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나는 퀴어입니다(3)


   많은 사람들이 외모, 스타일, 사회적 지위 같은 조건들에서 로맨틱한 끌림(‘연애감정’이라는 단어는 연인이라는 계약 관계를 내포하는 느낌이라 피했다)을 느낀다고 한다. 나도 분명 그런 것들에 영향을 받긴 하겠지만 결정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사랑에 빠지려면 그 사람과 내가 통하는 지점이 있어야 했다. 고유한 이야기, 그리고 내가 그 이야기에 공명하는가가 사랑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성별도 조건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의문이 들었다. 그가 여성이어서, 남성이어서 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들을 듣고 내가 끌렸다면 나는 그 사람이 여성이어서, 남성이어서 사랑한 것 아닐까? 레즈비언의 성적 지향 이야기에 많이 끌리긴 하지만 남성의 경우에도 그가 가진 독특한 사고방식, 삶의 경험 이런 것들에 매혹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성별은 그들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틀을 마련하고는 어느새 사라졌다. 그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여성, 남성’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행동해왔다. 성별이라는 틀과 그를 넘나드는, 남성이지만 남성성에서 벗어나고 여성이지만 여성성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들. 나는 그런 점에 매력을 느꼈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상대방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인식되지 않았다. 치마를 입고 있든 바지를 입고 있든, 머리가 짧든 길든 상관없어졌다. 그 사람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매력을 부추길 뿐이었다. 


    이 때문에 여성과 처음 연애 할 때도 무언가가 크게 바뀌었거나 달라졌다고 느끼지 못했다. 나는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연애를 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더욱 위화감을 느꼈다.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나 연애하는 모습은 상대방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다르지 않은데 왜 나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 같은 기분이 드는가. 왜 이성애자에서 벗어나 범성애자(상대방의 성별에 상관없이 로맨틱한 끌림을 느끼는 퀴어)가 ‘되었다’고 느끼는가. 나는 처음부터 이렇게 생겨먹었던 것 같은데 왜 큰 변화가 있는 것 같은가. 이전에도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연애를 했는데 인연이 닿지 않아 남성들만 사귀었던 것이라면, 왜 여성과 사귐으로써 자유로움을 느꼈는가.

    고민하다보니 실마리가 잡혔다. 그것은 나의 사랑이 사회와 가족 안에서 받아들여지는 방식 때문이었다. 남성 애인의 경우에는 가족들에게 얼마든지 밝힐 수 있고 공공장소에서 가벼운 스킨십을 할 수 있으며 회사를 비롯한 공적인 자리에서 애인 관계라고 밝힐 수 있었다. 하지만 여성 애인인 경우에는 거의 모든 일이 불가능했다. 가족들에게 밝힌다고 상상해보면 저절로 드라마적 상황이 떠올랐다. 뒷목잡고 쓰러지는 부모님과 전환 치료를 받게 한다고 정신과에 억지로 끌고 가는 모습 말이다. 학교나 회사에서 소수자라는 것을 들켰을 때 받을 린치나 폭력, 부당해고 같은 불이익들도 연상됐다. 이런 상상은 미디어를 통해 보고, 소문으로 듣고, 지인들에게 직접 성소수자 혐오 발언을 들으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정체성을 들키는 것은 삶이 완전히 망가질 수도 있다는 공포와 연결되었다. 남성과 사랑할 때는 이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는데 같은 성과 사랑하자 알게 되었다. 사랑은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주류의 지배를 받아왔다는 사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사랑 규칙이 있고 이 틀에서 벗어나면 제재를 당할 수 있었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느낌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규칙 밖으로 나갔다는 느낌이었다.

    이토록 두려운데 울타리 밖으로 나가면서까지 연애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성과 뜨겁게 사랑하고 관계도 잘 맺을 수 있으면서 왜 굳이 남성이 아닌 다른 성별의 사람과 사랑하려 하는 것일까. 매력적인 남성을 적극적으로 찾거나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일 아닐까. 나의 여성 애인이, 친구들이, 누구보다 나 자신이 수차례 질문했다. 답은 너무도 명확했다. 왜냐하면 관계는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여러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다. 그 관계들은 연인, 친구, 지인 등의 이름으로 ‘내가’ 자리매김한 것이 아니었다. 나와 상대방이 부딪쳐 무엇이 될지는 나도, 상대방도, 그 누구도 몰랐다. 친구라고 해도 같은 친구는 세상에 아무도 없고 사랑 또한 같은 사랑은 전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관계들은 전부 다르고 특유했다. 내 의지로 관계들을 그렇게 만들었다기보다 지내다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됐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식들도, 심지어 쌍둥이조차 부모와의 관계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일말의 의심이 남았다. 관계가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졌다고 하더라도, 친구와 애인의 선을 명확하게 지킬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주변 사람들을 괴롭게 하면서까지 사랑을 할 바에는 내 선에서 단념했어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아무리 어떤 사람에게 성적으로 끌려도 주변 사람들을 생각해서 내색하지 않고 혼자 넘어가거나 반대로 사랑하지 않아도 상황에 맞춰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말이다. 그것이 사람들에 대한 예의와 도덕적 책임을 지는 일 아닐까. 하지만 혼자 간직한다고 해도, 이미 내면에서 발생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눈치를 못 챈다고 해도 인정을 안 한다고 해도 외부로 표출하지 않아도 혼자 삭히기로 결정해도 이미 발생해버린 것이다. 마음을 숨기거나 버리는 과정은 고통과 괴로움으로 점철됐다. 고통 받음으로써 마음이 생겨버렸다는 것을 오히려 더 생생히 실감했다.  

    내면에 솔직함으로써 마음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모나지 않게 살아갈 것인가. 어느 쪽이든 희생과 고통이 따랐다. 양심에 솔직하기를 택하면 사회와 부딪치는 고통을 겪어야 하고 사회에 맞춰 살고자 하면 마음을 부정하는 고통을 겪는다. 여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삭히고 남성을 만나면 될 일이라는 말은 나 자신을 속이라는 말로 들렸다. 한 여성과 뜨겁게 사랑하고 있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두려움과 함께 자유로움이 넘실거리는 큰 파도를 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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