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현실 도피를 위한 공상


    어째 잠잠하다 싶더니 또 시작이다. 이전에는 서른네 살이었던 거 같은데 이번에는 서른여섯 살이다. ‘누가 바로 사귀라고 하니, 밥만 먹고 와.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봐야 할 거 아니야.’ 드라마 대사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어머니의 말에 간곡한 심정이 한 가득이다. ‘다 너 좋으라고 하는 거지. 지금이야 젊다지만 늙어서까지 혼자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지 아니? 그러니까 얼른 만나봐.’


    내 얼굴만 보면 성화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내적 갈등 끝에 겨우 ‘만나는 사람 있어요’ 라고 대답했다. 누군지 당장 데려 오라신다. 누구인지 만나보면 기절하실 텐데. 어머니의 정신건강이 걱정되므로 내가 알아서 잘 만나고 있다고 둘러댔다. 피하기 위한 말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굴하지 않고 재시작이다. ‘밥 한 번 먹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한 번 만나봐.’

    나에게는 만난 지 얼마 안 된,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어머니께 보여드리지 못하는 이유는 이 분이 나와 같은 성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원하는, 미래를 함께할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조건에는 딱 맞는데 다만 성별이 문제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헤쳐갈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말도 안 되는 공상을 하기 시작했다. 막장 드라마 시나리오가 써졌다. 재미있어서 키득키득 웃다 애인에게도 들려주었다.
 
[대기업 회장의 외동딸인 지효는 회사를 물려받으라는 부모님의 뜻과는 다르게 예술가의 길을 걷고자 해요. 반대가 심하니까 집을 나와 자기 나름대로 이것저것 해보지만 잘 안 되어 쫄딱 망하죠. (-요즘 재벌들은 자식이 예술 한다고 하면 전폭적으로 지원해서 사업화 하는 거 몰라? -나도 알거든, 가만히 들어봐.) 부모님은 그런 지효를 수습해주면서 일을 배우라고 회사에 불러들여요. 졸지에 낙하산으로 들어가 일을 하게 된 지효는 처음 하는 일이고 적성에도 맞지 않으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리버리하게 지내요. 그런 지효가 못마땅하니까 직원들은 알게 모르게 괴롭히고, 괴로운 나날을 보내죠. 한편 능력이 좋아 초고속으로 승진해 차기 지사장감이라고 불리고 있는 전무 재희가 있어요. (-지효는 당신이고 재희는 나구나? -정답.) 재희는 지효를 별 신경을 쓰지 않아요. 워낙 독립적이고 능력도 있으니까. 회장님 오른팔 격으로 총애받고 있기도 하고요. 어느 날 재희가 야근을 하다가 잠시 한숨 돌리려 옥상에 올라갔는데 그곳에서 뛰어내리려고 하는 지효를 발견해요. 황급히 구하죠. 자살하려다가 실패한 지효는 재희에게 자신의 상황을 울면서 털어놓아요. 그런 지효가 한심하면서도 불쌍해서 다독여주고 이 사건을 계기로 회사 일을 도와주기 시작해요. 이리저리 지내던 재희와 지효는 점차 서로에게 마음이 생기고 사랑에 빠져요. 둘은 달콤한 비밀 연애를 하죠. (-오피스물 좋다. 우리 사내연애 하면 어떨까 맨날 얘기했었잖아.)
 
그러던 어느 날 회장은 지효가 나이가 찼으니 얼른 결혼을 하라며 혹시 만나는 남자가 있으면 데려오라고 해요. 만나는 사람이 없다면 지인이 있으니 선을 보라고 하죠. 압박이 점점 심해져요. 견디다 못한 지효는 재희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논해요. 재희에게는 쌍둥이 남동생 재훈이 있는데 지효와 재훈이 결혼을 하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를 내요. (-나 실제로 전 애인이랑 이 생각 해봤는데. 내 쌍둥이 남동생이랑 결혼하면 어떻겠냐고. 동생한테 얘기했었는데 사귀는 사람 없어서 괜찮다고 했었어. -와, 무서운 사람들이네. 동생의 공적 삶을 희생시키는 거라 조심해야하는 거 알지? -얘기만 했었지 실제로는 안했어.) 재희와 재훈의 아버지는 국회의원인데 자수성가한 재희는 집에서 예쁨을 받아왔고 병약해서 하는 일마다 잘 안 된 재훈은 찬밥신세로 지내는 중이었어요. 재희와 지효가 재훈에게 가서 결혼을 해 달라는 부탁을 하자 재훈은 자신에게도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승낙하죠.(-내 동생 이런 캐릭터 아니야!) 양가의 서로 반기는 분위기 속에 지효와 재훈이 결혼을 해요.
 
아파트 앞, 뒷집에서 재희와 지효가 한 집에 살고 재훈이 혼자 살며 부부 연기를 해요.(-두결한장 봤어? -당연히 봤지.) 회장은 딸의 남편이 된 재훈이 번듯한 직장이 있어야하지 않겠냐며 회사로 불러들여요. 재훈이 지효를 통해 얻으려던 기회가 바로 이거였어요. 점차 지사장 자리를 놓고 재희와 재훈이 경쟁하게 돼요. 암투극을 벌이며 경영권 싸움을 하는 쌍둥이 남매 사이에서 지효는 사랑하는 재희의 편을 들고자 하지만 재훈이 공식적 남편이라는 관계를 미끼로 지효를 압박하기도 하고요. 지효는 그 사이에서 갈등해요. (-어디서 많이 본 내용인데? -막장 드라마가 거기서 거기 아니겠어.) 한편 오랫동안 재희를 짝사랑해서 구애해온 회사 전속모델 상우가 있어요. 재희가 철벽을 치고 일말의 여지도 없이 계속 쳐내니까 점점 스토킹 수준으로 집착하게 돼요. 그런 상우가 재희를 쫓아다니다 셋의 비밀을 알게 돼요. 이 사실을 이용하면 재희와 잘 될 수도 있겠다는 계략을 짜는 거예요.
 
상우는 먼저 재훈을 찾아가 셋의 관계를 알고 있다며 재희와 잘 되게 도와준다면 재훈이 지사장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제안을 해요. 재희를 데리고 외국으로 떠나거나 아니면 자신의 아내니까 회사 못나가게 한다거나 그런 식으로. 고민하던 재훈은 나쁘지 않으니 제안을 받아들여요. 또 상우는 재희, 지효에게 가서 협박해요. 재희가 자신과 결혼해주지 않으면 이 비밀을 폭로해 회사를 망하게 할 것이라고 말이에요. 회장 딸이 레즈비언이라는 것과 사기 결혼을 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회사가 어떻게 될까? 라면서 수집한 자료들을 펼쳐놓는 거죠.]
 
    - 다음에 어떻게 될 거 같아?
    - 음.. 재희는 똑똑하니까 변호사나 흥신소 통해서 상우 뒷조사를 한 다음, 협박할 거리를 잡고 증거자료들을 빼앗지 않을까.
    - 그건 드라마가 아니라 ‘그것이 알고 싶다’ 잖아.
    - 그래서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데, 얼른 말해봐.
 
[재희와 지효는 해결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상우한테 휘둘려요. 재희는 지효를 많이 사랑하기에 네가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며 헤어지자고 하죠. 상우와 결혼을 해서 회사와 지효를 지키려고 해요. 지효는 울며 받아들일 수 없다고 재희를 붙잡지만 재희는 매몰차게 뿌리쳐요. 너를 사랑하는 내 방식이라며. (-우.. 완전 신파네. 식상하다 식상해.) 이 때 지효가 부모님을 찾아가요. 회장을 찾아가서 커밍아웃을 하는 거죠. ‘엄마, 사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재훈씨가 아니라 재희씨야.’ 그러면서 상우가 협박한 내용을 알려요. 회장은 자기 회사를 위협하는 얘기를 들은 거잖아요? 일단 상우를 조용하면서도 깔끔하게 처리해요. 죽였다는 말은 아니고 입막음을 시킨 거지. 그리고 지효한테 왜 속였냐고 추궁해요. 지효는 엄마가 내가 여자를 사랑한다고 하면 받아줬을 거냐며, 예술 하는 것도 못마땅해서 못하게 했으면서, 회사를 위해서 남자랑 결혼시키려하지 않았냐고 따지죠. 회장은 지효한테 다 너를 위해, 잘되라고 한 것이었지 네 의견에 무조건 반대한 것은 아니라고 말해요. 얼마간 딸이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갈등하던 회장은 지효가 계속 설득하니까 받아들여요. 네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랑 사는 게 엄마가 바라는 거라고 말이에요.
 
재희, 재훈 집안에도 이 사실이 알려지고 둘의 아버지가 혼을 내는데 재훈이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자식이고 싶어서, 재희보다 더 잘하고 싶어서 그랬다고 털어놔요. 아버지는 재훈에게 그런 거 아니라고 네 모습 그대로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고 말해주며 응어리를 풀게 되죠.(-지효나 재훈이나 부모에게 인정받는 게 왜 그렇게 중요한 거야. 애 같이. -맞아, 아직 애라서 이 모든 일이 발생한 거지.) 재희, 재훈 아버지가 국회의원이었잖아요? 그 후로 차별금지법과 동성결혼 법제화에 힘을 쏟아요. 지효네 회사도 기자회견을 통해 지사장이 된 재희와 지효가 사랑하는 사이임을 밝히고 성소수자 친화적인 기업이 돼요. 사회적으로 엄청난 이슈가 되고 결국 동성결혼이 이루어져요. 그리고 재희, 지효 두 사람은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려요. 그 후로 두 사람은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드라마를 쓰고 나니 나의 벌거벗은 욕망이 보였다.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 부모님에게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를 인정받고 싶다, 사랑하는 이와 독점적인 연애관계에서 더 나아가 결혼을 하고 싶다 등등. 애초에 내가 가질 수 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해서 머릿속에서 지워놓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정신공격으로 깨어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비현실적이었다. 잔소리를 피해 도망간 백일몽일 뿐이었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줄 의사가 전혀 없음에도 누구를 만날지 말지를 다른 이에게 강요받는다는 사실이 자괴감 들었다. 독립을 하지 못한 죄값이다 끓는 속을 삭혔다. 가난해도 혼자 어떻게든 살아가겠다고 독립했다면 남자를 만나든 여자를 만나든 무슨 상관이었을까. 물론 경제적으로 독립해도 부모라는 이름으로 네가 잘 되길 바란다는 이유로 자신의 기준을 강요하는 부모들과 그에 휘둘리는 자식들이 적지 않다. 결국 성인인 이상 선택은 내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에게 휘둘리겠다 선택한 것도 '나'였다. 차분하게 전략을 짰다. 어머니의 걱정은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들 것이니 독립하는 날까지 참고 견디자. 백일몽을 꿀 자유는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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