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남자친구’라는 단어

   많은 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쓰는 단어가 불편하고 거슬리는 것은 소수자가 겪는 일들 중 하나일 것이다. 매끄럽게 흐르던 대화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단어들이 이 생각 저 생각을 이끌고 상대방에게 전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검열하게 한다. 요즘 들어 더 생각하게 된 단어가 있는데, ‘남자친구 혹은 여자친구(줄여서 남친, 여친)’다. 성적지향을 인식하지 못했을 때는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했지만 여성 애인이 생기는 순간 쓸 수 없는 단어가 됐다. 이성애자만이 남자/여자친구를 연인을 뜻하는 말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단어를 들을 때마다 이성애는 너무도 일상적이고 지배적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남자/여자친구 대신 ‘애인’이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생긴 몇 가지 일화가 있었다. 첫 번째는 지인인 여성 A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A를 거의 8, 9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됐는데 그녀는 시간을 뛰어넘은 양 나에게 서슴없이 친근감을 표하고 스킨십을 했다. 연락이 닿은 후로 꽤 자주 만났고 심지어 어느 날에는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너무도 낯설고 이상했다. 이정도로 가깝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A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를 좋아하는 건가? 나에게 애정공세를 펼친다는 것 외에 A가 퀴어일 것이라는 느낌은 받지 못했지만 그녀의 행동들은 내 입장에서 견디기 힘든 것들이었다. 팔짱 끼우기, 손잡고 걷기, 머리카락 쓰다듬기 등 스킨십의 농도가 짙어지자 참다못해 질문했다.
 
    “A, 애인 있어?”
    “남자친구 있었는데 얼마 전에 헤어졌어. 그런데 무지, 왜 남자친구라고 안하고 애인이라고 해?”
 
    아이고 두야.. 퀴어일 가능성이 전혀 없어보였다. 남자친구라고 함으로써 A는 자신이 데이트하는 상대가 남성임을 표시했다. 그것만으로 퀴어가 아닐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으나 이어서 나에게 왜 애인이라는 단어를 쓰냐고 물어보기까지 했으니 확정에 가까웠다. ‘나는 이성애자입니다. 땅땅땅.’ 속으로 살짝 욱하는 마음이 일었다. 애인을 남자/여자친구라고 말하는 것이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성별+친구’로 이루어진 단어가 어떻게 애인을 뜻하는 말인가? 남성/여성인 친구를 말하려면 ‘남자사람친구, 여자사람친구’ 라고 해야 하는 것을 보면 남성과 여성은 친구가 될 수 없고 둘은 ‘성애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뿌리 깊은 것이리라. 남자/여자친구가 애인을 뜻하기까지 어떤 사회문화적 발흥이 있었는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A에게 왜 남자친구가 아닌 애인이라는 말을 썼는지 설명하려면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했다. ‘나는 이성애자’라고 발뺌하더라도 일상에서 언어를 바꿔 쓰는 실천까지 하는 엘라이(성소수자 당사자는 아니지만 지지하는 사람)라는 점이 드러날 것이었다. 만약 A가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A에게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되자 A와 나의 관계가 사적인 것만이 아닌 정치적 성격을 띠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A와 사이가 멀어질까봐, 또는 사회적으로 해를 당할 것이 두려워 아무 말도 못하게 된다면 나는 혐오세력에게 밀리는 것이라. ‘내가 떳떳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나. 만약 커밍아웃으로 인해 해를 당한다면 나에게 폭력을 가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지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되뇌었다.
 
    결국 A에게 나는 범성애자이고 A의 행동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이야기를 했다. A는 화들짝 놀라서 자신은 남자 좋아한다고 오해하지 말라고 말했다. 본인 행동을 조심했어야지 누구에게 적반하장인지. ‘이래서 한국 여자들은 안 돼!’ 라며 동성에게 과도한 스킨십과 애정공세를 벌이는 사람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A는 재미있다고 깔깔거렸다. 미디어에서 접하기는 했지만 주변에서 실제로 퀴어를 보는 것은 처음이라며 신기해했다. 당연하지, 쓰는 말에서부터 이성애자 티가 풀풀 나는데 어떻게 퀴어들이 퀴어인 티를 내겠어. 빙그레 웃으며 속으로 말을 삼켰다. A는 혐오세력이 아니었고 그 후로도 나에게 다정한 친구로 잘 대해주었다. 한 명이라도 더 퀴어를 고려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점이 뿌듯한 날이었다.


    한번은 신발가게에 갔을 때였다. 가게 주인은 나와 나이대가 비슷해 보이는 남성으로 매우 친절하고 붙임성이 좋았다. 신발을 고르고 계산하려는데 주인이 나에게 ‘남자친구’ 만나러 가냐고 물어보았다. 문제적 단어의 등장에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애인과 만나기로 한 것은 맞았다. 다만 애인이 남자가 아니어서 그렇지. 고민을 하다 입을 열었다.


    “네. 애인 만나러 가요.”
    “그렇구나. 그런데 남자친구라고 안 하고 애인이라고 하시네요? 남자친구와 애인의 차이가 뭐예요?”
 
    해맑게 묻는 말에 진땀이 났다.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물어볼 줄이야. ‘네, 남자친구 만나러 가요’ 혹은 ‘아니오, 남자친구 없어요’라고 대답했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애인과 나의 관계는 네, 아니오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나는 단순해서 아름다운 이 ‘네, 아니오’라는 답에 숨어서 우리의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든 왜곡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가게 주인이 의도한 애인이라는 관계는 ‘네’ 라고 긍정하고 남자친구라는 단어는 ‘애인’이라는 말로 고쳐 대답했다. 모를 줄 알았는데 이 섬세한 차이를 가게주인이 잡아낸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남자친구/여자친구라고 하는데 왜 너는 애인이라고 하냐고 질문함으로써 내 의도를 정확하게 짚었다. 다시는 볼일이 없을 것 같은 사람에게 어디까지 설명할 것인가. 질문에 정면으로 맞설 것인가 아니면 한 수 접을 것인가. ‘애인이 남자가 아니라서요’ 라고 답하면 가게 안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던 중 갑자기 신발을 구경하던 중년의 여성분이 끼어들었다.


    “그것도 모르나. 남자친구는 그냥 친구고 애인은 사랑하는 사람이지.”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빵 터졌다. 맞는 말이라고 웃으며 받았다. 대답할 기회를 빼앗겼지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직 무차별 커밍아웃을 하기에는 용기가 부족하기도 했다. 커밍아웃 생각이 든 순간부터 두려움과 망설임으로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중년의 여성분이 이런 나를 뒤로 물러나게 했다. 약간의 안도감과 패배감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그녀의 입을 통해 듣는 애인이라는 말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글자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 애인이 남자친구보다 더 낭만적이고 순수하며 순도 높은 사랑을 하는 관계라는 말 같았다. 물론 중년 이상의 분들이 애인이라는 말을 즐겨 쓰기에 한 말일 수도 있겠다고 얼핏 생각했다. 어떤 심정에서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나의 무차별 커밍아웃 공격으로부터 가게를 구해냈다. 다음에도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나는 ‘애인이 남자가 아니라서요’ 라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어물쩍 넘어갈 것인가 또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내가 하는 사랑을 숨기거나 왜곡하고 싶지 않고 퀴어들은 일상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으니 말이다. 그 후로 가게 주인은 여전히 남자/여자친구라는 말을 쓰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질 때가 있다.


    마지막은 매우 색달랐던 일이었다. 내가 퀴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가족이 있는데 바로 여동생이다. 그녀가 우연히 나와 애인이 전화통화 하는 것을 들었다. 전화가 끝나고 동생이 물었다.
 
    “여자친구야?”
 
    너무도 놀라우면서 뭐라 형용하기 힘든 기분이었다. 여자친구라니. 여성으로 살아온 평생 이 단어는 그저 ‘친구’를 뜻하는 말이었다. 애인을 ‘여자친구’라고 지칭하니 ‘남자친구’와 똑같이 성애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오히려 더 은밀하고 밀접한 기분이 들었다. 여자친구를 애인으로 둔 사람이니 그러면 나는 남성인걸까 이런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남성에게는 여자친구가 있고 여성에게는 남자친구가 있다는 공식을 깨는 느낌이었다. 동생도 자신이 말하고는 재미가 들렸는지 ‘언니 여자친구한테 데려달라고 해’ 라던가, ‘여자친구랑 싸워본 적 있어?’ 같은 말들을 했다. 어색하면서도 나의 애인이 여성이라는 점을 긍정하는 느낌이어서 즐거웠다. 동생은 부모님과 대화하면서 대범하게 쓰기도 했다. 처음에는 사색이 되어 어찌할 바를 몰라 했지만 익숙해지자 둘만의 은어처럼 상황을 교묘하게 숨기면서도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로 사용했다. 예를 들면,
 
    “엄마, 나 이번 주에 1박2일 강원도로 놀러가요.”
    “누구랑?”
    “언니, 여자친구랑 간대.”


    별일 아니라는 듯 넘어가는 부모님과 속으로 엄청 놀란 나, 그리고 사악하게 웃는 동생이었다. 남자친구랑 간다고 했으면 부모님은 펄펄 날뛰며 못 가게 했을 것이다. 애인이랑 간다고 말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여자 애인이랑 간다고 했다면 방 안에 감금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자친구’는 무사통과의 단어였다. 나의 젠더가 여성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부모님에게 동성인 여성 친구는 아무 의미가 되지 못했다. 남자/여자친구라는 말을 연인이라는 단어로 대체해서 쓰고 있는 주류 문화를 거꾸로 이용한 것이다. 퀴어인 나에게 ‘여자친구’는 친구를 뜻하는 말과 애인을 뜻하는 말로 동시에 쓰일 수 있었다. 은근한 쾌감이 들었다.
 
    단어에도 생로병사가 있어서 언젠가는 죽어 사라지는 날이 온다. 남자/여자친구는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나처럼 언어를 바꿔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죽는 날을 앞당기리라. 사라지는 것 말고도 ‘연인’이라는 뜻을 버리고 ‘친구’의 위치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더 강해질 수도 있고 말이다. '남자/여자친구'의 운명은 어찌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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