 봤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식의 미래에 대한 상상은, 내 어린시절에 없었다. 그냥 나는 간절히 ‘보통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 머릿속에 ‘보통 사람’ 버전의 나는 이랬다. 우선, 결혼한 상태. 남편(물론 남성)은 전문직, 혹은 안정적인 정규직으로 생계 부양자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음. 아이는 하나둘 정도 있거나, 없어도 부부간 큰 문제가 없음(결혼 후에도 상당한 수준의 꾸밈노동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 완벽한 가사와 내조를 통해 남편의 커리어를 보조하는 아내 역할을 함. 동시에, 결혼 후에도 내 커리어를 포기하지는 않음. 하지만 나의 조건에서 전문직 수퍼우먼이 되는 건 불가능해 보이니, ‘예술적 글쓰기’ 등을 통한 자아실현을 함. 만약 그게 잘 되면 내가 남편만큼 잘 벌고, 사회적 명성도 얻을 수 있을 것임. 이 모든 것에는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 있는데, 둘의 결혼은 완벽한 형태의 연애에서 이행해 왔을 것(그래야 가정폭력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이게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는 것은 데이트폭력과 가정폭력에 대한 데이터와 논문들을 보며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게 어딜 봐서 보통 사람일까? ‘보통 사람’이라는 말에는 사실 별 의미값이 없다는 것을, ‘평균’이나 ‘중산층’은, 사실 이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 중 일부만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잘 몰랐다. 그런데도 내가 되고 싶은 상상속의 ‘보통 사람’을 그런 식으로 그려왔다는 건, 그때의 내가 너무너무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기도 한다. 지금 생각하면 과거의 장래희망들이 참 웃기긴 한데, 이것을 마냥 웃기다고만 생각할 수는 없는 건, 그때는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보통 여자’다. 그건 여성으로서 나고 자라며 그때 ‘그런’ 조건에 있던 내가 꿈꿀 수 있는 가장 잘 풀린 인생이었던 것이다(‘그런’ 조건에 대해 곧 말하려고 하니, 조금만 더 기다리며 읽어 주시길. 반복해서 말하자면 자기소개는 패 고르기고, 지금 나는 패를 고르는 것을 어려워 하는 중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와 너무 많이 달라져서, 내게 한때 이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지금 주변 사람들에게는 말 몇 마디로는 제대로 설명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여전히 나를 구성하는, 변하지 않는 몇 가지 ‘패’들이 있다. 서울 수도권 아닌 지방 출신(서울-지방 간 격차를 잘 알고 있음). 경제 활동을 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아빠와, 그 때문에 고생고생한 엄마가 있음(부모를 빨리 잃고 의지할 데가 없는 여자가 남들 다 하는 것이라고 덜컥 결혼해버리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 지방 사는 가난한 중노년 여성의 삶이 어떤 식으로 어려운 것인지 잘 알고 있음). 부모가 결코 잘 배웠고 교양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움(좋은 시민을 길러내는 것은 단 두 명의 교양 있는 주양육자 몫이 아니란 걸 잘 알게 됨). 엄마의 노력 끝에 어렵게 기초생활수급자로 등록돼 십대와 이십대를 보냄(한국 복지제도의 역사와 부침과 장단을 잘 알고 있음). 낙태가 피임 수단으로 보편이던 ‘산아제한’ 정책 시행 시절 다섯 남매의 큰 딸로 태어남(이전에 국가가 다자녀 가정을 얼마나 홀대했는지 알고, 여성의 몸에 대한 관리·통제를 입맛대로 해 왔단 사실도 알고 있음). 근시일까지 엄마 전화기에 ‘살림밑천’으로 내 번호가 저장되어 있었음(부모가 ‘딸’을 어떻게 자원삼게 되는지 그 구조를 잘 알고 있음). 괄호 밖에 있는 것들은 내가 꺼내기 어려웠던 ‘개패’들인데, 괄호 안에 있는 것들은 그 ‘개패’들을 들고 눈치게임을 하며 살아야 했기에 얻을 수 있었던 지식과 통찰들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내 패들이 그렇게 나빴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를 설명하는 데 또 어떤 말들이 필요할까? 이런 말들을 덧붙이면 지금의 나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페미니스트’라고 수많은 사람들이 부르고 있으나, 그것은 한 사람을 자기소개 시간에 자신있고 당당하게 소개할 수 있게 만드는 어떤 직업이나 라이센스 같은 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 계층물림해버려서 사회에서 낙오될까 봐 불안해 대학에 많이 들어갔다가, 여대에서 덜컥 페미니즘을 배워 운이 좋다고 생각함.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전처럼 ‘나만 잘 살기’에 대한 노력 말고 좀 ‘같이 잘 살기’를 위해 돈과 시간과 에너지 쓰며 살고 싶음. 특히 결혼 같은 이상한 제도에 들어가 한 큐에 모든 걸 해결하는, 기성 제작된 모델하우스 같은 가족 틀 안에 들어가기보다, 좀 어렵더라도 다종다양하고 풍부한 친밀성을 모색하고 싶음. 그래서 ‘비혼지향생활공동체’ 같은 것을 만드는 등, 이런저런 프로젝트 중(나랑 내 식구들이 만든 이 개념은 이제 무려 조선일보 사설에 등장해 이 사회에서 자생한 개념이 되었다). 이 작은 나의 세계를 끊임없이 탐구하며 다르게 해석하는 힘을 기르면서 바꿔 왔고, 이 작업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데 관심이 있음.

 

    아차, 사회에서 통용되는 자기소개의 전통을 따라 현재 직업 같은 것을 덧붙여 말해야 할까? 비정규직조차 아닌 프리랜서 기획자·저술가. 현재 ‘프리랜서병(증상: 불규칙한 수면패턴, 기분조절과 컨디션 조절, 스케줄 조절에 자주 어려움을 겪음)’에 걸려 있음. 조직생활 없이도 규칙적인 삶을 조직해 보겠다고 마음 먹은 지 이틀 만에, 밤샘 원고를 쓰는 중.

 

    살다 보니 변방의 변방으로부터 세상을 볼 줄 알게 되어버린 사람, 그게 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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