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생리하는, 몸. (2)
- 온전히 생존기: 김경진
- 2019. 8. 12. 16:30
매일 복용해야 하는 게 번거롭긴 하지만 그래도 프리페민은 경구피임약보다는 복용이 쉬웠다. 경구 피임약은 매일, 같은 시간에 먹어야 하지만 프리페민은 매일 먹기만 하면 되니까. 그렇게 꼬박꼬박 2주 정도를 복용하자 생리 때에만 잠깐 비치던 화농성 여드름이 턱과 입가로부터 시작해 볼 쪽으로 올라오기 시작하고, 얼굴에 무언가가 닿으면 화끈거리며 아플 정도로 피부가 예민해졌다. 프리페민 부작용이었다. 얼굴이 얼룩덜룩 붉어지니 화장을 했을 때도 낯빛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자꾸만 아프냐, 피곤하냐, 얼굴에 뭐가 묻었느냐, 피부가 탔느냐, 그런 것을 물었다. PMS 없는 쾌적하고 건강한 나날에 대한 기대는 처참하게 깨지고 말았다. 프리페민에 대한 배신감까지 느꼈다. 너를 믿었는데!
웹 서치로 찾아 본 후기들에는 복용 한 달 만에 PMS가 호전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부작용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부작용에 대한 이야기들은 효과를 봤다는 이야기들 보다 덜 드라마틱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약이 얼마나 좋은지, 얼마나 안전한지, 본인의 삶이 얼마나 나아졌는지 이야기하는데 열심이었다. 부작용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붓기, 여드름, 소화불량 등의 증상이 있을 수 있지만 ‘그리 심하지는 않다’고 했다. 단톡방에서 프리페민을 소개해 준 지인도 세 달 꾸준히 먹고 효과를 봤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프리페민은 약국에서 비용만 지불하면 누구나 구입할 수 있는 안전한 약이고, PMS에 오랫동안 고통 받았던 여성 대중들은 그 안정성과 효과에 너무나도 큰 기대를 건다. 인터넷에서 프리페민에 대한 담론이 오가는 것을 살펴보면 프리페민을 거의 기적의 약으로 묘사하는 글들도 흔하게 보인다. 나도 그러한 글들에 동조하고-나와 또 다른 여성 일반의 판단력 부재를 지적하기에 앞서, 이러한 글들에 동조하기 전에는 PMS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이 선행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복약을 선택했다. 일련의 ‘프리페민 구원자설’은 여성 보건에 대한 전문 의료인들의 의견이 부재하여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본다. 프리페민보다 더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받으라고 권하는 전문 의료인과 그 서비스가 있다면 그냥 알약일 뿐인 프리페민이 이만큼이나 신격화될 일이 있을까 싶다. 복약을 고민하며, 복약을 하며, 부작용을 겪고 복약 중단을 고민하며, 나는 내내 혼자 불안했다.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여성보건의 취약성을 온몸으로 겪어내는 시기였다. 주변에서 프리페민을 먹고 효과를 본 사람들은 내가 부작용을 심하게 겪고 있어서 복약 중단을 고민한다니까 의아해했다. 프리페민은 안전한 약인데? 어떻게 부작용을 그렇게 겪을 수가 있어? 참고 먹어보라, 당장 복약을 멈추라, 저마다 의견들도 다양했다. 엄밀히 따지면 프리페민이 호르몬제가 아니기는 하다. 식물성 생약 성분을 원료로 만들지, 호르몬 제제가 들어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식물성 생약 성분이 PMS를 일으키는 호르몬 중 하나인 프로락틴을 억제하는 작용을 한다. 그러니까, 호르몬제는 아니지만 ‘호르몬 분비와 억제에 작용하는’ 약이다.
경구피임약이나 진통제를 약국에서 살 수 있다고 해서 그 약들이 100% 안전한 약이라고 믿어서는 안되듯이 프리페민도 마찬가지다. 모든 약들이 그렇듯이 프리페민 역시 효과와 부작용에서 개개인 차이가 있다. 단순히 피부냐, PMS냐를 선택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다. 왜 내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가? 왜 나는 완벽히 건강한 몸을 지향할 수 없는가? 그 선택의 간극을 최소화하고 의료 비전문인인 개인이 전담하지 않게 하기 위해 보건 서비스가 있는 것인데, 오지도 아닌 서울 한복판에서 그 보건 서비스가 부재한다는 것이 문제다.
결국 나는 고민 끝에 프리페민 11정을 남겨두고 복약을 중단했다. 끝까지 먹었으면 효과를 봤을 수도 있겠지만 매 순간 뜨겁고 따끔거리는 예민한 피부를 견디는 것도 PMS 못지않게 괴로웠기 때문이다. 복약을 멈췄음에도 계속되는 부작용을 감당하면서 동시에 프리페민 복용 전과 비슷한 만큼의 PMS도 감당하다 보니 생리가 시작 됐다. 마침 장마여서 특히나 더 괴로운 생리기간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주어진 인체모델링 스케줄을 모두 소화하려고 애썼다.
나도 그렇고, 많은 여성 인체모델들(그리고 타 업계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생리 중에도 일을 한다. 언젠가 미대 수업에 모델로 들어갔을 때 다른 강의실에 있던 모델이 급하게 나를 찾아와 탐폰을 빌려 간 적이 있었다. 수업 중에 생리가 시작되어 곤란을 겪는 중이라고 했다. 같은 강의실에 있는 여학생에게 물어봤어도 될 것이고, 수업 담당 하시는 교수님께 양해를 구했어도 되었을 텐데 굳이 다른 강의실에 있던 나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은 생리는 숨겨야 하는 것이라는 사회적 인식을 다시 한 번 재확인 시켜 주었다.
일하는 중에 생리가 시작되는 경우도 생각보다 빈번하고, 생리를 하는 중에 인체모델로 무대에 서는 것도 그저 일상 중 하나일 뿐이다. 딱히 비참할 것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하는 중에 생리가 시작되는 것이 비참한 것이 아니라 일하는 중에 생리가 시작되었는데 그것을 주변에 숨기고, 혼자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비참하다. 생리 중이라고 삶을 멈춰 놓을 수는 없는데, 그럴 수 있는 환경이 사회적으로 잘 갖추어져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을 뿐이다.
이것이 사회적으로 잘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여성들은 생리에 대해 입을 여는 한편으로 자신의 몸에서 생리를 배제하기 위해 애쓴다. 비일상적인 활동이 필요한 날을 위해 몇 달 전부터 생리 주기를 계산하여 경구피임약을 사용해 생리를 늦추기도 하고, 임플라논이나 미레나 등의 체내 삽입형 피임기구를 사용해 생리를 하지 않는 몸을 만들려고 하기도 한다.
나도 인체모델 일을 하며 불편이 많았기 때문에 생리를 중단하려고 했던 적이 있다. 왜 그렇게까지 호들갑들이어야 했는지는 의아하지만 일을 하다가 생리가 시작된 적이 있는데, 생리를 하는 당사자인 나보다 나를 모델 삼아 그림 그리던 사람들이 더 놀라고 당혹했다. 얼굴을 붉히는 이들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왜 의연한지 매번 설명하는 것은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일 뿐더러, 일하다 생리가 시작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생리 중에 장시간 입상(선 자세) 모델을 하는 것이다. 몸을 긴장하고 한 자세로 정지 한 채 몸에 피로를 쌓다 보면 그야말로 생리를 하느라 한껏 수축한 자궁과 질이 몸 밖으로 쏟아질 것 같은 압통이 느껴진다.
밑 빠진다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고, 이렇게 임신이나 생리 등의 이슈로 호르몬이 작용하는 몸에서 자궁이 탈출하는 자궁 탈출증을 얘기하는 것이다. 생리가 터부 되지 않는 사회적 환경이 갖추어져 있었다면 ‘나는 괜찮다’는 얘기가 아니라 몸이 생리 때문에 어떻게 고통스러운지에 대해 더 자세히 얘기하고 작업 환경을 협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애석하게도 나는 모든 장소에서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대신 생리를 중단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비용과 위험 부담 때문에 겁이 나서 실행하지 못했다. 다만 적지 않은 분들이 임플라논이나 미레나 등을 통해 생리를 통제하고 중단하려는 액션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 이러한 액션은 생리를 할지 말지 스스로 선택하고 그 방법을 집행한다는 점에서 주체적이다. 그러나 생리하는 몸 자체를 부정하고 사회 활동을 하는데 생리의 기능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선택이라는 점에서, 사회적 압박에 순응하는 비주체적 선택이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보면, 최초로 생리-그간 주어진 여성성의 수행-를 부정하고 사회적 권리를 획득하는 투쟁이기도 하다.
한 가지(생리하는 몸을 배제하는 것)의 액션이 이만큼이나 복잡한 양상을 가지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는 여성의 역사에서 생리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양상의 복잡함 때문에 여성 극 대다수가 생리를 함에도 불구하고 생리에 대한 담론은 아직 완성되지 못했다. 담론은 보통 생리를 욕하고 부정하고 신격화하고 과장하는 데에 그친다. 이는 언뜻 혐오와도 닮아있다.
그러나 이러한 액션은 완성되지 못했을지언정 분명히 그 자체로 긍정적인 현상인 동시에, 파생되는 다른 긍정적인 현상들도 만든다. 이것이 무엇을 닮았는가가 아니라 무엇에 대해 발언하는지에 대해 집중해야 하고, 무엇을 낳았는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생리는 생리하는 당사자들의 생활 안쪽에 실재하는 고통이며, 고통에 대한 담론을 경청할 때는 담론 당사자들을 일견 안타깝게 여기는 인간성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것이 결여된 판-요즘 일각에서는 생리하는 여성을 피싸개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몹시 멸시적이다-에서 여성 개개인은 힘겨워 하면서도 지속적으로 발언했고, 선택했고, 행동했다.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공공이 가지지 못한 인간성의 부분을 여성 개개인이 모여 서로 공감으로써 성취해냈다.
그렇게 공감의 구역이 커지며 비로소 공공의 눈에 생리가 가시되었다. 계속해서 생리를 긍정하고 생리를 부정하며 우리는 시선과 담론을 획득해냈다. 공공에 생리하는 몸이 가시되고 담론의 불꽃이 튀기까지 정말로 많은 시간이 걸렸다. 생리하는 몸은 일상의 몸이다. 생리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일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당연한 사실이 공공에서 편안하게 받아들여지게끔 하려면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요될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한 번 시작되면 쉽게 멈출 수 없는 것이 담론의 특성임을 믿는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보다는 ‘손에 무엇이 얼마나 쥐어졌는가’에 집중하면 계속 걸을 수 있다. 생리하고 일하고 기록한다. 이 글이 그 담론의 장에 보탬이 되기를, 많은 자들이 생리하는 몸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길 바라고 있다. 일상과, 담론과, 공감의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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