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테리 쥐고프의 <판타스틱 소녀백서>: 소녀는 어떻게 성장하는가

이거나 먹어라, 세상아!

    영화는 이니드와 레베카가 졸업식장을 뛰어 나와 학사모를 집어 던지고 학교를 향해 쌍뻐큐를 날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니드가 졸업을 해서 아쉬워하는 건 찌질한 데니스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것뿐이다. 이니드와 레베카는 우선 돈을 모아 독립해서 같이 사는 것을 제1목표로 삼는다. 서로를 제일 잘 안다고 생각했던 둘은 졸업식을 기점으로 점차 다른 방향으로 가기 시작한다. 졸업식은 했지만 이니드는 학교에 남아 마지막 미술 수업을 들어야 했고, 레베카는 곧바로 까페에 취직하게 된다. 둘의 각기 다른 행보는 그들이 입는 옷에서도 드러나는데, 영화 내내 이니드는 이전과 같이 옷이나 머리를 통해 변덕스러운 자신의 감정과 상태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반면, 사회인이 된 레베카는 중반부터 깔끔한 셔츠와 슬렉스를 입기 시작한다. 이니드는 여전히 모든 것이 불만이다. 그는 레베카의 원성에 못 이겨 영화관 매점 직원으로 일하게 되지만, 매점에 오는 손님들을 신랄하게 빈정댄 탓에 단 하루만에 잘리고 만다. 레베카는 그런 이니드가 한심하다는 듯 화를 낸다. 어떤 멍청이가 하루 만에 짤릴 수 있어? 세상 모든 것이 이니드에게 “빨리 어른이 되어야지!”라고 다그치는 듯하다. 하지만 이니드는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내가 뭘 할 수 있지? 다들 재미없게 왜 이러는 거야!

한밤의 부동산 채널

    나와 친구 Q는 ‘이니드와 레베카’ 그 자체였다. 아니, 정확히는 이니드와 이니드였던 것 같다. 학교는 거지 같았고, 같은 학교를 다니는 애들은 모조리 원숭이떼 같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유치한 힘겨루기 놀이를 하는 남자애들도, 어떻게 하면 앞머리가 더 잘 고정되는지 고민하는 여자애들도 모두 머저리들 같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좋은 대학을 목표로 하고 번듯한 직업을 꿈꿀 때, 우리는 소설가나 만화가 혹은 디자이너나 조향사가 되고 싶었다. 인기 많은 남자애들에겐 코딱지 만큼도 관심이 없었고, 거의 눈에 잘 띄지 않는 허옇고 여리여리한 문학부 남자애나 잘생겼다고는 도무지 생각하기 어려운 사진부 선배를 좋아했다. 영화를 보다보니 잊혀졌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우리도 독립하기 위해 부동산 앞에 붙은 전단지를 유심히 보고 다녔다. 수능이 끝난 뒤 한동안 내가 즐겨보던 채널은 늦은 새벽 매물 정보를 PPT처럼 보여주는 부동산 채널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둘 다 같은 지역 국립대에 가게 되면서 그 계획은 자연스럽게 잊혀졌다.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르자, 영화의 어떤 장면들은 데자뷰처럼 느껴질 정도로 우린 그들과 비슷한 생각을 했고 비슷한 계획을 세웠다. 사회성이 떨어지는 아이들은 대체로 그런 궁리를 하며 반항기를 보내는 걸까? 그 시절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꽉 막힌 사회에 빅엿 날리기?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정신승리? 부모님의 그늘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기? 우린 우리만의 기준을 갖고 싶었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무엇이 나를 마음 쓰게 하는지

     이니드는 심약한 중년 남자 시모어를 만나게 된다. 찌질하고 처량한 괴짜 시모어에게 동정심을 느낀 이니드는 그가 이상형의 여자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어느날 시모어의 집에서 옛날 상업용 포스터를 발견하게 된다. 포스터에는 퉁퉁한 입술을 가진, 어딘가 좀 우스꽝스러운 흑인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이니드는 시모어에게 포스터를 빌려 미술 수업 과제물로 제출했고, 모두들 포스터의 그림을 불편해한다. 선생님은 그에게 그 포스터를 과제로 제출한 의도가 무엇인지 묻는다. 늘 시니컬함을 유지하던 그가 더듬더듬 대답한다. 이 그림이 불편한 건 사실이지만,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그는 처음으로 미술 수업에서 칭찬 받았고, 미술대학 추천서를 써주겠다는 선생의 제안을 받게 된다.

   이니드가 말한 '불편함'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어쩌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이 옳은지 쉽게 답을 찾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언제까지고 사람들을 골탕 먹이거나 빈정대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걸 알지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스스로도 답답하기만 하다. 주위는 계속해서 이니드를 채근한다. 직업을 가져라, 대학을 가야한다, 넌 대체 뭘 하고 싶은 거냐…. 이니드가 데니스나 시모어 같은 사회부적응자에게 애정을 느꼈던 것도, 사회가 그들을 바라보는 방식에서 자기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나는 그런 이니드에게서 ‘나’를 보았다. 자꾸만 뒤처지고 허공을 휘적대며 헤매이던 ‘나’를.

나는 '나'를 모르고

     고등학교 무렵 나는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접었다.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론 미술학원과 미대 진학을 뒷받침하기 어려운 가정 형편 탓이었다. 반면, 집안은 좋았지만 명문대 의대에 가야한다는 부모님의 압박 속에 있던 Q도 결국 어린시절 꿈을 접었다. 그때까지 그림 그리는 것 외에 다른 일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크게 좌절했고 몹시 우울했으며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며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집안 사정으로 문창과 진학도 포기했다. 어차피 글을 쓰는 건 배우지 않아도 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내심 서러웠다. 그 뒤로 꽤 오랜 기간 가정환경이나 부모님을 탓해왔는데, 동시에 그 '탓'을 하면서 자존심을 챙길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충분히 붙을 수도 있었는데 피치 못할 여러 사정에 의해 하지 못한 것뿐이야. 이니드의 방황에 유독 더 깊은 공감을 느꼈던 건 아마 그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걸 정말 원하기는 하는지, 그래서 그것을 선택하게 되었을 때 뒤따르는 것들을 감당할 각오는 되어 있는지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게 두려웠다. 떠밀리듯 결정을 내리고 낙심한 것까지도 분명 사실이었지만, 쉽게 결정은 내리지 못했던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기 확신"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세상 누구보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궁금했으나, 나는 나를 몰랐고 무엇보다 "잘할" 자신이 없었다.

    영화 말미에 결국 추천서를 받지 못하게 된 이니드는 낙심한다. 차선책으로 받아들이려던 컴퓨터 회사 취직 자리도 거절하고, 레베카와도 같이 살지 않기로 한다. 늦은 저녁, 네온 사인 간판 아래로 그가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어디론가 향한다. 그리곤 운행이 중지된 버스 정류장 앞에서 아무도 타지 않는 버스를 타고 마을을 유유히 떠난다. 자살일까, 아니면 자신의 미래를 찾아 떠난 것일까. 만약 후자라면, 그 후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여전히 불확실한 내 미래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궁금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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