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엄마에게

    엄마에게.


    엄마, 사실 원고를 한 주 쉬었어요. 내가 의식이 온전치 않은 사이에 자살기도를 해서 응급실에 갔었거든요. 그러고 나니까 온몸이 몸살 난 것처럼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원고뿐만 아니라 일도 펑크를 냈고, 요즘 듣고 있는 수업도 펑크를 냈어요. 일상을 놓지 않으며 살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자책감이 아주 컸어요. 스스로를 잘 돌보지 못했고, 혼자서 잘 견디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큰 한주였어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꾸역꾸역 엄마한테라도 편지를 써보는 거예요. 더 멈춰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게다가 글이 책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글을 쓰는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두 주나 쉴 수는 없어서 이번 주에는 꼭 원고를 쓰고 싶었어요. 주제도 미리 몇 주 치를 추려놓은 상태였는데 엄마는 참 안 도와주네요.


    사실 이 글은 엄마를 위해 쓰는 게 아니에요. 왜냐면 엄마는 글을 읽더라도 이해하지 못할 테고, 그걸 아는 나는 엄마에게 이 편지를 보여주지 않을 거니까요. 굳이 따지자면, 이 글을 읽을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가상의 엄마일 수도 있겠네요. 그러니까 좀 더 솔직하게 하고 싶은 말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꺼내 보려고 했다가 엄마의 막말에 가로막혀 침몰해 버린 말들을요. 그렇게 엄마 좋을 대로 짜증을 내고 막말을 하면, 엄마는 속이 시원한가요? 나는 엄마의 욕받이를 한 번 할 때마다 문장 하나도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태가 돼요. 물론 엄마에겐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엄마의 딸인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에요. 글을 못 쓰는 상태가 된다는 것은, 내가 스스로의 정서를 컨트롤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뜻이니까요.


    내가 중학교 3학년 땐가, 엄마 앞에서 글을 못 쓰겠다고 울면서 하소연한 적이 있는데 엄마 기억해요? 그때는 지금이랑은 좀 다른데요, 그때는 빨리 뭔가 써내야 한다는 강박과 조급함이 너무 심했던 때라 그랬던 것 같아요. 나는 그때 글을 써서 대학교에 가려고 했었으니까요. 그때 엄마가 좀 위로해주고 다독여줬으면 좋았을 텐데, 엄마는 ‘속이 비어있는데 속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라든지, ‘할 말이 너무 많아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상태’라든지 하는 걸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럴 수 없었겠죠, 이해해요.


    나를 완전한 별종 보듯이 쳐다보던 엄마 얼굴이 기억나요. 그때 나한테 네가 하고 싶은 일인데 왜 못하겠냐고, 그게 말이 되냐고, 그냥 쓰면 되는 거 아니냐고 했던 거 기억나요. 하기 싫으면 지금이라도 관두라고, 엄마는 애초에 헛짓거리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던 것도요. 네가 뭐 대단한 사람이 되려고 그런 소릴 하냐고 말했던 것도요. 그 후로 나는 공부가 어렵거나 우울해도 가족 중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 잘 견뎠어요. 네가 힘들 게 뭐가 있냐는 말이 겁나서 그냥 혼자 잘 견디는 사람이 됐어요. 근데 엄마, 그렇게 말해 놓고도 내가 뭔가 상 받을 일 있을 때마다 시상식은 꼬박꼬박 챙겼잖아요. 내가 상을 탔다는 것도 집에 말하지 않게 되기 전까지는요. 왜 그랬나요? 이유가 궁금해요.


    엄마, 제발 자기보다 약한 사람한테 엄마 좋을 대로 막말하지 말아요. 나는 지금껏 태어나서 한 번도, 엄마나 아빠나 동생이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내 비위를 맞춰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남에게 막말을 하거나 사람을 때린 적이 없어요. 엄마가 자기보다 약하고 아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사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동등할 수도 있어요. 엄마가 하는 말들이, 한 사람이 건강하게 자라지 못하게 방해할 수도 있어요. 모든 문장에 책임이 있듯이, 모든 말에는 책임이 있어요. 좋을 대로 말하고 잊어버려도 괜찮은 말은 세상에 없어요. 물론 내가 이렇게 떠나고 나면 엄마 옆에는 엄마보다 약한 사람이 남지 않겠지만, 그래서 엄마는 자연히 말을 조심히 하게 되겠지만, 그래도 엄마, 제발 이후에 엄마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엄마 좋을 대로 막말하지 말아요. 그런 식으로 대해져도 되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언젠가 알게 되면 좋겠네요.


    책임...책임이요. 그래서 나는 글을 쓸 때마다 감정의 배설이 되지 않도록 노력했어요. 내 목적 없는 감정에 맞아서 누군가가 아프면 안 되잖아요. 이 편지를 씀으로써 그 노력의 과정들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언젠가 다시 노력할 수 있게 되는 때가 오겠죠. 밥 잘 먹고 잠 잘 자다 보면,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되니까요. 그런데 글의 문제와 달리, 엄마와 나의 관계는, 애석하게도 그런 방식, 기다림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이제 엄마를 잘라내려고 해요. 나는 많이 졌고, 많이 지쳤고, 이제는 견딜 에너지가 없어요. 희생과 인내만 담보할 뿐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는 이 관계를 보듬을 힘이, 이제는 없어요.


    엄마, 이해해요. 엇나가는 딸이 야속하고 미울 수도 있죠. 산고를 그만큼 겪었는데 그 핏덩이가 애초부터 고와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죠. 이해해요. 그런데 내가 엄마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 엄마가 나에게 덜 밉고 덜 원망스러운 사람이 되는 건 아니에요. 엄마는 이해를 못 하겠지요. 계속 나한테 물었잖아요. 자식이 어떻게 부모를 버리냐고요. 엄마 힘들다고요. 엄마도 희생하고 감내한 게 많을 거예요. 당사자가 아닌 나로서는 짐작만 해볼 뿐이지만요. 근데 서로 희생과 감내만 하고 행복을 주고받지 못하는 관계라면, 원망과 본전 생각만 남는 관계라면, 나 역시도 엄마에게 불필요한 존재 아닐까 생각해요.


    나한테 말했잖아요. 엄마는 동생과 나를 똑같이 대했다고요. 그런데 엄마가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엄마 스스로 속이는 엄마를 빼고 다른 주변인들은 다 알고 있어요. 말이나 행동 전에, 두 자식을 보는 눈빛부터 벌써 차이가 나니까요. 그 주변인들도 참 재미있는 게, 그걸 다 알면서도 엄마를 이해하고 엄마한테 져주라고 해요. 엄마가 막말해도 그냥 듣고 참으래요. 내가 엄마의 자식이니까요. 자식은 그래야 하는 존재래요. 그게 자식의 필요래요. 나는 필요를 충족해주는 자식은 못 될 것 같아요. 미안해요.


    이제 와서 내가 바랐던 부모의 역할이라든지, 그런 말을 할 생각은 없어요. 그런 말을 정연하게 늘어놓기에 나는 많이 지쳐있고, 엄마도 듣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요. 소리 지르는 엄마 얼굴, 엄마의 그런 얼굴만 생각해도 나는 미칠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이 미칠 것 같은 기분을 견디다 보면, 내가 엄마의 자식이라 포기해야 했던 많은 것들이 떠올라요. 더 나은 환경, 더 좋은 기회, 더 나은 사람으로 자랄 가능성, 엄마가 나에게 주지 않았던 것들, 기싸움한다며 나에게서 너무나 쉽게 빼앗았던 것들이 자꾸 떠올라서 괴로워요. 엄마 탓을 하고 후회해요. 왜 더 빨리 엄마를 잘라내려고 결심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너무 보잘것없고 추하게 느껴져요. 내가 정말로 좋은 사람이라면 이런 못난 생각 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나는 이렇게 속이 꼬인 채로 자랐어요. 속이 아름답지 못하고 바르지 못하게요.


    여섯 살 땐가, 엄마는 내가 오랫동안 먹고 싶어 했던 천오백 원짜리 감자 핫도그를 나한테는 안 사주고 동생한테는 몰래 사줬잖아요. 내가 엄마가 지어주는 밥을 먹고 학교에 가던 시절에, 엄마는 항상 찌개 솥과 반찬을 동생이 앉은 자리에 가깝게 놔줬잖아요. 그때는 고작 감자 핫도그와 된장찌개였지만 그 감자 핫도그와 된장찌개가, 시간이 지나니까 동생은 유학 가고 싶단 얘기를 하지 않았는데도 동생의 나중을 위한 유학 적금이 되고, 그 동생의 나중이란 것이 내가 더 나은 환경을 포기해야 하는 이유가 되었잖아요. 나중에 커서 각자 살게 되었을 때도, 아주 가끔 가족이 모이게 되어도 엄마는 항상 동생에게 방을 내어주고 나를 거실에서 재웠잖아요. 이건 부족함의 문제가 아니라 차별과 모멸의 문제에요. 엄마는 모르겠지만요.


    오늘 외할머니가 계신 중환자실에서 만났잖아요, 엄마. 외할머니가 소변줄이며 링거며 콧줄이며 산소줄 같은 것들을 온몸에 주렁주렁 달고 시체처럼 누워 계신 것을 보는데, 외할머니는 나한테 잘해줬으니까, 엄마의 말과 달리 나도 사람이니까 측은지심을 느꼈어요. 그런데 외할머니가 엄마의 엄마고, 엄마의 엄마가 엄마를 그런 사람으로 길러냈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 측은지심이 사라지더라고요. 물론 어쩔 수 없었겠다는 어림짐작을 안 하는 건 아니에요. 외할머니는 자식이 많잖아요. 그 많은 자식들을 어떻게 혼자서 전부 다 온전히 기를 수 있겠어요. 그런데, 감정의 작용은 그런 생각들보다 훨씬 더 앞서는 것이더라고요.


    어쩌면 나는 엄마 말대로 인간성이 덜 된 사람일지도 몰라요.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두고도 내 뒤틀린 부분을 어쩌지 못하는 내가 너무 추악하고 더럽게 느껴져서, 속이 터질 것 같아요. 울고 싶어요. 죽고 싶어요. 그래도 당장 그 앞에서는 티 내지 않으려고, 내가 그런 추악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많이 애썼어요. 외할머니 손도 잡아드리고, 곧 퇴원하실 거라고 말도 걸고, 의사 선생님께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어요. 엄마는 모르겠지만요.


    내가 그냥 도리 하러 온 거라고, 외할머니 뵙고 바로 갈 거라고 그랬더니 엄마가 도리를 할 거면 추석에도 집에 왔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잖아요. 그런 모멸을 받았어도 명절에 집에 가서 가만히 잔소리를 듣고, 방이 세 개나 있는 집인데도 거실에서 자는 게 도리라면 나는 이제 도리 하지 않으려고요. 아까 죽고 싶다고 썼지만 실은 살고 싶어요. 좀 사람답게 살고 싶어요. 글도 쓰고,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지만 괜스레 주눅 들어 미뤄 놓았던 작업들도 하나씩 하고, 배우고 싶었던 거 배우고, 나를 모멸하지 않는 사람들 틈에서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고 싶어요.


    엄마, 나는 오늘 도리를 했나요? 엄마가 고마움을 느끼고 흡족할 만큼의 행동을 했나요? 물론 삶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거지만 당장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물어보고 싶어요. 대답은 없겠지만요. 잘 지내요, 엄마. 엄마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엄마를 잘라내는 것이에요. 나는 오래전에 엄마의 손아귀를 떠났고, 엄마만 그것을 몰랐을 뿐이에요. 나는 아주 오래전에 엄마를 떠나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엄마를 보고 있었어요. 어릴 때는 다른 선택지가 없어 모멸을 견뎠지만, 이제는 아니잖아요. 살고 싶어요. 더 이상 나를 스스로 갉아먹고 싶지 않아요. 엄마 옆에 있는 동안 나는 아주 많이 갉아 먹혀 아주 이상한 모양이 되었지만, 이제 더 이상은 그럴 수 없어요. 해야 할 일이 많아요. 나는 잘 살고 싶어요.


    엄마도 혼자 이것저것 잘 견딜 수 있을 거예요. 나를 엄마가 이렇게 길렀으니까, 엄마도 견디는 방법을 알 거라고 그냥 내 멋대로 마음 편하게 생각할게요. 엄마. 잘 지내요. 원하는 대로 자라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엄마. 잘 지내요. 진심으로 그렇게 바래요. 잘 지내요.


2019년 9월 26일. 

딸이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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