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데이비드 젤너의 <쿠미코, 더 트레저 헌터>: 사라지는 여성
- 내가 사랑한 영화들: 은수(연재 종료)
- 2019. 9. 4. 17:18
적응할 수 없는 사회
이 영화는 한 여성의 실종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 쿠미코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물, 사회 부적응자로 주로 이야기된다. 쿠미코가 일하는 회사가 무슨 일을 하는 회사인지는 명확히 나오지 않는다. 그는 회사에서 연차가 좀 쌓인 직원으로 보인다. 사장은 수시로 쿠미코를 불러 차 심부름을 시키는 것은 물론, 퇴근 후 자신의 양복을 세탁소에 맡기거나 부인에게 줄 결혼기념일 선물을 사 오도록 지시한다. 쿠미코는 사장에게 줄 차를 끓인 뒤 침을 뱉을까 말까 고민하다 황급히 침을 삼키기도 한다. 그에겐 몇 번이고 반복된 일일 것이다. 그에게 무기력은 일상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장은 지각한 쿠미코를 불러 앉혀놓고 묻는다. 자네 나이가 몇이지? 이제 슬슬 나갈 때가 되지 않았나? 사장은 노골적으로 퇴직을 권유한다. 지금 쿠미코가 버티고 있는 바람에 젊은 여성들에게 기회가 돌아가지 않는다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에게 모욕을 준다.
쿠미코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사회가 쿠미코라는 존재를 적응하지 못하도록 하는 걸까. 계속 살고 싶다면, 지금 당장 네 꼬라지를 좀 바꿔. 친구와 만나. 수다를 떨어.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해. 애를 낳아. 니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혼자 살고 있는 거야. 그럴 거면 차라리 집으로 당장 내려와. 그의 엄마조차도 쿠미코가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지 않다고 비난한다. 길거리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도 반갑지 않다. 빨리 집으로 돌아와 혼자 있고 싶다. 대단치 못한 삶을 산다고, 짐이 될 뿐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세상으로부터 이미 한참 멀어져 버린 쿠미코. 쿠미코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걸까? 사장이 쿠미코에게 퇴직을 권유하며 모욕을 주던 날, 쿠미코는 회사 법인카드를 들고 미국으로 떠난다.
규율에 따라 다음 단계로 넘어가시오
대학교 4학년 무렵, 나는 취업전선과 거리를 두고 부러 무용한 일들을 하며 내게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늘리고 싶었다. 버스를 타고 시 외곽에 있는 도서관에 가서 소설을 읽고 루마니아어 알파벳을 외웠다.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졸업하면 스물네 살. 보통 일 년씩은 휴학하니까 스물넷에서 여섯이면 대개 졸업해서 취직을 해야 한다. 정해진 수순에 맞춰 살아가도록 짜여진 일정표를 받아든 기분이었다. 어서 다음 단계의 모습으로 진화하라고, 누군가 사정없이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아니, 잠깐만요. 저는 아직 무엇을 할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좀 더 고민할 시간이 필요해요, 게다가 결혼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다고요! 회사에 다니는 것보다 다른 공부를 해보고 싶고, 다른 경험을 해보고 싶어요! 여태 계속 학교에만 있었는데! 하지만 시간을 벌려면 돈이 필요했다. 지방엔 일자리가 없어 홀로 상경한 서울은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곳이었다.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고민해보기도 전에, 떠밀리듯 취직을 하게 되었다. 취업난이 극심한데도 불구하고 쥐꼬리만 한 월급이나마 받으며 일할 수 있게 해주심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불평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그 사이 돈을 모아 유학을 가겠다던 꿈은 자연스럽게 포기하게 됐다.
회사에 들어 간 이후로 내게 일어난 일들 또한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빤한 일들이었다. 성희롱이 있었고, 꺼림직했지만 어영부영 넘어갔고, 성추행이 있었고, 뒤늦게 화가 났다. 그와 동시에, 시스템을 가로질러 쏟아지는 높으신 분들의 무분별한 지시 속에서 휘청휘청 끌려다녔다. 사장은 지각한 쿠미코에게 묻는다. 일하기 싫냐? 나 또한 그런 질문을 받을까 두려웠다. 주어진 일이 늘어나도 그만큼 내 능력을 인정받는 거라 생각하며 더 열심히 일했다. 빌어먹을. 고등학교 사회 교과서에서 감명 깊게 배운 프로테스탄트의 직업 윤리의식이 내가 느끼는 사회적 부조리를 문제적으로 바라볼 수 없게 하는 데에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러한 제도권 교육 아래에서 자라났기 때문인지, 열정이나 성실함을 최우선의 윤리로 생각하고 열심히 이용당했다. 실제 사회에서 직업/노동 윤리는 권력을 쥐고 있는 계층이 그렇지 않은 계층의 말과 행동을 통제하기 위해 오/남용되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여성의 노동력이 사회적으로 저평가 받고 '대체 인력'으로 취급되는 일자리를 권장하는 회사가 결혼 적령기에 이른 경력직 여성에게 불안정한 노동시장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는 것처럼, '맥락'은 늘 더 많이 가진 자들에 의해 피지배계층의 불안을 입막음함으로써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잃어버린 삶을 찾아서
사실 이 영화는 여성 노동시장에 대한 문제의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거나, 그에 대항하여 격렬한 분투를 벌이거나, 혹은 그러한 사회 속에서 여성이 어떤 식으로 사회적 실종을 경험하는지에 관해 이야기하는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는 매우 환상적이고, 기묘하며, 어떤 면으론 인종차별적이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인공 쿠미코의 ‘보물’과 ‘허구’에 대한 집요함의 끝에 그가 스스로 “실종된 여성”이 되는 것이 매우 상징적으로 다가왔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음울한 음악과 어둡고 춥고 눅눅한 정서는 그동안 습자지처럼 사회의 부조리를 감내하며 살아야 했던 평범한 한 여성의 삶처럼 느껴졌다.
기르던 토끼 분조를 공원에 놓아주며 자유를 주었으니 어서 가라고 재촉하는 장면은 거의 유일하게 쿠미코의 감정이 도드라지는 장면이다. 왜 가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그녀의 외침은 사실 그 자신에 대한 외침이기도 했을 것이다. 선택할 수 있음에도 선택할 수 없는, 오도 가도 못하는 삶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그는 떠났다. 그가 그토록 집착했던 ‘보물’은 어쩌면 지금껏 잃어버린 꿈이나 살아보지 못한 삶, 말해지지 못한 것들일지도 모른다. 눈발이 휘날리는 강가를 헤매며 추위에 몸을 떨던 그는 의식을 잃어간다. 어느새 눈은 그쳤고 세상은 고요하다. 어느새 그는 영화 <파고>에서 봤던 들판과 철조망에 도착하게 된다. 영화 속 남자가 돈가방을 묻고 꽂아둔 주황색 주걱을 발견하고, 쿠미코는 달려간다. 조금 전까지 해진 이불을 망토처럼 뒤집어쓰고 있던 그의 차림새는 어느새 보송보송해져 있고 얼굴에는 혈색이 돈다. 그리고 드디어 ‘보물’을 찾았을 때, 토끼 분조가 그의 눈앞에 나타난다. 그는 처음으로 활짝 웃으며 한 손에는 돈가방을, 한 손에는 분조를 안아 들고 관객을 뒤로 한 채 유유히 벌판을 걸어간다.
쿠미코는 결국 실성한 채로 실종된 것일까? 아니면 진정 그가 원하는 삶을 찾아 떠난 것일까? 알 수 없다. 현실은 늘 그를 배제해왔기 때문에 그 또한 현실을 배제하기로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정신이 멀쩡한 인간이라는 건 사실, 온갖 부조리로 가득한 사회에 적응해버린, 자기-삶의 부적응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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