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 제주도 사람들

   제-주-도—-. 하고 천천히 발음해 본다. 제주도에 아무런 연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울림에는 어딘가 팍팍한 정서를 감싸 안아 돌봐주는 향수가 있다. 나를 공격하고 아프게 하지 않는 섬, 제-주-도—-. 비단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제주도까지 내려가서 둥지를 틀고, 책방을 열고, 도자기를 빚고, 음식을 만들고, <바라던 바다>같은 컴필레이션 음반에 본인의 노래를 수록하는 이유는 이 향수에 있을 것이다. 삶의 내/외부를 점철한, 충만한 안전에 대한 향수.

   삶은 많은 점과 굴곡이 총합된 하나의 선이다. 선은 똑바로 가려 하지만 외부의 작용 때문에 수그러들기도 하고, 스스로를 관통할 것처럼 예리하게 치솟기도 한다. 이 선은 그냥 두면 금세 나의 통제 바깥까지 뻗어나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때때로 의도적으로 완만한 선을 위한 장치를 선의 예정지 곳곳에 배치한다. 그래서들 여행을 예정하고 여행을 떠난다. 그래서 때때로 여행은 여가 같기도, 일상 같기도, (생존을 위한)도망 같기도 하다. 이번 여행은 조금 급한 도망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B야, 우리 도망이나 치자. 잠깐 도망쳤다 다시 올라오자. 그렇게 말한 뒤에야 빠른 속도로 떠날 수 있었으니까.

   제주도는 그야말로 도망칠 가치가 있는 섬이다. 근래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관광 자본이 움직이는 섬이 되었고 비자림을 벌목하겠다는 얼빠진 소리가-심지어 실행될 확률이 높다니 정말 당황스럽다-들려 오기도 하지만, 그래도 제주도에는 제주도 사람들이 만들고 지켜온 삶의 모양과 문화가 남아있다. 비자림을 벌목하려는 사람들도 거기에 살지만 비자림을 지키려는 사람들도 거기에 산다. 어느 쪽이냐면, 굳이 따지면 나는 비자림을 지키려는 사람들 쪽이다. 그 작고 올곧고 명징한 삶들은 그야말로 온전하다. 그런 온전함들이 목격되고 맘에 와 닿을 때, 나는 ‘여기로 도망쳐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다시 살아낼 힘을 얻는다.

   이번 글은 도망친 끝에 도달한 곳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짧은 응시이자 여행기이다. 물길을 건너 목격한 그 온전한 삶들을 짧게나마 여기에 기록한다.

레스토랑 와르다


   별다른 여행 계획을 짜지 않고 무작정 여건 되는 시간에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 공항에 내리니 1시가 넘은 시간이 되었다. 공항 가까운 곳 어디서 식사를 할까, 궁리하다가 레스토랑 와르다에 대한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마침 공항 근처 시내에 자리하고 있기도 하고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나면 즐거운 여행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레스토랑 와르다는 제주도 사람인 민경님과 예멘 사람인 알마마리(아민)님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이다. 아민님은 지난해 5월 예멘의 내전을 피해 제주도로 온 500여 명의 난민 중 한 명인데, 난민들에게 쉼터를 제공했던 민경님과 함께 레스토랑 와르다를 운영하며 예멘의 할랄 푸드를 요리한다. 와르다는 아랍어로 ‘꽃’을 뜻한다. 이 이름은 민경님이 제주도에 온 아랍 사람들에게 받은 이름이다. 그 귀하고 예쁜 이름 그대로 제주도 골목 한켠에 레스토랑 와르다가 세워졌다.

   화려하고 이국적인 천이 걸려있는 레스토랑 와르다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실내는 생각보다 작았지만, 그래도 공간이 부족하지 않고 오히려 아늑하게 느껴졌다. 나무와 한지로 마감하여 오히려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창가에 자리를 잡은 뒤 공간을 둘러보았다. 벽면 한쪽에는 와르다 레스토랑의 사람들, 와르다 레스토랑을 찾는 사람들이 모여 찍은 사진들이 걸려있었고 작가 이중섭님의 작품을 흉내 내어 깎은 목각 공예품이 매달려 있기도 했다. 평행이 맞지 않게 약간 기울어 붙은 한지 벽지를 발견했을 때는 벽면을 손으로 쓸며 웃음이 나왔다. 나도 이사를 다닐 때마다 손수 도배를 몇 번 해보아서 아는데 그것은 도배 비 전문인이 애써서 공간을 꾸민 흔적이다. 내가 발붙여 살며 시간을 쌓아야 할 공간. 그런 공간에 대해 직접 궁리를 하고 서툴게나마 수고를 쏟은 흔적을 만난 것이 반가웠다. 내가 도배를 할 때 그랬던 것처럼 많이 고민하고 많이 몸썼을 것이다. 많은 주변인들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 흔적 하나하나에서 와르다님과 아민님이 제주도에서 쌓아 온 관계, 관계들이 읽히는 것 같았다. 아민님의 본가에서 일만 킬로 넘게 떨어진 이곳이 이제 명백한 아민님의 집이었다.

   치킨 캅사와 램 호브스, 사과주스를 주문하는데 서빙 보시는 직원분께서 약간 난처한 얼굴로 자꾸만 아랍 티를 권했다. 연유를 묻자 레스토랑에 아직 냉장고가 없다고, 마침 얼음도 충분치 않아서 사과주스를 시킨다면 미지근한 사과주스를 먹게 될 것이라고 했다. 며칠 뒤에 냉장고가 들어오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 레스토랑은 완벽하다는 푸념으로 가장한 자랑이 조금 이어졌다. 나는 괜찮으니 사과주스를 달라고 했다. 자잘한 얼음들이 컵 절반도 안 되게 든 채 함께 서빙 되어 나온 것이 또 조금 재미있기도 했다. 최대한 얼음을 많이 주시려고 애썼을 주방 사람들을 생각하니 고마웠다. 동행인 B와 나누어 먹으며 치킨 캅사 대신 호브스 메뉴를 좀 더 시킬걸, 같은 얘기를 시시덕거렸다. 얼음이 부족한 것은 약간의 문제도 되지 않았다.

   나는 요즘도 가끔 레스토랑 와르다의 sns를 구경하러 들어가는데 음식에 대한 얘기보다 사람들과 일상에 대한 수다가 훨씬 더 많이 올라온다. 며칠 전에는 손님께서 만들어주신 현판을 달았다는 얘기가 올라왔고, 오늘은 아랍 손님들께서 선물해 주시는 아랍 국가들의 지폐로 벽면을 장식했다는 얘기가 올라왔다. 말 그대로 개척하는 일상이 너무나 소중해서,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하고 계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아민님과 500인의 난민분들이 제주도에 오고 나서 뉴스는 연일 난민들에 의한 범죄 우려를 이야기하며 난민들에 대한 공포를 부추겼고, 낯섦과 공포를 대하는데 서툰 대다수의 사람들은 전쟁과 죽음을 피해 도망 온 사람들을 다시 전쟁터로 돌려보내라고 언성을 높였다. 난민 체류 자격을 취득한 뒤 가족들을 피난시키려 했던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도, 쉼터도 없이 발 묶였다. 제주도에 난민들이 도착하기 전에도 우리 주변엔 많은 외국인들이 있었는데 유독 난민들에게만 그런 공포와 혐오가 쏠리는 모습은 이상했다. 그렇게 대해져도 되는 삶은 없는데도 우리는 그들을 그렇게 대했다. 우리는 필요가 없을 때 그들의 존재를 지우고 구미에 맞는 모습으로만 그들을 목격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지워내고 뽑아내려 했지만 삶은 지운다고 지워지지 않고, 뽑는다고 뽑혀 없어지지도 않는다. 그렇게 홀씨처럼 날아와 어느덧 뿌리박고 꽃피우는 삶도 있는 것이다. 더 많은 꽃이 피길, 그러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하하호호, 밤수지 맨드라미


   B야, 우리 이틀째에는 뭘 할까. 나는 제주도에 용건이 없으니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럼 우리 우도에 가자. 우도에 가서 해안을 따라 자전거를 타자. 그래, 재미있겠다. 그렇게 하자.

   첫날의 해가 지고 잠에 들기 전에 숙소 거실에서 B랑 그런 대화를 나눴다. 언뜻 우도에 가면 해안을 따라 자전거를 탈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나도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 밤 날씨가 흐려 비가 오면 제주도에 있고, 비가 오지 않으면 우도에 가기로 했다. 다행히 날이 비교적 괜찮아서 우리는 우도로 갔다.

   성산항에서 30분에 한대씩 운행하는 우도행 여객선을 타고 내리면 섬 초입에 자전거 대여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고, 그 중 한 군데를 골라 2만 원인가를 내면 전기 자전거를 대여할 수 있다. 자전거를 타지 않은지 6년쯤 된 것 같은데, 아무 생각도 없다가 무겁고 큰 자전거를 인계받으니 그때부터 조금 겁이 났다. 다행히 내 대신 내 몸이 자전거 타는 법을 기억하는지, 어찌어찌 자전거가 서툴게나마 앞으로 나아가기는 했다. 천천히, 천천히. 그렇게 스스로에게 계속 말을 걸며 페달을 밟았다. 고개를 들면 수면 위에 반짝이는 물비늘과, 이끼를 머리에 얹은 우도의 바위들이 보였다. 서툴지만 괜찮았다. 그렇게 천천히 타는 자전거로 10-15분여를 해안 도로 따라 달리다 보면 여섯 마리의 고양이가 사는 수제 햄버거집인 하하호호와 손으로 커피를 내려 파는 독립서점 밤수지 맨드라미가 나온다. 두 가게는 사실 한 집이 아닌가 싶게 꼭 붙어 서서 낮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하고 있다.

   먼저 하하 호호에 들러 30분 정도 웨이팅을 걸었다. 주문을 마치고 대기표를 받는데 사장님께서 “옆에 운영하는 서점 겸 카페 밤수지 맨드라미도 꼭 한번 들러 주세요. 좋은 책도 많이 팔고, 커피도 맛있고, 재즈 좋아하시면 음악도 마음에 드실 거예요!”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옆 가게 홍보를 엄청 열심히 해주시네요?” 하고 물었더니 “이웃 사촌지간에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죠!” 하며 웃으셨다. 두 가게가 사이좋은 친구네요, 했더니 쑥스럽게 웃으며 맞다고, 가장 가까이 사는 친구라고 하셨다. 밤수지 맨드라미의 현관을 열고 안녕하세요, 하자 그곳의 사장님들도 “안녕하세요, 옆에 버거집에서 식사하고 오셨어요?” 하고 물으셨다. 본인의 가게를 어필하는 것보다 서로의 가게를 홍보하는 데에 더 관심이 있어 보이는 두 가게를 보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도 관계가 있고 애착이 있구나, 그냥 관광지 아니고 사람 사는 곳이구나, 두 가게의 사장님들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밤수지 맨드라미에서 파는 책들은 대부분 독립 출간된 책이었다. 독립 출간물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메이저의 것들보다 좀 더 일상에 밀착한, 보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지에서는 못 보던 저작물들이 조금 보여서 둘러보니 제주도에 살며 작업하는 작가들의 책들이 모여 있는 매대였다. 아빠가 심고 길러 이름을 알려준 식물들을 딸이 그려 펴낸 그림책, 일상의 풍경들을 삽화로 그려 수록한 그림책, 본인이 키우는 식물들을 러프하게 드로잉 한 것에 더불어 지인들과 나눈 이야기를 엮어 1대1 사이즈로 인쇄한 만화책, 그 외 일상성이 보이는 책들을 몇 권 골라 매대에 놓자 금세 10만 원이었다. 제주도의 작가들도 본인과 밀접한 삶, 그 정서에 대해 이야기 하느라 열심이어서 한권마다 마음이 동하고 손이 갔다. 여러 권을 한 번에 구입해서인지 사장님들께서 커피를 한 잔 주시겠다고 했는데 식사 시간이 다 되었다고 B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식사하고 그냥 가지 마시고, 꼭 들러서 커피 마시고 가세요.” 사장님들의 마음 씀씀이에 감사하며 일단 밤수지 맨드라미를 나섰다.

   식사를 마친 후 우도의 해변에 서서 펜 선으로 밤수지 맨드라미 건물의 스케치를 얼른 땄다. 서툰 솜씨라 잘 그려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건물을 오래 보며 여기서 발견한 고마움을 남겨 육지로 돌아가고 싶었다. B는 밤수지 맨드라미에서 커피를 대접받는 대신 자전거를 더 타고 싶어 해 그렇게 하도록 두고, 나는 다시 밤수지 맨드라미를 찾아 사장님들과 얘기도 조금 하고 책도 읽고 그랬다. B는 우도에서 제주도로 가는 마지막 배가 출항하는 시간에 맞추어 약간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돌아왔다. 자전거를 타고 해안을 벗어나 섬의 안쪽에 자리한 민가들과 땅콩밭들을 보고 왔다고 했다. 제주도랑 우도에서 파는 땅콩 아이스크림이 다 여기서 나오는가 보다고, 그런 얘기를 하며 웃었다.

   자전거를 타고 배를 타러 돌아가는 내내, 내가 보지 못한 땅콩밭들과 고만고만한 몸집을 가진 집들이 모여 이룬 마을을 생각했다. 조심히 가세요, 또 오세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돌아가는 길에 마주친 하하호호의 사장님이 거듭거듭 인사를 건네주셨다.

   여기에도 사람들이 산다. 관광객과 땅콩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사람들이 산다.

노아 선생님과 은경씨


   제주도 여행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체크아웃 한 뒤 빌린 차를 반납하고 이것저것 돌아갈 채비를 하려면 비행기 시간이 약간 빠듯해 먼 관광지까지는 갈 수 없고, 식당이나 해변에 앉아 시간을 마냥 보내는 것도 좋지만 좀 다른 걸 하고 싶기도 했다. 매 끼니마다 맛있는 음식을 충분히 먹었고, 바닷가를 여러 차례 걸었고, 협재에서 비양도를 보며 노래 부르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숙소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런 나날 끝이니 다른 경험이 궁금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제주도에도 무언가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곳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요가와 비건Vegan식, 사진, 드로잉 클래스, 그런 정보들을 거쳐 내 눈이 머문 건 도자기 만들기 체험이었다. 지어진 지 100년이 넘은 제주도의 고택에서 도자기를 만들어 보세요. 고택에 앉아 햇살이 떨어지는 마당을 구경하며 흙을 만지는 활동은 오래 누적된 긴장과 스트레스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바로 체험 예약을 했다. 체험 장소는 애월 근방의 키 작은 민가들이 모여있는 농촌이었다. B에게 함께 체험할 것을 제안했지만 B는 도자기를 빚기 보다 맛있는 점심 식사를 하고 싶어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 B가 운전 못하고 길눈 어두운 나를 공방 앞까지 차로 데려다주었다.

   그렇게 도착한 노아 공방은 건물과 담이 ㅁ자로 모여 지어진, 가운데 공간에 마당이 있는 제주도의 오래된 민가였다. 한 쪽은 노아 선생님의 생활공간, 다른 한 쪽은 작업과 체험이 이루어지는 공방으로 공간의 쓸모가 구획되어 있었다. 벽이나 지붕을 조금 살펴보고 손으로 쓸어 보니 100년 전에 지어진 그대로의 모습을 최소한의 수리로 유지하시는 듯했다. 공방 내부에 칠 없는 흙벽과 서까래들이 노출된 모습들도 그랬다. 서까래들은 나사못 없이도 저희들끼리 단단하게 몸 붙이고 맞물려 집의 형태를 만들고 있었다. 제주도의 옛날 집 짓는 방식이다. 크기도 모색도 각각 다른 멍멍이들이 마당 그늘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는 것도, 빨래가 널려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집주인의 생활을 구경하는 즐거움이었다.

   노아 선생님은 투블럭으로 멋지게 깎은 반백 머리를 뒤로 올려 묶으신 중년 여성분이었는데 툭 툭 퉁명스럽게 던지시는 어투와 다르게 사람 면면 살펴보는 눈빛이 아주 조심스럽고 따뜻하신 분이었다. 마당 한편에 도자기로 만든 작은 재떨이와 의자가 있어 당연히 흡연을 하시겠거니 생각하고 담배를 권했는데 노아 선생님은 흡연을 하지 않는 분이셨다. 그 한편 자리와 재떨이를 흡연하는 손님들만을 위해 마련하신 것도 노아 선생님이 어떤 방식으로 마음을 쓰는 분인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단서가 되었다.

   은경 씨는 이와 대조되게 체구가 작은 단발머리 아가씨로, 함박웃음 짓는 표정에 망설임이나 구김이 없이 맑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제주도에서는 홀로 여행하는 똑 부러진 여행자지만 육지에서는 마케팅을 공부하며 취업 고민하는 대학생이라고 했다. 혼자 여행 와서 체험 사진을 못 남기니 내가 대신 찍어줄까, 물었더니 환하게 웃었다. 말 고름에서 서투름과 배려심이 그대로 느껴지고 사소한 호의를 호의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예의 바르고 선량하고 명랑한 사람이었다.

   그런 은경 씨와 나는 그날 공방을 같이 쓰는 작업 파트너였다. 중년의 노아 선생님,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려고 고민하는 20대 초반의 은경 씨, 이것저것 해보다가 그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내려놓기로 결정한 30대 목전의 나. 접점 없는 사람들이 모여 얘기를 나누는데 신기하게도 얘기가 어찌어찌 돌아가기는 했다. 노아 선생님이 “자기는 입도해야 할 사람인데 왜 입도를 안 해? 우리집 저기, 옆집이 비었거든? 이게 다 젊은 사람들이 욕심이 많아서 그래.” 하면 나는 젊은 사람들이 욕심이 많은 게 아니고, 실제로 20대 청년들의 평균 월급이 150만 원 정도로 추산되는데 이 돈으로는 홀로서기도 어려울뿐더러 입도에 필요한 기초 자금 모으기는 당연히 힘들다고 숫자를 들이대며 따박따박 따졌다. 그럼 조만간 그 평균 급여 받는 20대 청년이 되어야 하는 은경 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여행 와서까지 현실을 직시하고 싶지 않아요...” 하는 식이었다.

   그러는 틈틈이 도자기 한 점씩이 빚어졌다. 흙 반죽을 토닥여 모양을 잡고, 손과 붓에 물을 묻혀 그 모양을 다듬고, 계속 흙을 살피고 모양이 엇나가지 않도록 매만지며 차츰 원했던 모양이 나오는 것이 꼭 그날의 공방 테이블에서 이루어진 대화 같았다. 각자의 세상에 살던 낯선 타인들이 우연히 테이블에 둘러앉아 서로의 눈을 보며 안위를 살피고 작업을 돕다 보니 마침내는 보다 개인적인 이야기도 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이 열려버리는 것이, 그렇게 안 맞던 결이 맞아가고 관계의 형태가 생기는 것이 흙 만져 도자기 빚는 것과 꼭 닮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태를 완성한 도자기에 코발트 안료로 색을 올려놓고 기다리는 동안 노아 선생님은 지금 비어있던 옆집에 살았던 친할머니 얘기를 짧게 해주셨다. 젊은 시절 빈손으로 입도해 할머니 집 옆집에 세를 들어 살게 된 얘기, 할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의 마음, 그런 얘기를 짧게 짧게 풀어내 주시는 것이 고마웠다. 노아 선생님이 본인의 삶이 어땠는지 들려주시고 나서야 나는 ‘젊은 사람들이 게을러서 그렇다’는 말의 본의를 짚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노아 선생님은 본인의 안위를 돌보지 못하고 삶에 떠밀려 자신의 본질을 잊어버린 채 살아야 하는 청년들을 안타깝게 여기고 계셨다.

   각자 다른 당위를 가지고 살면서도 우리는 끝까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서로의 친구가 되었다. 만든 도자기는 8월 중순에서 9월 초쯤에 택배로 배송 될 것이라는 안내를 마지막으로 받고, 함께 어울렸던 시간을 오래 기억하자고 얘기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간만에 빛나는 시간 되었다는 얘기를 건네주셔서 저도요 선생님, 시간이 반짝반짝했어요. 하고 진심으로 대답할 수 있었다. 시간 맞춰 나를 태우러 온 B에게 부탁해서 차 없이 여행하는 은경 씨를 버스 정류장 가까이 대로변에 내려주고 나니 비로소 여행이 끝났다는 실감이 들었다.

   여행이 끝났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 누구가의 눈에는 띄지도 않을 만큼 작은 하나의 조각으로써 살아내고 있다. 도망치듯 떠났던 여행의 과정을 겪으며 타인의 조각들과 계속해서 마주쳤다. 그 경험에서 그들의 조각이 소중하고 유일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나의 조각 또한 소중하게 보살필 힘을 수혈받고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힘이 떨어질 때쯤 다시 도망치기 위해 나는 나의 조각을 쥐고 힘차게 걷는다. 나는 여기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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