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김지운의 <장화, 홍련>: 우리는 왜 미치는가

어떤 기억들은 남아

     

    아주 어릴 때의 기억들 중 어떤 것들은 한참 자라고 나서도 남는다. 어느 주말, 동생과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보며 놀고 있었다. 그날은 부모님이 하루종일 집을 비웠고, 다른 때보다 늦게, 오후 8시 즈음 집에 돌아왔다. 부모님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왜 동생의 숙제를 챙기지 않았는지 나를 호되게 혼냈다. 문방구에서 무언갈 복사해오는 일이었는데, 동생과 노느라 깜빡한 것이다. 나는 펑펑 울며 어둡고 인적이 드문 길을 걸어 문방구에 다녀왔다. 잔뜩 의기소침해진 나는 조용히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때 왼편에 걸린 거울로 가족들이 보였다. 엄마와 아빠, 동생이 상을 둘러 앉아 늦은 저녁을 먹으며 TV를 보고 있었다. 웃고 있었다. 불 꺼진 현관문 앞에 그대로 서서 잠시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땐 나도 어린아이였는데, 장녀라는 이유로 늘 누군갈 돌보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거울에 비친 가족들을 바라보던 '나'는 여전히 어딘가에 남아 가끔 떠오른다. 그리고 최근에야 이러한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 '장녀 콤플렉스'가 된다는 걸 깨달았다.


아픈 게 정상이지, 미치는 게 당연해.


    영화 속 수미는 이 비운悲運  가득한 집안의 '장녀'다. 그는 엄마를 유폐시키고 동생 수연을 죽게 내버려 둔 새엄마 은주가 되었다가, 동생 수연을 따뜻하게 돌보는 맏이가 되었다가,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하는 동생 수연을 귀신으로 본다. 수미의 죄책감을 표현하는 이 역할들 속에 정작 그는 없다. 정신병원에 있을 때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거나, 열린 창문 틈새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사실 그 모습이 수미의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닐까. 그가 분하던 역할들을 모두 내려놓고 나면, 텅 비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죽은 엄마도 마찬가지로 텅 빈 존재였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수미가 엄마에게 느끼는 감정은 죄책감과는 조금 다르다. 장녀는 이미 어릴 적부터 '엄마 됨'을 학습한다. 모성애를 느끼고 베풀도록, 가족에 대한 돌봄이 딸의 '미덕(효용가치)'이라는 명목 하에 오만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것이 바로 장녀다. 장녀와 엄마는 거의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밀착되어 있다. 수미가 귀신(엄마)에게 느끼는 공포는 동질감이다. 둘 모두 가족 내에서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가족 내 다른 구성원이 기대하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가치를 인정받아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또한 "사람"이다. 엄마는 자살을 했고, 동생 수연은 죽은 엄마와 옷장에 깔려 죽었다. 아빠라는 인간은 동생을 죽게 내버려 둔 새엄마와 재혼해서 아무런 죄의식도 없는 얼굴로 산다. 까무러칠 일이다. 수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이 모든 사건에 대해, 온전히 자기 자신을 통해 분노하거나 슬퍼해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누구의 것인지, 누구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더 이상 알 수 없다. 결국 텅 빈 자신 안에 여러 입을 빌어 그 미친 연극을 벌인다. 왜 나한테만 이해하라고 그러냐고, 대체 어떻게 모를 수 있는 거냐고 울부짖으며, 자루 안에 가장 취약한 나(수연)를 담아 죽도록 팬다. 아픈게 당연한데, 아무도 수미가 느끼는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수도 없이 '다른 사람'이 되어 이해해 온 일들을.

     

여성들 간의 관계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영화 말미에 수미를 정신병원에서 만나고 집에 돌아온 은주도 귀신(수미, 수연의 친모)을 본다. 귀신을 보지 않는 건, 유일하게 아빠 무현 뿐이다. 무기력한 아빠 무현은 실은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고도 편히 살아온, 무고의 탈을 쓴 가부장이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수미가 왜 그 미친 역할극을 하는지, 은주가 왜 귀신을 보는지, 수미, 수연의 친모가 왜 자살했는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느낄 "필요"가 없었다. 이 영화에서 귀신을 보는 건 모두 '여성'들이다. 사촌 선규의 아내 미희도 발작을 일으키는 와중에 주방 싱크대 밑에서 귀신을 본다. 그는 자신의 남편처럼 딱 잘라 "아니"라고 말할 수 없고, 무현처럼 조금 불편하다는 듯 무심하게 앉아 있을 수 없다. 이 집에서 여자들이 미쳐가는 이유를 구태여 말로 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다. 멀쩡히 숨을 쉬는 두 남성들과 달리 여성들의 미친 역할극의 속박, 모계로 대물림되는 죄책감의 정서에 그는 호흡 곤란과 함께 발작을 일으키고 만다.

     

    이 영화는 여성들의 그러한 불안과 공포의 징후를 '순간' 포착해낸다. 새하얀 원피스 잠옷이 말려 올라가 드러난 수연의 다리를 훑고, 피에 젖은 팬티를 비추며, 수미 수연 자매를 괴롭히는 은주의 교태롭지만 부자연스러운 대사들 속에서 그들 안의 관계성은 다소 뻣뻣하게 연출된다. 그들 사이의 친연성이 고작 생리주기가 같다는 것으로 상징되는 것만 봐도 그러하다. (그리고 그 장면은 결국 그들 모두가 수미의 역할극에 불과하다는 복선 중 하나라는 점에서도) 이쯤 되면 남성에게 도대체 "생리"가 무엇이기에 위태로운 공포(긴장감) 혹은 여성들 간의 얄팍한 친연성으로 묘사되는지 진지하게 묻고 싶어진다. 이 영화가 그들만의 정서를 깊이 있게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 역할을 이해하고 그들 안의 복잡 미묘한 감정을 표현해 낸 여성 배우들 덕분이 아닐까. 특히나 죄책감과 공포, 슬픔이 뒤엉킨 수미의 눈빛과 얼굴은 이 영화를 오래 기억하게 만들었다.


이 공포는 어디에서 오는가

     

    공포영화를 싫어했던 내가 이 영화를 개봉 당시 극장에서 보게 된 건 순전히 친구와의 내기에서 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내게 공포를 느끼게 하기보단,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을 느끼게 했다. 살려 달라는 수연의 약한 신호와 죽은 엄마를 뒤로 한 채, 갈대밭을 걸어가는 수미를 보며 나는 앞으로 그가 어떤 고통 속에 놓이게 될지 잘 알기에 슬펐다. 극 중 수미의 말처럼 어떤 공포는 귀신이 아니라, "말해봤자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 속에서 온다. 그리고 대개의 여성들은 이미 어릴 때부터 자신들의 "말"이 통하지 않는 남성 중심의 무가치한 언어 속에서 그러한 공포를 미리 학습해왔다.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가족의, 혹은 다른 사회 구성원들을 반사판처럼 비추어 낼 뿐인 '나'는 내가 오랫동안 연기해 온, 가장 익숙한 역할이었다.


    그 불안과 공포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수미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단 한번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 수미 너에게, 그리고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미치는 게 당연하다고, 아픈 게 정상이라고. 그리고 더 이상 너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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