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공간을 위한 운동: 신체 위협의 공포를 분리하기
- 나의 신체(들): 허주영(출판)
- 2019. 11. 20. 16:37
최근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노래 부르는 사람을 보고 살인자가 될 뻔 했다는 트윗을 읽고 크게 웃었다. 그러나 금세 길거리에서 노래 연습하는 수많은 남성들을 무사히 지나쳐보낸 내 모습이 떠올라, 왠지 모르게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위협을 가하는 제스처를 한번도 제대로 취해보지 못했지만(아닌가? 어쨌든...)) 대부분 그들은 노래를 잘 못 불러서 소리 발산 행위의 의도를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고통스럽고 동시에 위협적이다. 타인의 분노를 일으켜도 실제로 죽임을 당하거나 적어도 신체에 위협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이 부르는 노래는 구구절절 K발라드로 장르화되어 있어서 멜로디를 내뱉는 행위부터 가사까지 하나도 빠지지 않고 고통스럽다. 흥얼거림이나 포효하기로 차지하는 공적 공간의 점유는 길거리를 사적 공간처럼 여기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공적 공간을 이미 자신의 것으로 스스로가 허용한 자의 위치가 가하는 폭력은 잠재적이지 않고 현재적이다. 그들의 행위는 여성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담론의 기반이 되고 안전 보장 담론은 여성들을 공적공간에서 수동적 기호로 존재하게 한다.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들을 떠올려보면, 그곳은 보통 좁거나 어두워서 여성의 흥얼거림은 위협에서 벗어나 위안을 얻는 공간을 생성하고 확보하려는 행위로 나타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재현되는 어둠 속의 흥얼거림은 위험에 빠졌다는 하나의 신호로서 다음 장면을 예측할 수 있도록 한다. 만약 흥얼거림에도 성별이 있다면, 공간에 영역표시를 하는 자의 위협과 언제나 튀어나올 수 있는 죽음의 위협과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자들의 심리적이고 동시에 물질적인 신체의 작용이다. 여성이 죽임을 당하면 거리에서 내쫒기는 것은 또 다른 죽임을 당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여성들이며, 위협이 지나간 현장들은 더 강력한 보안으로 숨겨지거나 위협에 노출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자들만이 활보할 수 있는 공간으로 영토화된다. 그렇다면 안전한 공간을 보장받기 위한 방법은 남성의 출입을 엄격하게 제한한 여성들만의 공간 만들기일까 또는 흥얼거리는 입에 백마운트 초크를 걸어 실제로 죽일 수도 있는 위협을 공평하게 되돌려줄 수 있는 여성들의 신체적 능력 강화일까.
최근 운동과 운동하는 여성들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여자는 체력』, 『운동하는 여자』, 『오늘은 운동하러 가야 하는데』, 『살 빼려고 운동하는 거 아닌데요』 등 운동의 중요성을 새삼스레 강조하는 책들이 출간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주짓수나 합기도 같은 스포츠를 자기 방어(수비)를 위한 운동으로 소개하며 여성들에게 스스로의 신체를 지키고 능동적으로 가꾸어가는 능력을 기르길 권유한다. 어떤 운동을 시작하길 결심하고 체육관에 가면 마초 남성 트레이너, 우쭐거리는 아마추어 남성들에게 둘러싸이는 일을 더 이상 겪지 않기 위해 여성들만의 운동장을 만드는 것이 안전한 방식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여성들의 신체적 능력 강화와 여성들만의 공간 만들기를 동시에 현실화시키려는 움직임은 남성으로 상정된 실재 또는 잠재된 위협으로부터 분리되고자하는 문제와 긴밀하게 관련 있으면서 동시에 그러한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 공간을 차지하려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아마추어 농구 선수로 뛰는 5년 동안 남자팀과 교류전이나 경기를 뛴 것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완전히 분리된 운동장을 만들고 그 안에서 여자들끼리 쾌적한 공놀이를 하는 것이 가능해보이지만 농구공을 들고 길거리 농구를 하러 나가는 순간 그 환상은 깨진다.
길거리 농구는 보통 골대에 공을 던지고 있는 사람들끼리 팀을 짜서 3on3를 하는데 먼저 게임을 제안하지 않으면 누가 먼저 나에게 게임을 제안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 게임을 하는 도중에도 봐주려고 하거나, 어떻게든 이겨먹으려고 온몸으로 달려드는 과도한 움직임은 부상을 불러일으키기 쉬워서 야외 농구장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소외감이나 고립감을 느끼는 것이다. 운동장 안에서 게임을 하는 여성들에게 여성이라는 성별을 잊지 않게 하려는 몸짓들은 결국 다시 분리된 공간으로 나를 밀어 넣는다. 공원에 놓인 한정된 우레탄 바닥의 골대를 차지하는 것(또는 밀어내는 것)은 10~20대의 남성들이며, 결국 이꼴저꼴 보기 싫은 운동장의 타자들은 대관료를 내고 실내 농구장을 빌리는 것이 가장 마음 편한 일이 된다. 운동을 통해 강인해지려는 여성들의 움직임이 점점 분리주의적으로 이동하는 것은 불안을 일시적으로 해소하고 새로운 운동을 시작하는 여성들에게 진입 장벽을 낮추기 위한 것이겠지만 일상적인 공간에서 그리고 공공장소에서 여성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소리낼 수 있는 공간 확보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1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3년 동안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은 수많은 사건들에 반응해왔다. 하나의 사건 또는 의제 안에서 뒤엉키는 사회적 맥락과 여러 차별 요소들과 마주하면서 불러오는 정동들은 신체의 반응을 불러왔다. 이러한 맥락 안에서 운동 또는 운동하는 여성의 신체에 쏟아지는 관심은 신체의 기억으로 남아있는 선명한 억압의 감각에서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발화하고, 공유하고, 분노하고, 결집하고, 흩어지고, 이어가며, 경험하는 정동적 순간들은 즉각적인 신체의 반응을 불러오고 강요된 공포와 불안을 운동 또는 스포츠라는 강렬한 움직임을 통해 종식시키려는 시도가 아닐까. 기초체력과 건강을 위한 일상적인 운동들은 언제나 독려되어왔고, 여성들의 관심과 발화가 만나서 저항의 문화를 만들어낸다. 불특정한 공간들에서 가해질 수 있는 신체 위협의 가능성으로 인해 안전을 위한 장소의 정치는 내부의 불안과 공포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그 실패를 인식하는 순간 한발자국 물러나 더 넓은 시야로 맥락을 마주하거나 안전한 공간에 대한 또 다른 토대를 견고하게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
- 물론 농구는 원래 실내 스포츠지만 정규 게임이나 정기 훈련 이외 시간에 여성들은 어디서 연습하나? [본문으로]
'나의 신체(들): 허주영(출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한 상대를 만나면 이길 수 없지만,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어 (0) | 2020.04.29 |
---|---|
‘어머니-딸’의 재현 체계, 오래된 여성서사는 어디로 가는가(1) (1) | 2020.01.15 |
트랜스젠더의 신체와 스포츠의 정정당당함 (0) | 2019.10.23 |
벽장 속의 스포츠, 여성 스포츠는 퀴어 친화적인가? (0) | 2019.09.25 |
가슴의 무/쓸모 (1) | 2019.08.28 |