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의 신체와 스포츠의 정정당당함


1. 두 개의 섹스, 두 개의 신체


    사진작가 하워드 샤츠(Howard Schatz)는 ‘ATHLETES’라는 작업에서 스포츠 종목에 따라 각기 다르게 발달된 선수들의 신체를 한 줄로 나열했다.[각주:1] 사이클 선수의 허벅지, 수영 선수의 광배근, 레슬링 선수의 납작한 귀와 땅딸막한 체구, 농구 선수의 길쭉하게 붙은 종아리 근육 등 각기 다르게 발달한 신체를 통해 스포츠의 특징을 한 프레임 안에서 볼 수 있었다. 흥미로웠던 부분은 신체에 나타난 종목 간의 유사성인데, 비슷한 또는 같은 종목이라고 생각해왔던 종목들이 예상과 다르게 각기 다른 신체 발달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200m 육상 선수의 신체는 같은 러닝 레이스 종목인 마라톤 선수의 신체보다 오히려 농구 선수의 신체와 닮아 있었다. 특히 마라톤이나 체조에 유리한 신체의 조건은 작고 왜소해서 운동선수를 생각할 때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신체의 표상과 멀었고, 흔히 운동선수라고 여겨지는 큰 키와 크고 작은 근육이 적당한 비율로 붙어있는 신체 표상은 단거리 육상이나 농구 선수의 신체와 가까웠다. 경계 없이 나열된 선수들의 신체를 보는 것은 종목의 경계들이 다시 세워지는 경험이었고 그 과정에서 성별의 명확한 구분이 사라지니 강조되는 것은 선수들의 각기 다르게 발달한 신체였다. 장대높이뛰기 선수와 투포환 선수가 나란히 서 있는 장면에서 드러나는 것은 성차화된 신체가 아니라 체형, 인종, 국가와 같은 조건들이었기 때문에 하마터면 스포츠가 성별이라는 엄격한 기준으로 필드의 영역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어버릴 뻔했다.


    스포츠에서 대부분의 종목은 두 가지 섹스를 기준으로 리그를 나누며, 섹스의 특징은 분명한 신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스포츠에서 분명한 신체의 차이라는 것은 성기가 아니라 신체 능력의 차이이기 때문에 성별의 경계를 넘나드는 신체를 상상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법적 성별 여성으로 지정된 선수들이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을 때, (트랜스젠더 여성이 아닐지라도) 그 성별은 의심받는다. 하워드의 작업에서 나열된 선수들의 신체에서 발견한 차이들은 종목이 가진 특징이었다고 한다면, 선수의 성별에 따라 대표되는 표상을 만들고 그러한 스포츠의 규범들이 다시 어떻게 섹스를 기술하고 있는지 물을 수 있는 지점이 생긴다. 그러므로 스포츠에서 트랜스젠더를 이야기하는 것은 정체성을 통과하여 오롯이 나로서 역량을 끌어들이는 문제뿐만 아니라, 성별에 따른 경계와 규칙에 질문을 던지고 신체와 관련된 인식의 변경을 요청하는 또 다른 문제다. 여자의 신체라고 했을 때 쉽게 기술하는 물질화된 신체 규격은 남자의 신체와 경쟁하기에 너무 약한 신체이기 때문에 스포츠에서 성별을 의심받는 자는 언제나 뛰어난 실력을 갖춘 여성 선수이다. 그래서 트랜스젠더 선수들의 불공평한 신체에 대해서 문제 삼을 때 이야기되는 것은 언제나 여성 리그에 속해있는 트랜스젠더 선수들이며, 남성 리그는 섹스와 호르몬 수치에 상관없이 누구나 정정당당하게 싸울 수 있는 공간으로 여겨진다.


2. 언제나 침입당하는 여성 리그?


    2015년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지정한 성별에 대한 지침에서 트랜스젠더 남성의 남성 리그에서 경기 참가에는 아무런 제약을 두고 있지 않지만, 여성과 경쟁하길 원하는 트랜스젠더 여성 선수는 테스토스테론 수치를 12개월 이상 10nmol/L 이하로 유지되어야 하며, 경기 이후에도 4년 이상 자신을 여성으로 증명해야 한다.[각주:2] 남성 리그가 어떠한 제약을 두지 않는 반면, 여성 리그는 엄격하다. 이러한 배제와 차별은 트랜스젠더 여성 선수들에게 한정되어 제기되는 문제이며, 남성 리그에 출전하는 트랜스젠더 남성 선수들에 대해서는 교묘하게 말하지 않음으로써 삭제하거나 무려 대견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영화 <게임의 규칙(Changing The Game, 2019)>에서 등장하는 트랜스젠더 남성 레슬링 선수 맥 비그스(mack beggs)는 UIL(University Interscholastic League)의 규정에 따라 남성 리그에 속하는 것을 허용받지 못해 호르몬 투여 과정 중에도 여성 리그에서 경기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맥이 여성 리그에서 2년 내내 무패 신화를 쓰며 챔피언십 메달을 차지하자 사람들은 남성이 리그에서 뛰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비판을 퍼부었지만, 맥이 남성 주니어 리그에서 3위를 차지하자 사람들은 관심을 끄거나 오히려 그를 기특해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트랜스젠더 여성 육상 선수 앤드라야 이어우드(Andraya Yearwood)가 여성 리그에서 뛰고 있을 때 받은 엄청난 야유와 혐오의 반응[각주:3]과 상반된다. 앤드라야의 신체는 좋은 기록을 세울수록 여성의 공간을 침입하고 불공평하게 파이를 빼앗는 위협이 되고, 맥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정정당당하게 남성 리그에서 좋은 기록을 세운 무해한 신체로 해석되는 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스포츠가 무엇인지, 그리고 스포츠가 가진 기획이 무엇이었는지 이 자리에서 다시 질문하게 한다.


    여성 리그는 무엇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트랜스젠더 선수들을 배제하려는 것일까. 규범적인 여성성? 스포츠가 기획한 여성의 신체를 가진 자가 가져가야 했을 빼앗긴 트로피? 이것은 마치 여성들이 우리들의 공간을 지키고 빼앗기지 않기 위해 침입자를 검열하는 장치를 쌓아 올리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지만 스포츠라는 공간이 전통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을 본질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모든 성차가 남성중심적인 기획을 바탕으로 경계 세워진 오염된 곳이라면? 여성 선수에게 주어져야 할 파이를 트랜스젠더 여성에게 빼앗겼다는 아이디어를 힘겹게 받치고 있는 언제나 약한 여성의 신체는 원래 그런 것이 아니다. ‘성 역할’이라는 개념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구성’의 과정을 거쳐 발명된 것이기 때문에 빼앗긴 것은 여성의 신체이고, 우리의 신체를 빼앗은 대상은 트랜스젠더 여성이 아니다. 스포츠에서 두 개의 성차와 그에 따른 신체의 차이가 신체 능력의 차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환기했을 때, 이러한 성적 구분을 통해 ‘약한 여성’이라는 규범이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낙인찍기의 반복은 트랜스젠더 여성을 배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젠더화된 권력 체계를 의미 없는 고통으로 되풀이할 뿐이다. 그러므로 여성 스포츠 공간의 새로운 침입자는 위협이 아니라 잠재태를 가진 새로운 신체일 수 있고, 두 개의 섹스 사이에 놓이는 침입자의 신체들은 경계를 넘나들면서 신체의 의미와 형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역량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3. 트랜스젠더 여성 선수의 어드밴티지와 디스-어드밴티지


    그렇다면 스포츠는 과연 공평하고 정당한 것일까. 트랜스젠더 선수뿐만 아니라 모든 선수에게 국제 대회의 장은 그렇게 공평하고 정당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최고의 실력을 가진 코치진과 훌륭한 훈련 환경과 장비를 갖출 기회와 조건은 당연하게도 모든 선수에게 공평하게 주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인기 있는 종목에서 우승 트로피는 언제나 경제 성장 국가들에서 가져간다. 스포츠에 공평한 것은 없지만 적어도 성별은 공평해야 하는 것일까. 트랜스젠더 이론가 조안나 하퍼(Joanna Harper)는 호르몬 치료를 받은 트랜스젠더 여성들이 시스젠더 여성들보다 키가 크고 몸집이 크고 힘이 세지만 그것이 반드시 게임을 불공평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높은 수준의 실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자신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어렵기 때문에 그들의 신체가 가진 신체적 이점이 사회적인 약점보다 크지 않다고 말했다.[각주:4] 스포츠가 가진 기획을 생각하면 경기에서 메달을 획득하기 위해서 신체적 이점으로만 절대 가능하지 않다. 스포츠가 국가의 하나의 기획으로 작동하고, 국제적인 스포츠 대회에서 이름을 알리면 곧바로 ‘두유노 클럽(Do you know ○○○?)’ 멤버가 되어야 하는 현상을 지켜보면 스포츠는 누군가를 대표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자들을 위한 장이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게 된다.


    트랜스젠더리즘(transgenderism)을 비판하는 래디컬 페미니스트 쉴라 제프리스(Sheila Jeffreys)는 이번 달 한국의 몇 개의 도시에서 초청 강연을 했다. 그의 강연 소식을 알리기 위해 주최 측에서는 카드뉴스 형태의 홍보물을 업로드 했는데, ‘트랜스 현타(Peak Trans)’를 설명하기 위한 예시로 트랜스젠더 여성 역도 선수 로렐 허바드(Laurel Hubbard)를 들며, 그가 남성 리그의 메달권에 들지 못해 성별 ‘취사선택’을 통해 남성의 신체로 여성 리그의 메달을 휩쓸고 다니는 것으로 설명했다. 본래 여성의 것이어야 했을 메달을 훔쳐 간, 굉장히 불공평해 보이는 이 상황들은 (트랜스젠더 여성의 몸의 경험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그들이 가진 신체가 여성보다 우월하며, 그것이 스포츠에서 우승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인 것처럼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 상정하고 있는 여성의 신체는 페미니즘에서 오랜 논쟁과 투쟁의 장이었다. 정신적인 것의 반대항으로 환원되던 여성의 몸과 물질을 이렇게 본질적인 것으로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정말 더 이상 젠더에 관해, 그리고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젠더화된 억압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게 된다.”[각주:5] 카드뉴스에서 주장하는 남성을 절대 이길 수 없는 피 흘리고 강간당하는 여성의 신체야말로 남성의미경제의 산물이며, 그것이 유일한 여성의 현실이라고 반복하는 것은 어떠한 현실적인 해결방안을 주지 못한다. 편집된 트랜스젠더의 신체를 보여주는 것만큼 실제 여성의 삶과 실제 여성의 신체를 보여주는 방식도 편집적이며, 삶을 긴밀하게 들여다보려는 시도 없이 이원론적인 선택지를 나누어주며 혐오를 선동한다. 그러므로 트랜스젠더리즘 비판과 존재를 부정하는 전략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빼앗긴 신체와 다시 마주하는 것뿐이다. 스포츠에서 트랜스젠더 선수들의 신체는 이원론을 만들고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양 끝에 놓인 섹스 체계의 사이에서 새로운 규칙을 요구한다. 그 요구에 따라 스포츠가 남성-국가 중심적인 기획을 멈추고 새로운 젠더를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이 되기 위해서 새로운 침입자들과 어떻게 경합하고 변화해나갈지 우리는 함께 논쟁해야할 것이다.

  1. 2002년의 작업의 일부를 하워드 샤츠의 웹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https://howardschatz.com/human-body/athletes/ [본문으로]
  2. 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 The current IOC transgender guidelines represent the outcome of the IOC Consensus Me,eting on Sex Reassignment and Hyperandrogenism, Nov 2015, https://stillmed.olympic.org/Documents/Commissions_PDFfiles/Medical_commission/2015-11_ioc_consensus_meeting_on_sex_reassignment_and_hyperandrogenism-en.pdf. [본문으로]
  3. 영화 <게임의 규칙(Changing The Game, 2019)>에서 트랜스젠더 여성 선수들이 받는 야유와 비판은 “생리도 안하면서, 어떻게 여자라고 할 수 있지.”, “피흘림과 감정적 어려움을 극복해야 여자다.”, “누가 봐도 남자 골격이다.” 등 대부분 생물학적 “진짜” 여성이 무엇인지 몇 가지로 간단하게 증명하려고 해서 영화를 보는 내내 나도 여성 탈락의 위기에 몇 번 봉착했다. [본문으로]
  4. 「The Guardian」, 24 Sep 2019, IOC delays new transgender guidelines after scientists fail to agree, https://www.theguardian.com/sport/2019/sep/24/ioc-delays-new-transgender-guidelines-2020-olympics. [본문으로]
  5.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Fwd, 「쉴라 제프리스의 『젠더는 해롭다』 출간에 부쳐」, 2019.10.2, https://fwdfeminist.com/2019/10/02/critic-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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