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정체성 수난기(4)
- 어쩌다 퀴어: 무지
- 2019. 9. 20. 16:41
‘사람들의 성은 여성/남성이라는 젠더로 구분되어 있다’는 깨달음은 ‘사람들의 신체가 사실은 여성/남성이라는 성별로 구분되어 있다고 볼 수 없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과는 또 다른 층위의 문제고 심각하게 고려할 사항이었다. 아무리 옷차림과 외모를 성별을 뛰어넘어 따라할 수 있다고 주장하더라도 여성/남성이라는 젠더는 사회에서 작동하고 있으니 말이다. 외적으로 남성적으로 꾸미고 행동해도 결국 ‘여성’이라는 점을 강요받게 되는 때가 있는 것이다. 공중화장실이나 수영장에서 뿐만 아니라 온갖 서류들을 뗄 때, 병원에 갈 때, 결혼할 때, 회사에 입사할 때와 같이 매우 중요한 순간들에 말이다. 트랜스젠더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방식도 이런 것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었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놓인 이 벽은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해졌다. 원인을 알면 바로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별이 여성과 남성의 신체적 차이에서 발생했다고 하면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기 십상이었고 부계사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면 동어반복에 불과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처럼 온갖 이유들이 전부 여성/남성의 차별적 지위를 만들어낸 원인이 될 수 있었다. 너무도 아득해서 이렇게 거대하고 뿌리 깊은 것을 어떻게 바꾸겠어, 하는 부정적인 생각만 들었다. 원인을 아는 것이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지금 현실에서 시작하여 내딛는 것이 좋을 터였다. 여성/남성이라는 젠더는 어떻게 해야 분해할 수 있고 없앨 수 있단 말인가. 머리를 짧게 자르고 바지만 입고 다니는 것으로 ‘진짜 남성’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신체에 상관없이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다는 메시지를 온 몸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희미하게 해 두 젠더의 계급 차이에도 균열을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희망사항 말이다.
그러다 문득 여성이라는 젠더 정체성을 지우기 위해서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옷차림도 바지를 입고 다니는 ‘남장’을 한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최근 여성들 사이에서 불고 있는 ‘탈코르셋 운동’도 남성처럼 보이는 방향이라고 알고 있었다.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여성 젠더를 벗어나 남성 젠더처럼 꾸밈으로써 오히려 남성 젠더가 ‘인간의 기본형’임을 인정하는 것 아닐까. 그렇게도 ‘남성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개념이 싫어서 벗어나고자 애쓰고 있는데 남성으로 흡수되다니, 이분법을 깨고 일원화되는 것 같았다. 더욱 경계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긴 머리가 잘 어울리기에 머리카락을 기르고, 몸매의 매력을 극대화한 옷을 입는 게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러한 여성 젠더 표식들에 ‘수동적임, 연약함, 가냘픔, 성적으로 매력적임’이라는 개념들이 붙어있고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이 문제이지, 논리적으로 머리카락이 길고 가슴은 크고 허리는 잘록하다고 해서 수동적이고 연약한 것이 아니니 말이다. 여러 예시들이 생각났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부족 아마조네스는 매체에서 풍성한 머리카락에 육감적인 몸매를 가지고 있지만 사납고 전투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21세기 매체가 그린 여성이기에 그렇게 그려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아마조네스는 생존과 번영을 누리는 에너지가 있는 집단이었다. 긴 머리카락과 치마가 투쟁적인 성격을 없애지 않았던 것이다. 애인이 해준 대학시절 이야기도 떠올랐다. 남녀가 같이 하는 피구 경기가 있었는데 사람이 모자라서 갑자기 참여하게 됐다는 것이다. 쉬폰원피스를 입고서 경기에 나가겠다는 애인을 주변에서 말리기도 했는데 워낙 구기 종목을 좋아하고 승부욕도 강한지라 신나서 경기를 했단다. 공을 잡고 던지는 모습이 얼마나 맹렬했는지 친구들이 이후에도 무서워했다는 이야기였다. 운동에 적합한 차림은 아니지만 쉬폰원피스를 입었다고 해서 운동을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줘 재미있었다. 고정관념을 깨는 사례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면 젠더의 성격에 대한 편견도 옅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됐다. 외모가 차별의 표식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어떤 모습을 하든 자유로울 것이었다.
한편 젠더를 분해하는데 있어서 성적지향 또한 고정시키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성애자, 동성애자, 양성애자라는 단어는 젠더가 남성/여성이라는 두 성으로만 이루어져있다는 판단을 전제하고 있으니 말이다. 성별이분법에서 벗어난 성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젠더퀴어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무슨 성애자라고 불러야 한단 말인가. 자신의 성정체성을 여성/남성으로 규정짓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와 짝지어 성적지향을 규정하는 것도 힘들어질 터였다. 더불어 이성애자라고 하더라도 ‘모든’ 이성에게 사랑을 느끼고 동성애자라고 하더라도 ‘모든’ 동성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어서 젠더로만 성적지향을 가리기에는 모자라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자라서/남자라서 너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너여서 사랑에 빠진 것이라고 한다면 ‘너성애자’라고 부르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 사람의 특유성을 생각한다면 그의 젠더도 여성/남성으로 획일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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