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축하를 빙자한 고발
- 어쩌다 퀴어: 무지
- 2019. 10. 4. 14:31
이 글이 업로드되는 날은 제 아버지 환갑잔치 전날입니다. 일가친척들을 모시고 잔치를 하는데 나름 이벤트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열심히 쓰긴 썼지만 잔치 자리에서 저는 이 편지를 읽지 못할 것입니다. 가족들에게 낱낱이 밝히기 힘든 이야기들을 담고 있으니까요. 직접 말하지도 못할 거면서 뒤로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비겁한 짓이긴 합니다. 아버지 흉 보는 이야기라 더더욱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쓰지 않으면 속이 터져버릴 것처럼 답답해서 썼습니다. 개인적인 속풀이를 하게 된 점 죄송하지만 그동안 쓴 글들도 전부 제 개인적인 글이었으니 구애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는 항상 제 글을 저희 가족이, 당사자가 보게 될 가능성을 생각합니다. 뒷감당을 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염두에 둔다고는 하지만 '배 째라'는 태도가 더 큽니다. 글을 쓰는 것이 저를 자유롭게 하고 살아갈 힘을 주니 이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편지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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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 시대에 환갑잔치는 옛말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친가, 외가 친척들을 모두 모시고 아버지 환갑생신 잔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일찌감치 올해 봄부터 동생이 아버지 회갑잔치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이야기했을 때 저는 두 딸 중 맏이임에도 소극적으로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친한 친구가 아버지 환갑을 맞이해서 요즘 유행이라는 상패니 돈다발케이크니 여러가지를 했다고 말했을 때에도 남의 집 이야기 듣듯 넘겨버렸으니 말입니다. 저는 아버지 생신이, 게다가 환갑이라는 점이 매우 불편했습니다. 누군가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나에게 소중하고 좋은 사람이기 때문일 것인데, 반대로 누군가의 생일이 불편하고 껄끄러운 것은 그가 불편하고 껄끄럽기 때문이겠죠. 네, 그렇습니다. 저는 제 아버지가 불편하고 껄끄럽습니다. 아버지의 형제, 자매, 매제, 매부이신 큰아버지, 고모, 이모, 외삼촌들께서는 누구보다 가까운 분들이시니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게 못마땅하고 배은망덕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줄곧 한 집에서 살고 있는 엄마와 저, 동생이야말로 아버지에 대해서 무어라고 한 마디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 아닐까 싶습니다. 한 집에서 살면 그 사람의 인간성을 속속들이 알 수 있으니 말입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31년간 제가 겪어본 바로 아버지는 정말 같이 살기 힘든 사람입니다.
90년대 초반에는 흔했다고 하지만 아버지는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저에게 술과 담배를 사오라는 심부름을 자주 시켰습니다. 고주망태가 되어 밤늦게 퇴근해 집안 세간을 전부 부수며 분풀이를 하는 것도 매일이었습니다. 도망갈 곳이 없는 아주 작은 집에서 저와 어머니, 동생은 덜덜 떨 뿐 아버지를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린이였던 제가 어땠을지는 다 예상이 되실 것 같아 길게 덧붙이지는 않겠습니다. 어른이 된 지금에서 보니 만약 이웃집에서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당장 112에 신고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명실상부 가정폭력범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어렸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서른둘의 성인이 된 지금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사는 게 힘들어서 말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산전수전 다 겪은 분들이시니 너무도 잘 아시겠지요. 사는 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요. 하지만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그렇게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분풀이를 하시기에 저는 ‘아버지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되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세상에 아무 이유 없이 남에게 화를 내도 되는 권리를 가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유가 무엇일까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가족이 아버지에게 무엇을 잘못했기에 아버지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일까. 엄마, 나, 동생이 잘못한 것은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안 나왔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고민해봤는데 결국 생각해낸 것이라곤 이것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잘못은 아버지를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다. 아버지가 이런 사람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결혼한 죄다. 그렇다면 나와 동생의 죄는 무엇인가. 바로 태어난 것이 잘못이다. 아버지가 먹여 살려야 할 존재로 태어난 죄다.’
태어난 것이 잘못인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아버지가 행하는 폭력에 속수무책 당하면서 저는 태어난 것을 죄로 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이가 겪기에는 죽을 것 같은 폭력들을 당하면서 저는 제 삶을 비관하게 되었고 자라서는 살고 싶지 않아하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많은 순간들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며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숨을 쉬는 것도 음식을 넘기는 것도 역겨운 느낌과 살아있는 것이 화가 나는 상태를 자주 겪었습니다. 살고 싶지 않은 것이 과연 아버지 폭력 때문일까? 나보다 더 심한 가정폭력을 당한 사람들도 잘 살고 있는데, 심지어 동생도 나처럼 삶을 힘겨워하지는 않는 것 같은데 왜 나는 이럴까 스스로에게 부단히 물어보았습니다. 동생과 속 깊은 이야기는 주고받지 않았기 때문에 동생이 삶을 힘들어하지 않는다는 것은 제 추측에 불과하긴 합니다. 알고 보면 저보다 동생이 더 심각한 우울과 폭력 후유증을 겪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이따금씩 하기도 하니까요. 그럼에도 가정폭력을 당한 모든 사람들이 우울을 겪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내가 심신이 미약한 탓 아닐까’라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아버지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어 이제 과거에는 연연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 거라 다짐하고 노력해 봐도 정신을 차려보면 원점이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버지 탓을 하고 있는 저 자신을 보면서 이런 방식으로는 해결이 안 되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로 인한 응어리가 크게 져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언젠가는 사그라들 것이라 생각하면서 조그마한 일만 발생해도 상처가 끌어올려지는 이 고통의 사슬을 그저 참고 견디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버지가 태어난 것을 축하해야하는 생신은 그런 저에게 또 다시 상처를 들춰내는 일이니 기껍지 않았던 것이지요. 아버지 때문에 이 모든 고통이 시작되었는데 그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라니, 싫었습니다.
환갑은 잘 안 챙기는 것임에도 고모님, 이모님들이 나서서 너희 아빠는 환갑잔치를 해야한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아버지가 투석 환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버지가 투석을 시작한지 벌써 3년이 흘렀습니다. 투석을 시작할 당시를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초상 치르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본인이 곧 죽을 사람처럼 굴었으니까요. 신장이식을 받거나 투석을 시작하지 않으면 당장 죽을 거라고 병원에서 으름장을 놓았고 아버지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자신의 삶을 한탄하기 시작했습니다. 일평생 고생만 하다가 이제는 몹쓸 병에 걸려 죽게 됐다니 억울하고 분하다고요. 투석하기는 끔찍하게 싫고 신장이식을 받아야겠다고 고집 부리셨습니다. 신장이 어디 쉽게 구해졌겠습니까. 형제자매이신 여러분들께서도 신장 공여자로 적합한지 줄줄이 병원에 가 검사 받으셨던 것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하지만 여러분께서는 연세도 있으시고 건강도 썩 좋지 않으신 데다가 각각 가정이 있으시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개인의 재난을 가족이 떠안게 되는 한국사회의 특징대로 저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혈액형이 B형이고 동생과 어머니는 A형 그리고 제가 B형이었던지라 신장이식을 해줘야 할 적합자는 저라고, 얼굴도 어머니는 하나도 안 닮고 아버지만 닮아 이렇게 못생겼는데 신장까지도 똑같이 생겨서 이식을 해줘야 하는 팔자가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제 입장이 되어보십시오.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어린 시절에는 분풀이 대상이어서 욕만 먹다가 성인 되어서는 신장을 떼어줘야 한다니 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가 밥은 안 굶기고 학교도 보내주고 심지어 대학교도 보내줬으니, 그만하면 아주 곱게 잘 길러줬다고 할 수 있으니 키워준 은혜는 갚아야하는 걸까요? 이런 생각을 제 스스로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저는 ‘아, 이것이 스톡홀름 증후군(납치범에게 연민과 고마움을 느끼는 피해자 심리)이구나’ 했습니다. 살아있는 것이 지긋지긋하지만 살려는 줬으니 그 은혜를 갚아야한다고 말입니다. 아버지는 정말 고도로 똑똑한 지능범이었습니다. 이식을 고민하던 초기에 아버지는 저에게 신장 줘서 (미리) 고맙다고 인사를 했었습니다. 그 고맙다는 인사를 받고 저는 길길이 날뛰었습니다. 물론 가족들 없을 때 혼자 날뛰어서 아무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내 평생을 망쳐놓고 이제 미래까지 앗아가려는 도둑놈이 나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고 나를 낳았던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SF영화처럼 자신의 신장이 망가질 것을 대비해서 장기를 뗘내기 위해 지금까지 기른 것이 아닐까 라고요.
제가 이렇게까지 나쁜 생각을 할 정도로 아버지가 심한 잘못을 했는지 의문이 드실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저 살고 싶어서 애쓴 것밖에 없는데 제가 너무 가혹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실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 아버지는 고생한 만큼 충분히 대접받았고 누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동남아, 북유럽, 아프리카 등으로 해외여행을 다니고 취미로 골프, 등산, 싸이클 등을 즐기셨으니까요. 또한 집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전부 다 행동했기에 여한이 없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화가 나면 집안 세간을 다 집어던지면서 화를 냈고, 좋으면 늦은 밤에도 큰 소리로 노래 불렀고, 가족들이 다 자고 있는 시간에 운동을 한다고 온 집안 불을 훤히 켜놨으니까요. 이 집에서 혼자 사는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잠을 방해받고 감정 쓰레기통이 되는 등의 피해를 지속적으로 입으면서 우리 가족은, 아니 저는 인격이 없는 것처럼 대해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건으로 대해지는 경험을 지속적으로 하면 존재감이 약해집니다. 자아존중감도 떨어지고 우울증도 겪고 삶의 의욕도 거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런 저에게 신장 이식은 죽으라는 뜻과도 같았습니다. 정신적으로만이 아닌 물리적으로도 상해를 입히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몸마저도 빼앗기면 살아갈 방법이 전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식을 고민하던 그 당시에는 제 상태가 어떠한지 스스로 잘 알지 못하고 그저 멍하다가 화내다가 울다가를 반복했었는데 이런 것들을 가족들에게는 철저히 숨겼었습니다. 아버지께 이식을 해드리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굳혀가고 있었기 때문에 가족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를 했던 것입니다. 죽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어머니나 동생 혹은 아버지에게 들키면 계획이 허사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요.
마지막 결정의 순간에 아버지는 저에게 신장을 받지 않으셨고 투석을 시작하셨습니다. 끝까지 저에게 이식받으시려고 했더라도 아마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식 절차 중 공여자는 정신과 상담을 받게 되어있는데 거기에서 걸러졌을 것이니 말입니다. 심리가 온전치 못하니 수술하기 적합하지 않다는 결과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식을 하지 않게 된 저는 허탈했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만신창이인 저 자신을 데리고 이 끔찍한 삶을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만이 남아있었으니까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 나이에는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가져야하고 그런 사회의 기준 따위는 이미 저와 먼 것이었습니다. 지금 밥을 먹고, 어딘가에 가서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하고, 운동을 하는 것만이 중요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었을 테니까요. 그렇게 지내다보니 어느덧 일자리도 생겼고 연애도 시작했습니다. 시간의 흐름은 놀랍게도 감정이나 생각을 바꾸어놓고 견뎌내게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직도 무언가를 이뤄야겠다, 사는 것이 좋다, 살고 싶다는 마음은 잘 느껴보지 못했지만 사랑에 빠져 달달한 시간들도 나름 맛보았습니다.
그렇게 3년이 흘렀습니다. 아버지의 3년은 어땠을지 문득 궁금해지네요. 투석을 하는 것이 거의 시한부처럼 느껴지니 언제 죽어도 놀랍지 않아서 저희 가족들이나 여러분들이나 환갑잔치를 꼭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겁니다. 투석을 하면 정말 그런지 이야기를 들어보면 투석 하고도 10년, 15년을 살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쇼크로 금방 죽었다는 사람도 있고 각양각색입니다. 아버지는 어떠실지 본인도 모르고 의사도 모르고 저도 모르고 여러분도 모를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실까요 부처님이 아실까요, 아니면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실까요. 사는 게 뭐 이리 대단하다고 요란을 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살기 힘들다 갖은 요란은 다 떠셨으면서 정말 죽을지도 모르는 순간이 되자 아버지는 살고 싶다고 그만큼의 요란을 또 떠셨습니다. 아버지를 보면 딱 떠오르는 옛말이 있습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말입니다. 나중에 아버지 묘비명으로 써드려야겠습니다.
아버지가 저를 힘들게 하는 것들은 아직도 수없이 많지만 그 중 제일은 결혼하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뜨겁게 사랑해서 연애하는 사람이 있으면서 부모님께 소개시키면 되지 무엇이 문제냐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저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인데 제 애인을 이 자리에서 소개시키면 여러분이나 저희 부모님이나 많이 놀라실 것 같아서 데려오지 못했습니다. 제 동생은 친구로 위장해서 데리고 오라고 했지만 말입니다. 제 애인은 여성입니다. 제가 커오는 동안 지켜봐왔기에 아시겠지만 저 또한 여성이고요. 저는 한국 사회가 말하는 동성연애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환갑 생신잔치에 데리고 오지 못했습니다. 셋째 고모부 생신 때는 첫째 오빠가 며느리 될 여성분을 데리고 왔고 넷째 이모 생신 때는 첫째 언니가 사위 될 남성분을 데리고 와서 인사시켰지만 말이에요. 저 또한 제 애인과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있는데 함께 오지 못했습니다. 성별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말이에요. 이 무슨 불합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이제는 저를 조금이라도 존중해서 행복하길 바란다면 저희 커플을 응원하고 지지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라면 반대만이라도 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네요. 그것이 저를 살게 하는 일일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를 겪으며 처절히 배운 것들이 많은데 사랑은 그런 것들을 실천할 수 있는 장이었습니다. ‘나를 사랑하기에 스스로 약자가 된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 함께 지내려면 사소한 부분까지 상대방을 배려해야 한다. 내 존재가 상대방에게 지옥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와 같은 것들 입니다. 아버지가 나에게 준 고통으로 배운 삶의 지혜입니다. 나름 잘 실천하며 애인을 만나고 있다 자부합니다. 애인의 의견을 직접 들어봐야겠지만 말입니다. 예전에 8시에 하는 주말 드라마에서 어떤 딸이 가족들을 속이고 몰래 결혼을 하는데 하객 아르바이트로 친아버지가 참석하는 웃지 못 할 장면이 나온 적이 있습니다. 저는 제 아버지가 그렇게 되지 않을까 속으로 진지하게 걱정을 했습니다. 아버지, 제 삶의 중대한 일들에서 소외되고 싶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셔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저는 많이 참았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저 스스로 대견하니까요. 사랑은 그런 저를 살아있다 느끼게 하고 조금이나마 사람 같다고 느끼게 합니다. 애인과 제가 앞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아버지가 축복해주시면 정말 감사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 생신이지만 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부모자식으로 엮여 지금까지 살아오며 아버지는 저의 많은 부분을, 어떻게 보면 삶 전체를 쥐고 흔들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진다기보다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것 아닌가 생각해온 저로써는 제 삶을 함께 건실하게 쌓은 것이 아니라 망쳐온 아버지를 많이 탓하고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환갑을 맞이해 이렇게 잔치를 하고보니 이만하면 됐지 않나 싶습니다. 삶은 고통의 나날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달콤하고 즐거운 날들도 숨겨놓았으니까요. 아버지도 아버지 나름 행복하게 사시면 되고 저도 저 나름 행복하게 살면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나 아버지나 살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왠지 까마득하게 느껴집니다. 원망과 복수심으로 삶을 낭비하기에는 아까운 시간 아니겠습니까. 아버지, 예순한 번째 생신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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