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 엄마 이야기

   나의 왼 팔뚝에는 눈에 띄는 크기의 갈색 점이 하나 도드라지듯 나있다. 엄마도 나와 똑같은 위치에, 비슷한 크기의 갈색 점이 있다. 내 점과 엄마의 점을 번갈아서 보다 보면 내가 어느 날 아무런 근본도 없이 세상에 갑자기 태어난 것이 아니라, 엄마의 몸에 잉태되어 엄마의 피와 뼈를 깎아 먹으며 자라다 느닷없이 연결을 끊고 엄마의 포궁에서부터 탈락해 엄마의 몸을 찢고 나와서야 비로소 한 명의 인간이 되었음을 소스라치도록 느끼게 된다.

   말 그대로 나는 엄마의 안팎을 찢고 세상 밖에 나왔다. 엄마는 나를 세상 밖으로 뱉어 내려고 17시간 동안 진통하며 간호사들에게 수도 없이 뺨을 맞았다고 했다. 17시간 진통을 하니 아픈 것보다 기가 빠져서 자꾸 잠이 오더라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다. 그때 자면 그대로 죽는 거야. 내가 널 그렇게 낳았어. 하는, 짐짓 무게 잡고 채근하는 톤의 목소리도 익숙해질 만큼 들었다. 어느 날 이상함을 느낀 내가 “근데 보통 병원에서 진통 다섯 시간 이상 하면 제왕절개 들어가지 않아? 왜 수술을 안 했어? 진짜 그러다 자면 죽는 건데.” 하고 묻자 엄마는 아빠가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해주지 않아서 수술을 안 했다고 대답했다. 못했다고 하지 않고 안 했다, 라고 했다. 뒤에서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아빠가 애를 쉽게 낳으면 모성애가 안 생긴다고, 요즘 기술이 좋아져서 애를 쉽게 쉽게들 낳으니까 다들 그렇게 박정하다고 대꾸했다.

   엄마는 하지 않아도 될 진통을 하며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나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미신에 가까운 모성신화를 숭배한 나머지 아내를 사지로 몰아넣는 줄도 모르고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하지 않았던 남편 때문에 엄마는 그렇게 고통을 겪었다. 그렇게 몰아넣어진 줄도 모르고 엄마는 그 고통을 필연적으로, 본인이 받아들인 것으로 오인하고 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제왕절개를 못했다(수동적 언어)고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제왕절개를 안 했다(능동적 언어)고 할 수밖에 없다. 나의 질문에서 엄마는 무언가 이상하고 꺼림칙한 것을 느낀 듯도 하다. 나의 질문 이후, 그간 지겹게 해왔던 엄마의 고통스러운 초산 얘기를 더 이상 하지 않게 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욕구와 주권이 침탈된 자의 딸이다. 엄마에게 질문하기 훨씬 이전부터 나는 그것을 인지해 왔다. 그 침탈이 대물림되어 나에게까지 이어졌다는 것도 알았다. 엄마는 침탈의 대물림을 인지하지 못하는데 딸인 내가 더 앞서 인지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태어난 세상이 여성에게 책 읽고 생각하고 경험하는 것을 (그나마 어느 정도)허락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반면 엄마는 그런 세상에 살지 못했고, 때문에 그 고통이 어디서 비롯된 것이며 왜 감내해야 하는지 생각해 볼 여지도 없다. 그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본인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바를 기어이 하지 않으려는 나에게 화를 냈다. 나는 그래서 엄마를 미워했다. 나는 습득한 저항의 언어들을, 엄마를 위해 쓰지 않고 마주 화를 냈다.

   (청소기를 돌려놓지 않아 싸우게 된 날의 싸움, 일부분)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왜 그랬어? 나한테 왜 그랬어?
   왜 혼자 입시 준비하느라 하루 다섯 시간밖에 집에 못 붙어있던 나한테, 전화해서 소리 지르고 집에서 게임하는 동생 밥을 챙겨주라고 했어?
   왜 된장찌개를 끓이면, 그걸 식탁 중앙에 안 놓고 동생 바로 옆에 놔줬어?
   왜 나한테, 이모의 친구라는 그 아저씨들한테, 사근사근하게 맥주 한 잔씩 따라 드리라고 했어?
   왜 그랬어? 도대체 왜 그랬어?

   너는 여자잖아.

   속으로 비명을 지른다. 제발 더 말하지 말아요.
   엄마는 이어서 말한다.

   네 동생이 아니라, 네가 여자잖아. 여자가 해야 될 일이 있잖아. 나는 그렇게 하잖아! 맨날 밥하고! 맨날 청소하잖아! 맨날 귀신같은 니 머리카락, 그거 치우고, 어? 나는 그렇게 하는데, 너는, 너한테 도대체 엄마가 뭐니? 맨날 엄마 우습지? 무시하잖아! 너 엄마, 어? 내가 그래도 네 엄만데, 맨날 무시하잖아! (이후의 말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엄마가 내 머리채를 휘어잡으려고 했다. 나는 엄마를 피해 창틀로 올라가서, 창문을 열고는 더 다가오면 뛰어내리겠다고 발악을 했다. 엄마가 주춤하는 것을 보고는 한 번 더 그렇게 했다. 가라고! 나가! 결국 엄마는 머뭇머뭇 뒷걸음질 쳐서 방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시간이 조금 지날 때까지 나는 창틀에 매달려 서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퍽, 하고 눈물이 터졌다. 그래서 창틀에 쪼그려 앉아 끅끅거리며 울었다. 스스로를 인질 삼아 엄마를 협박하는 짓은 너무 추잡하고 끔찍했다. 아무리 그래도 엄마는 나를 사랑한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엄마에게 애착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 그것을 알았다. 나는 엄마를 통해 세상에 나올 때부터 지금까지 엄마의 안팎을 찢고 밖으로 도망치는 딸이다.

   반면 엄마는 가족들 모두를 사랑했기에 집에 속박되는 자발적 약자였다. 그 표현의 방법이 섬세하지 않을 때가 많고 강제로 학습한 정상성의 공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결국 그 사랑 때문에 엄마는 스스로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종국에는 엄마가 진다. 으레 더 사랑하는 쪽이 질 수밖에 없는 것이 관계의 룰이다. 내가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죽지 않고, 엄마가 엄마의 발로 방 밖으로 나가 방문을 닫은 것은 엄마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는 가족들을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 밖으로 도망칠 수 있었지만 엄마는 그러지도 못할 것이 자명하다. 이 자발적 속박이 세상에서 요구하는 모성과 돌봄의 실체라는 것을 알자 치가 떨렸다. 네가 사랑하는 네 가족들의 온존을 위해 기꺼이 너를 희생하고 국가 대신 너를 갈아 넣으라는 요구는 너무 뻔뻔하고 잔인하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빨래, 청소, 설거지, 동생 밥 챙겨주기, 애교 많은 딸, 남에게 자랑할 수 있는 예쁜 딸, 순종하는 흰 꽃 같은 딸, 자발적 약자, 모두 다 끔찍했다. 그래서 열아홉 살 겨울에 늦었지만 본격적으로 입시를 해보겠단 핑계를 대며 상도동에 있는 고시원으로 도망쳤다. 웃기게도 그렇게 나에게 ‘여자’를 외치던 엄마가 나를 도왔다. 첫 달 고시원비를 내주고 함께 옷가지며 책 같은 짐을 날라주었다. 나 여기서 잘 해볼게. 고마워. 엄마는 혼자 차를 운전해서 집에 가며 울었다고 한다.

   상도동 고시원으로 도망친 뒤 나는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동생이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엄마가 빨아 준 옷을 입고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학교에 가고 엄마에게 용돈을 받아쓰는 동안 나는 상도동 고시원 공동 주방에서 혼자 라면을 끓여 먹고 스스로 옷을 빨아 건조대에 널고 버스를 타고 입시 글짓기 학원에 다니고 학원비를 내려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가끔 엄마랑 통화를 하고 그것보다 더 가끔 엄마를 만나 밥을 먹었다. 그렇게 꼭 맞추어 10년이 지나가자 엄마랑 나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가 엄마의 속에서 나왔는데도, 엄마와 나의 왼팔에는 비슷한 점이 비슷한 위치에 있는데도, 엄마와 나는 완전히 분리되어 명확히 다른 세상에 사는 두 가지의 실재였다.

   기묘한 일이다. 그 지긋지긋한 사랑이 닿지 않는 물리적 거리를 확보하고 나서야 엄마를 이해할 여지가 생겼고, 엄마를 생각하는 데 시간을 쓴다. 지긋지긋한 혈육의 집에서 도망치기 전까지 엄마는 삶 전반에 걸쳐 나의 압제였다. 그런데 각기의 실재로 분리된 지금은 엄마를 윗사람으로써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사랑하는 감정이 남지 않았다. 그런 거대한 감정을 일으키기에 저 개인이라는 존재는 이제 너무 작다. 안쓰러울 뿐이다. 엄마를 두려워하고 미워하고 사랑하며 자랐는데, 이제 그것의 곱절이 넘는 시간 동안 엄마는 나에게 안쓰러울 것이었다. 기묘한 일이다.

   얼마 전 엄마가 통화 중에 눈물바람 하던 것이 기억나서 그 인근 지역으로 일을 하러 가는 김에 엄마 집을 찾아갔다. 이것저것 바쁘게 정신없이 지내고 있다는 말도 했고, 또 일이 있어 다음날 오전에는 나가봐야 한다고도 했고, 일을 마치고 짬을 내어 들르는 것이라고도 언질을 했는데 엄마는 다 듣고 알겠다고 해놓고도 늦은 시간에 온다고, 정이 없다고 철없는 애처럼 칭얼거렸다. 야속하고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엄마는 일생 동안 이만큼 바쁘고 고단해 본 적이 없을 테니 저럴 수도 있겠다, 납득이 됐다.

   엄마는 새로 산 전자레인지의 사용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냥 평범한 전자레인지이고 버튼 몇 개 눌러본다고 해도 고장 나지 않을 텐데 엄마는 함부로 만지다가 고장이 날까 봐 겁이 나서 내가 집에 들러 사용법을 가르쳐주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내가 이것저것 기능을 살펴보고 엄마에게 알려주자 엄마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제 다 알겠어, 하고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대충 들은 것 같은데 진짜 알겠어? 그럼 방금 알려준 찜 기능 한 번 켜봐.
   (당황해서 약간 언성이 높아진다) 아니야, 내가 나중에 천천히 해볼래.

   알려달라면서요? 봐 줄 사람 있을 때, 지금 배워.

   엄마의 손은 자꾸 더듬거리며 틀린 버튼을 눌렀다. 나는 엄마의 손을 끌어 맞는 버튼에 가져가고 싶은 기분을 참으며 보고 있기만 했다. 그거 아니잖아요. 다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버튼 누르고, 그치. 다시 해봐. 엄마는 끝끝내 엄마가 원하는 기능을 찾지 못했다. 몇 번이나 다시 설명을 하고 보여준 뒤에야 엄마의 손이 더듬더듬 맞는 버튼을 찾아갔다. 이제 아네, 아까는 왜 모르면서 안다고 했어? 복잡해 보여서 그랬다고 한다. 엄마는 큰 시험을 통과한 것처럼 다행스러움, 시원함, 그런 게 비치는 웃음을 지었다.

   모르는 것을 모르는척하면 영원히 모르는 채로 둬야 한다는 거, 그런 식으로 남겨 두는 것이 늘어나면 끝끝내는 본인을 놓게 되고 그렇게 살다 보면 스스로가 초라해진다는 거, 그런 걸 알려주고 싶기도 했지만 잠자코 입을 닫았다. 엄마에게 내가 만만하지 않을 만큼 자랐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내가 엄마보다 더 커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엄마는 스스로 또 얼마나 초라해질 것인가를 생각했다. 딱 전자레인지 사용법을 숙지한 것만큼의 성취감을 망쳐서는 안됐다. 그것은 엄마의 일상에 있어 얼마 안 되는 양의 경험이니까. 이렇게 가만히 엄마의 성취를 인정하는 것이 나에게는 일종의 돌봄, 기존과 다른 형태의 사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 안타까움은 그러한 애정이다.

   그 다음날 아침에는 간만에 엄마가 해 준 계란찜을 먹었다. 엄마의 계란찜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인데 그간은 전자레인지 사용법을 몰라 해줄 수 없었다고 한다. 전자레인지가 바뀐 탓에 익숙지 않아 그런지 계란찜은 예전보다 조금 더 퍽퍽하고 단단했다. 그 계란찜 안에 전자레인지 사용법을 알려줘서 고맙다는 말이 들어있는지, 지겹게 싸우면서도 애정을 잃지 않고 나름의 헌신을 다했던 엄마가 담겨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내가 일상을 지키며 습득한 언어가 (나의 일상 밖으로 나가지 못하더라도)나만을 위한 것이 아님은 알겠다.

   한 지인은 이제 우리 세대가 부모를 학습시키고 가르쳐야 한다고, 그러나 그것을 부모 세대가 알면 자존심 상해하고 반항할 것이기 때문에 그 방법이 교묘하고 온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날의 에피소드를 들려주자 엄마를 잘 돌보네, 교육 잘 하네,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짐을 지고 싶지 않아서 그때 손사래를 치며 질색했지만 이미 내가 습득한 것들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 권한의 침탈을 대물림한 엄마를 이해함으로써 엄마를 돌보는 데에, 그리고 그 대물림이 다시 지속되지 않도록 대물림의 굴레를 끊는 데에 쓰이고 있다.

   침탈 당한 자의 딸로 태어나 끊어지지 않을 것 같은 굴레를 끊어내야 하는 칼로 자란 여자들. 우리들은 엄마들이 하지 못한 고민을 필연적으로 이어받았다.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대물림할 것인가? 언어를 학습할 기회도 없던 엄마를 위해, 이 질문 이후의 무언가를 부여받을 다음 세대를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나로서 살아내기 위해, 나날 속에서 질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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