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당신과 나를 닮은 아이

 

    애인은 가끔씩 돌발 질문을 던져 놀라게 만들곤 했다. 이번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달달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작스런 질문을 했다. 

    “만약 내가 남자여서 나 닮은 아이를 낳아달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거에요?”

    아기를 낳는 것에 대해 꽤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지라 입장은 확고했다. 질문을 듣자마자 생각이 주마등처럼 흘러갔고 당혹스러웠다. 애인과 내 뜻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아파서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쯤이었나 친한 사촌 오빠가 아기를 낳고서야 아기를 ‘나의 일’로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동안 아기가 싫었기 때문에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친한 사람이 (나는 싫어하는) 아기를 낳다니, 당혹스러웠다. 그런데 아기가 왜 싫지? 친척 오빠는 어떻게 아기를 낳을 수 있었지? 이런 고민들이 됐다. 생각은 몇 단계로 정리됐다. [아기는 인간이다. 나를 포함해 도처의 다양한 사람들 전부가 인간이다. 인간은 외적‧내적으로 고난과 고통을 겪는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커다란 고통을 겪어서 심지어 자살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낳은 아기가 그런 고통을 안 당하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인간을 낳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좋지 않다는 답이 나왔다. 타인의 고통은 둘째 치더라도 내 내면의 황폐함과 괴로움을 견디기 힘드니 말이다. 시공간이 우그러지다 못해 한 점으로 사라지는 우울과 무기력, 끝없는 존재 부정, 섭식장애와 불면증은 살아있는 것 자체를 고되게 했다. 나야 이미 태어나서 살고 있으니 어쩔 수 없지만, 내가 낳은 아기가 이런 일을 겪는다면 그것은 비윤리적인 일이었다. 왜 아기를 낳아서 나와 같은 피해자를 한 명 더 늘려야 한단 말인가. 

    더욱이 내가 겪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릴 더 큰 고통들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고통은 주관적인 것이니 타인의 고통을 올곧이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따라서 비교할 수 없다 생각함에도 내가 겪는 것보다 훨씬 큰 고통들이 많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뉴스에서 책에서 영화에서 주변 지인들로부터 들은 믿기지 않지만 실제로 벌어진 사연들은 인간의 고통이 도대체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가 한탄하게 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총기난사 사건을 일으킨 가해자의 엄마가 사건 발생 후 10년에 걸쳐 쓴 책이었다. 저자는 아이가 그러지 않았으려면 자신이 어떻게 했어야 하는지를 끈질기게 추적하지만 끝끝내 실패한다. 모자지간이라도 엄마와 아이는 ‘독립된 개인’이며 사건은 이미 벌어지고 난 후이기에 아이를 이해하는데 실패하고 마는 것이다. 저자인 엄마도 처절하지만 아이 또한 안타깝긴 마찬가지였다. 이런 일들을 목격하면서 (나를 포함해)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것이 흉악범죄고 가해자와 피해자는 항상 존재해왔다. 개인 층위에서 벌어지는 가해-피해뿐만 아니라 가족, 또래집단, 학교, 지역사회, 국가 등의 인간이 모여 이루고 있는 다양한 층위의 집단에서도 폭력이 발생하지 않던가. 집단 대 개인, 집단 대 집단 등으로 범주를 넘나들며 말이다. 인간이 이룩한 문명은 권력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에 따라 계급이 나뉘어있다는 사실은 어떠한가. 회사에서, 모임에서 종종 계급의 실체를 느낄 때마다 분노와 패배감 등을 느꼈다. 만약 아기를 낳는다면 그 또한 이 사회에서 인간으로 살아갈 것이니 어딘가에 위치하게 될 것이다. 내 계급에 따라 자식의 계급도 결정되는 추세가 강해지고 있으니 계급에 따라 출산율이 달라지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했다. 내가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는 것은 계급의 하층부에 위치하기 때문일 수도 (재산이 없고 경제력도 낮으며 심지어 이성애에서 벗어나 있는 여성)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다고 해도 수동적으로 현실에 짓눌려 아기를 안 낳겠다고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계급의 상층부에 있다면 그 자신의 위치 때문에 ‘존재만으로도’ 하층부에 폭력을 가하게 되는 셈이 될 것이고 하층부에 있다면 삶이 힘들어질 것이니 말이다. 계급을 깨고 싶어 발버둥 쳤으면 쳤지 재생산하는 일에 기여하고 싶지 않았기에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계급을 거부하는 일처럼 보였던 것이다. 사랑하는 내 아이를 값싼 노동력으로 자본에 제공할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태풍, 지진, 황사, 미세먼지, 물 부족 같은 자연환경의 악화도 더욱 심해지고 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마음에서 가깝다 여기는 사람들이 하나 둘 아기를 낳기 시작했고 아기를 갖고 싶다 말했다. 아기에 대한 내 의견을 얘기해줬지만 ‘그럴 수 있겠다’라는 반응 후에 자신의 결정을 바꾸지는 않았다. 친하다 생각한 사람들이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인정하려해도 씁쓸하고 외로운 일이었다. 

    이런 나에게 애인이 ‘너와 나를 닮은 아기를 갖고 싶어’라고 말했다. 질문의 형태가 다르긴 하지만 결국 의미는 이것이니 말이다. (애인과 나 둘 다 여성이어서 아기를 가질 수 없다는 점은 아직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애인이 원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어도 다 들어주고 싶은데 나의 굳은 생각 때문에 ‘못 한다’는 점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나를 너무도 사랑하기에 자신의 존재와 내 존재를 섞은 생명을 원하는 것일 터였다. 아무리 아기를 반대한다지만 사랑하는 이를 닮은 생명이라니 상상만 해도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아기를 원하는 애인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너무 사랑하니까 그런 마음이 들 수도 있는 거였다. 전혀 다른 두 마음이 부딪쳐 울컥 눈물이 났다. 아기를 낳을 수도 없고 안 낳을 수도 없고, 사면초가에 처한 것 같았다. 아기만 생각한다면 낳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지만 애인의 마음도 소중했다.  

    아기를 낳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고민은 삶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생각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는 문제처럼 보였다. 고통을 뛰어넘어 생존하는데 인간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 혹은 괴로움 속에서도 나 자신보다 타인을, 약자를 더 위하는 숭고함이 인간에게는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기도 했다. 아무리 삶이 고통스럽다지만 쉽게 끝내지 못하는 이유 또한 여기 있었다. 삶보다 죽음이 더 낫다고 타인들을 설득시킬 강력한 논리를 아직 찾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켜 또다시 그를 ‘삶’으로 밀어 넣어야 한다는 당위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될 수 있으면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지만 태어났으면 어쩔 수 없이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인 것이다. 

    이런 고민과 별개로 우리 같은 퀴어 커플이 가족 구성권과 재생산권(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에 있어서 2등시민 취급을 받으며 차별과 사회 억압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애인과 나는 레즈비언 커플이고 한국에서 ‘법적으로’ 결혼할 수 없으며 자식을 낳기 위해서는 약간의 의료적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이성애 커플도 시험관 아기, 정자 기증 등의 시술을 받아 아기를 낳고 있으니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낳은 아이를 우리 두 사람의 아기로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아주 커다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성애 커플에서는 너무도 쉽고 당연하고 심지어 ‘권장되는’ 일이 퀴어 커플에게는 금지되어있다는 점에서 차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애인은 나에게 ‘내가 만약 남자라면’ 이라는 조건을 달아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점도 마음이 아팠다. 남성이 아닌 지금 여성인 그대로, 당신과 나를 닮은 아기를 가지면 어떨까 라고 물어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말이다. 당신을 닮은 새로운 생명을 보고싶다는 것도 사랑의 일종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지금, 그렇게 해줄 수 없다는 점이 마음 아픈 것이다.    

    애인과 나에게 이성애 커플처럼 아기를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있는 후에야 내가 앞서 한 고민들이 우리 둘에게 첨예한 문제가 될 것이었다. 이런 고민은 이성애 커플만이 할 수 있는 ‘배부른’ 고민이었다. 퀴어 커플도 아기를 낳아 기르는 것을 장애물로 느끼지 않는 상태에서 그 다음에 아이를 낳을지 말지를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사회의 낮은 출산율에 걱정이 많으신 분들이라면 더더욱 이성애 가족 외에 다양한 가족들에 대한 재생산권 보장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사회에서, 우리의 아이를 태어나게 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지 아닌지를 애인과 치열하게 다퉈보고 싶은 것이다.    

    덧붙임 – 남성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남성을 만나서 아기를 가질지 말지 고민하면 되지 않냐고 말할 사람들에게 고합니다. 설사 내가 다음에 사랑하게 되는 사람이 남성일지라도 내가 퀴어 당사자라는 점이 변하지는 않으므로 그에 대한 연대와 지지의 의미로 퀴어에게 결혼권과 재생산권이 주어지기 전까지는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낳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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